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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9.13 :: 시원(詩源)을 생각한다 / 전동진 / 문학들 카페에서
- 2006.09.12 :: 창작의 기본 태도/ 백현국 / 정자나무 그늘 아래 / 다음카페
- 2006.09.12 :: 시인의 의무 /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 김경윤
- 2006.09.11 :: 호만아, 반갑구나.
시원(詩源)을 생각한다 - 전동진 1. 심노숭(영․정조 연간의 문신)은 「누원(淚源)」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눈물은 기쁨, 슬픔, 분노, 괴로움 등을 가리지 않고 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한 특별한 순간과 마주쳐서 느꺼워졌을 때 나온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특별한 순간을 근원인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시간이 의식의 시간이다. 누원(淚源)과 시원(時源)은 상통하는 면이 많은 듯 하다. 마음과 눈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화와 감응으로 눈물이 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파극(新派劇)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과 이와이 순지 감독의 ‘소풍(picnic)'을 보며 흘리는 눈물과 위대한 예술작품과 조우하는 순간 휩싸인 희열 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다르다. 양(量)적 차원에서 다름이 아니라 질적 차원에서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시계 위에서 한 시간은 시침이 30°를 이동한 것이다. 공간화된 시간이며 양화된 시간이다. 이처럼 균질화된 시간과는 다르게 마음 안의 시간은 천변만화의 시간이며 천양지차로 구성된 시간이다. 베르그송의 약동하는 생의 시간, 니체의 영원회귀의 시간, 후설의 영원한 현재가 바로 질적 시간, 의식의 시간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을 살았고 21세기 초반을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이 ‘동시대’라는 말은 양화된 시간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마다 시간의 씀씀이가 다르고 각자의 시선은 과거, 현재, 미래로 다양하게 투사 된다. 이것을 인정할 때도 객관적 시간을 근거로 한 시간은 늘어지고 수축하는 표면적 시간, 표면적 현재를 넘어설 수는 없다. 또한 과거의 한 지점을 되살려 재구성하는 ‘역사적 현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가로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이 가로의 시간에 의해 객관적 시간이 구성된다. 객관적 시간은 우리의 일상이 기반으로 삼는 시간이기도 하다. 배가 고프면 점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점심시간이 되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점심을 먹는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대안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에게 예전에 다니던 학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물었다. ‘정말 재미있는데 끝종이 울리면 그만해야 하는 것이 싫었어요. 정말 하기 싫은 데도 기어코 끝종이 울릴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은 더 싫었어요’라고 대답했다. 학력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대안학교에서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 싶게, 재밌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생활하는 것을 TV를 통해 지켜본 적이 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대안 세상’에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사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다. 나는 시인을 직업이나 기술, 어떤 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한 ‘인류’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정말 미치도록 빽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얼쩡거리는, 그래서 ‘꼴보기 싫어 죽겠는데’도 어찌 해버릴 수도 없어 곁에 두고 봐야 하는 얄미운 족속들이다. 2. 이쯤에서 오래된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구척절애(九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이 시는 몇 가지 점에서 ‘오래’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전라도의 소읍 영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게 쫓겨 만주로 몸을 피했던 조운이 영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을 본 해가 1921년이다. 그리고 1947년에 펴낸 『조운시조집』에 실렸으니 하나의 심상이 언어로 옮겨져 독자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실로 ‘오래’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구룡폭포」는 시조다. 그러니 ‘오래’된 형식이다. 그리고 이 시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으며 오랫동안 사랑받을 것이므로 오래도록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 시임에 틀림없다. 시간은 흐른다. ‘샘’, ‘강’, ‘바다’는 일상이 영위되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 흐름은 과거→현재→미래이거나, 과거←현재←미래처럼 선적(linear)이어야 한다. ‘풀끝에 맺히는 이슬’은 시가 잉태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그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이거나 과거←현재→미래처럼 현재로 수렴하는 시간이거나 확장하는 현재의 시간이어야 한다. 폭포는 연속하는 거대한 물의 기둥이 아니다. 마치 수 백만, 수 억만 개의 유리 구술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이 무수한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그 물방울 중의 하나가 되어 ‘구룡연(九龍淵) 구척절애(九尺絶崖)’를 굴러 내리는 짧은 시간, 그렇게 구성된 시적 현재는 몇 생, 몇 겁의 시간도 일거에 수렴할 만큼 깊고도 깊은 시간이다. 이 폭포의 물방울과 같은 무수한 시간의 입자들 중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입자, 풀끝에 맺혀 있던 이슬 한 방울이 폭포를 구르면서 구성하는 시간, 그 두툼한 시간은 시간의 세로 지향성을 통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 시대’라고 할 때 ‘시대’는 시간의 가로 지향성을 통해 구성되는 객관적 시간을 전제로 한 말이다. ‘시의 시대’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시대는 가로의 시간 못잖게 세로의 시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때 세로의 시간은 단순한 ‘계보’와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시간은 강물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투스의 절망은 인간이 시간 위의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이 절망의 인간에게 우리 안을 흐르는 추억의 강에 두 번 같은 마음 적실 수 있도록 해주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간의 강물에 던져진 돌멩이는 의식의 표면과 닿아서 동그란 파문을 만든다. 얼마나 강렬하게 의식과 만나느냐, 그리고 의식 대상의 크기 정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인식의 질은 좌우된다. 그러면서 그 파문은 최초의 자리에서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지는 것이 아니라 또 아래로 흘러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니 그 파문이 아예 잦아들 시간이면 최초의 인식의 순간과 파문이 사라지는 동심원의 중심은 한참이나 멀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파문과 같이 최초의 근원인상에 끊임없이 달라붙는 시간의 꼬리들을 통해 현재의 지평은 구성된다. 그런데 시간은 꼭 이렇게 구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의식의 표면에서 파문이 희미해져 갈 때에도 최초의 자리에서 돌멩이는 여전히 가라앉으면서 내면에 굵은 흔적들을 새겨 넣고 있다. 이렇게 구성되는 시간이 세로의 시간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시적 현재’를 되살리는 것은 의식 표면의 흔적들만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가라앉았던 의식 대상을 최초의 자리로 솟구쳐 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시적 현재는 넓이의 지평만이 아니라 깊이의 지평까지 동시에 갖게 된다. 하이데거가 시를 최고의 예술로 보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이 구성되는 시적 현재 때문일 것이다. 존재자는 시간의 지평 즉 거처(居處) 위에서만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 바로 ‘현재’를 구성하는 근원인상인 것이다. 생의 시간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은 시를 통해 다시 살아나서 파문들, 시간의 꼬리들이 달라붙고 그렇게 하나의 생이, 한 토막의 생이 뛰놀 지평이 마련되는 것이다. 갑자기 죽음의 순간에도 직면할 수 있고, 최초의 생의 순간과도 조우하게 해주는 것이 이렇게 구성된 ‘시적 현재’라는 시간의 지평이다. 참으로 마술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적 현재는 결코 마술이 아니다. 시계-시간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잊혀지고 소외당한 ‘진짜 시간’인 것이다.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간-자체’를 사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하니 이와 같은 시간은 꿈처럼 만날 수밖에 없다. 시는 그래서 말짱한 정신으로 꾸는 꿈이어야 하고, 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해가 떠오른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너무도 명증한 일이지만 사실(fact)은 아니다. 천체 과학자라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서는 ‘지구가 벌써 180°를 돌아버렸군’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이 어느 정도까지 발달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기처럼 태어난 로봇이 고도로 발전한 인지과학을 통해 성인이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로봇은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먹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다스릴 수 있는 각각의 알약이 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도 시(詩)는 어떤 효용이 있을까, 존재 가치가 있을 것인가. 애초의 물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시원(詩源)은 시원(時源)과 다르지 않은 말인 것 같다. 시가 혹은 문학이 어떤 효용 때문에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던 때는 늘 위험하고 불온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개화기, 1920년대에서 30년대, 한국전쟁, 가까이는 1980년대가 그렇지 않았나 싶다. ‘무목적의 목적’도 결국에는 목적이니 칸트의 말도 썩 내키지 않는다. 우리의 생에는 세 번의 순간이 주어진다고 한다. 최초의 순간은 태어남의 순간이니 있었으나 기억할 수 없다. 마지막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니 있을 것이나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순간은 근원인상이 맺히는, ‘바로 지금’이라는 ‘생의 순간’이다. 이 ‘생의 순간’이 지평으로 열릴 때, 비로소 ‘현재’는 구성된다. 이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고스란히 살려놓는 것이 바로 ‘시적 현재’다. 그러니 시원(詩源)과 시원(時源)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시간’이 의미가 있는 한, 시계-시간이 아닌 ‘시간-자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한 시는 시간과 함께 솟아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시간’이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과 같이 시 역시 일상의 삶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조금 전에 내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지금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사실 때문에 이후에도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시적 현재라는 든든한 존재자의 거처 위에서 시인은 말한다. 지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의 내가 존재한다. 지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후의 나도 존재한다. - <시와정신> 2006년 여름호 |
출처 : 문학들 원문보기 글쓴이 : 구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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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기본 태도 -백현국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 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쓴 작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는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 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 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 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 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심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
출처 : 정자나무 그늘 아래 원문보기 글쓴이 : 바람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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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의무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번역: 박성창/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서구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전설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 신화에 따르면 시인(詩人)은 지옥의 괴물들을 순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시(詩)라는 것이 정말 그런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인들은 여러 민족간의 평화 증진을 위해 시인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기 위하여 세계시인대회의 깃발 아래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시인의 ‘의무’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의무’라 하는 것은 시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시가 갖추어야 할 것, 시의 도덕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 요소를 시인의 의무와 연결시켜 접근하는 것은 기존의 시인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임을 필자는 잘 인식하고 있다. 예로부터 시인은 신들이나 뮤즈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어 활동하는 존재라고 여겨져 왔다. 시인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렇듯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능력에 대한 책임을 논하기보다는 면책적 특성을 더 많이 부각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시인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또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결국 시가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되어 이러한 특수한 능력도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시인의 능력이나 빅토르 위고가 이야기했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논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시인의 책임에 대하여 논해야 할 때가 왔다. 시인에 대한 네오플라톤주의적 비유들, 예를 들어 ‘가벼움의 존재’‘날개를 가진’ 혹은 ‘성스러운 존재’ 등에서 벗어나 오늘날 시인들이 시를 쓰기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뼈를 깎는 행위’이며, 따라서 스스로에게서 오는 좌절감을 비롯한 다양한 방해요소로부터 끝없이 도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가며 지속해야 하는 행위인 만큼, 책무·짐·의무 등의 개념은 어떻게 보면 글쓰기라는 행위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첫 번째 의무는 언어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정성스럽고 섬세하고 특별한 시선으로 언어를 대하는 작가이다. 각 낱말의 의미를 치밀하게 되새겨 보는 사람, 그러나 각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잠재적 의미들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 스스로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언어에 스스로를 비춰 보며, 언어를 재배치하는 사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화려한 기억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언어의 적확성과 언어의 창조능력을 감지하는 사람이며 알파벳 스물네 자를 경건함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말라르메가 희망했던 것처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독트린,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시인의 첫 번째 의무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어를 안정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책임이며, 스스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책임이다. 이것은 또한 까다로운 글쓰기 작업의 소산물로서의 시가 ‘초자연적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 순간 그 시에 대해 가지는 책임이기도 하다. 시인의 두 번째 의무는 세상에 대한 의무로 깨달음과 관심의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세계 모두가 시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존재이다. 시인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대상에라도 눈길을 주어야 하며 침묵의 세계를 위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빵과 바구니, 무연탄을 위해서도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 우리만큼이나 여리고 찰나적인 이 대지를 대신하여 말한다. 시인은 연결하고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세계 속에서 실재를 만들어 낸다.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면, 포착한 관계가 진실된 것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시인이 아침과 저녁의 노을을 노래할 때, 먼 곳을 응시하거나 혹은 우리 가까이 있는 것들을 부각시킬 때, 혹은 실제로는 동떨어져 있는 현실들을 이미지를 통하여 연결시켜 표현할 때,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자취를 더듬으며 우리 존재의 자오선을 그려낸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 우리 존재의 경계를 긋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며,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기서 바로 시인의 경계선에 대한 의무가 생겨난다. 우리 삶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두 개의 심연 사이에서 이토록 소박하면서도 충만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말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것’에 시선을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경계선에 대한 의무, 그것은 기억과 제안의 의무이다.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시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존재하게 될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이중의 책임을 지게 된다. 현재를 구현하는 것, 즉 ‘우리는 어떤 시간 속에 존재하는가?’‘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시인의 소임이지만, 시인의 시선은 늘 보들레르가 표현한 대로 ‘심오한 시절’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과거의 사물들을 다루는 사람’(말라르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현재의 찰나적인 모습을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무’의 경계선 속에 위치시키고 그려내야 한다. 시인의 세상에 대한 의무는 타자에 대한, 동포에 대한, 혹은 후세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포들을 향해 말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언어들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에 끝없이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그들의 존재에 견고함을 부여한다. 즉자와 대자를 고찰하고, 동일한 것과 다른 것을 함께 바라보며, 모든 존재, 모든 사물들과 대면함으로써 ‘무엇이 본연의 것인가?’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 열정과 신중함과 고통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을 노래할 때, 우리 곁의 혹은 사라져버린 존재들을 노래할 때 그것은 사랑의 작업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진심으로 감동시키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의 의무가 된다. 시는 단순히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벌거벗은 마음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의무는 사고와 감성과 느낌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내적인 모든 것, 욕망과 생각과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옥타비오 파즈가 시인은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시인이 인류의 비인간적인 면까지, 우리의 내면을 충족시키는 것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공허함을 만드는 것까지 모두 포용하여 인류의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평과 찬사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요, 가치와 감성의 언어를 구가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숫자에 맞서 격조를, 억측에 맞서 운율을, 기계음과 장사치의 소음에 맞서 리듬을 살려내기 위해 저항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존재 안에서 혹은 존재를 통해서 일정한 품위를 구가하는 것, 고차원적 의미에서 존재와 환경이 일관성과 일체성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시인의 의무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인간정신을 성숙되게 하기보다는 분리시키고 멀어지게만 해온 사람들 사이에 연결점을 찾아주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관찰의 의무, 성찰의 의무, 깨달음의 의무, 관심의 의무, 특수한 시선의 의무 등 시인의 의무 중 상당부분은 결국 시인의 시선에 관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시선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자신의 시선을 펜으로 옮기는 것,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담아내는 것도 시인의 책임이다. 시인이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예언자이건 단순한 목격자이건, 시인은 자신의 시야 안에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트 뵈브 반박론(Contre Sainte-Beuve)에서 제안한 예술가의 정의를 상기해 보자.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가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추함과 무의미함의 베일을 우리 눈에서 걷어내는 사람,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무심해지게 만드는 그 베일을 걷어 내 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것을 보라, 이것을 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다. 1907년 ‘시인과 현시대’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위고 본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은 예술가를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모여드는, 그리고 모여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예술가는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초점이다. ‘예술가의 눈에는 눈꺼풀이 없는 셈이다.’ 시인의 의무에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소 시대에 뒤진 듯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희망의 의무와 아름다움의 의무가 있다. 희망은 ‘절망의 에너지’에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쓰기라는 고된 작업을 힘겹게 지속해 가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희망을 끌어올릴 수 있다. 희망한다는 것은, 앙리 미쇼 식으로 정의한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는 신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글쓰기의 윤리에는 진실의 의무 외에도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작가란 심지어 그 자신의 저항과 반항마저도 지상의 조건을 더 잘 감내하기 위한 양분으로 쓰이게 하는 사람이다. 선(善)과 오랫동안 혼동되어 왔던 미(美),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감정과 윤리로부터 분리된 차갑고 냉혹한 여신으로 숭배했다. 랭보 역시 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조롱하였다. 모든 현대시는 상실과 전복, 수치와 살인 등 미와는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몇몇 현대 글쓰기에서는 추한 것,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것’을 의도적으로 모색하는 듯하다. 여기서 시는 출입금지(off-limits)와 혼동된다. 나는 독일 시인인 미셸 크루거의 말을 인용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 모든 시에 내재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애타게 갈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에 합류하고 싶어한다. …… 추한 것을 추구하는 자, 쓰레기를 추가하고자 하는 자들은 굳이 시라는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시인의 의무는 인간적인 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 그것을 보여 주고 가려내 주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려 주는 것이다. 시인의 임무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것보다 파괴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시는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혹은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의 존재 근거를 찾아 주고자 한다. 우리가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들을 고집스럽게 종이 위에 그려 가는 것이 바로 시이다. 우리의 삶을 조금 덜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들이 작위적으로 미화시키거나 사물의 진실을 속이는 대신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만큼의 꿈과 욕망이 존재하는지를 그대로 보여 주기를 원한다. 행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조건을 한 마디의 간결한 언어로 전달해 주기를 원한다. 삶과 죽음의 시간을 말해 주기를 원하고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삼켜 버리는 나락 속에 빠져 들지 않도록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벌거벗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진적이며 우리의 삶의 근거를 재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시가 그 궁극적 목표를 무엇이라고 천명하든, 시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짚어보게 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대면시키고, 시간의 축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비시킴으로써,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구분해 줌으로써, 시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드러내 준다. ■ |
출처 : 문학들 원문보기 글쓴이 : 김경윤 / 다음카페 [문학들]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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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서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너의 메일을 읽고 머리가 많이 아팠단다. 그리고 참으로 오랫만에 제자로부터 받은 아주 긴 글을 읽느라고 고생깨나 했구나. 호만이가 살아온 세상을 상상하면서 호만이가 많이 힘들었겠구나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호만이가 부쩍 컸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단다.
호만아, 너의 지적 편력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나 부러웠단다. 내가 너의 나이에 읽은 책들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한심스럽더구나.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 철학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어차피 철학도로서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섭렵해야 하겠지만, 네가 평생 갈 철학의 길을 정하는 것도 급한 일이 아닐까? 네가 갈 길이 미학자라면 더욱 섬세한 예술에 대한 감식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공부라는 것이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니고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호만이가 박사학위를 따려고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나는 호만이가 부럽고 질투까지 나는구나. 그래 열심히 공부하거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브루노,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볼테르, 칸트, 헤겔, 포이에르바흐, 마륵스,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가스통 바슐라르, 버트란드 러셀, 비트겐슈타인, 칼 포퍼, 사르트르, 까뮈, 앙드레 말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라캉, 피에르 부르디외 등등 알고 싶은 사상가들이 너무너무 많은데, 아아 우리네 삶이란 왜 이리 번거로운지.... 동양사상은 또 어떻고..... 영화는..... 우리식 철학을 모색하는 이정우(서강대 철학교수를 때려치우고 철학아카데미원장을 하고 있음)의 '인간의 얼굴'(민음사)을 읽으면 현대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을런지.... 진중권의 재기발랄함과 신랄함은 내가 좋아하는 미덕일 테고.... 이진경의 치밀함과 박학엔 입이 벌어지고....
호만아, 세상이 살만한 곳인지는 좀 더 지켜 보아야 되지 않겠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일까?
호만이가 그리는 세상과 내가 그리는 세상이 같은 세상인지 확인해 보기로 하자. 만나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는 시내에 나갈 일이 별로 없고 .......혹시 영화 보러 갈 일이 있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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