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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9.15 :: 꼴린다 / 이봉환 / [사람의문학] 2004년 봄호
- 2006.09.15 :: 겨울 느티 / 최승권
- 2006.09.14 ::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 로버타 진 브라이언트 / 문학들 다음카페에서 가져온 글 1
- 2006.09.14 :: 시 창작 교육에 대한 생각 / 김성중
꼴린다
그때 나는 "사실"과 "의견"을 설명하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자, 손가락이 몇 개냐? 하나요! 모두가 그렇게 대답했다. 응, 그건 사실이지. 그럼 넌 이 엄지손가락이 무엇으로 보이냐? 예, 최고라는 듯한데요? 그래? 넌? 그때 그 아인 약간 머뭇거렸다. 선생님, 자지가 꼴려 있는 것 같습니다! 장난꾼 그 아이가 말했다. 순간, 나는 당황했으나, 침착을 가장하고 얼른 몸을 돌린 후 칠판에 "꼴린다"를 한가운데 아주 크게 썼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몇 초간 전광석화와 같이 머리를 굴렸다. 꼴린다, 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 꼴린다는 것은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란다. 내가 바라보는 사물에 대하여 기타 줄처럼 끊어질듯 긴장한다는 뜻이야. 나무를 볼 때, 돌멩이를 볼 때, 자꾸 짧아지는 햇살을 볼 때 그래서 난 꼴린단다. 와하하하하 - 선생님도 꼴린대. 여자를 봐도 꼴려요? 당연하지. 여자를 보면 난, 아 ,저 여자 참 사랑스러웠겠구나. 저 여자 할머니가 되려고 얼마나 많은 이쁨이 몸 속에서 빠져나갔을까, 생각하며 난 꼴린단다. 그 순간, 나도 아이들도 교실도 하늘도 구름도 모두 꼴려서 팽팽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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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이 열일곱 살,
운동장 쪽 금간 유리창가에서
입김 불며 두 팔 벌리고
어둑한 농구장을 한없이 바라보던
겨울 느티 한 그루.
단풍잎 모두 내어주고
빈 몸으로 소낙눈을 맞듯,
젊은 날의 꿈이 책갈피 속에서만
형광불빛으로 하얗게 꿈틀거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침묵의 전투,
쏟아지는 무수한 지식의 사각형 화살에도
쓰러지지 않고 너를 있게 한 건
검은 구름 틈에서 잠깐 본 푸른 별빛.
오늘도 벚꽃잎 같은 눈발이 내려
운동장을 모두 지우고 있는데
교실 밖으로, 세상 속으로
뛰쳐나가지 못한 정열의 책가방이
마루바닥에 엎드려 씩씩거리고 있다.
저 멀리 새매 한 마리는
농구공처럼 하늘로 튀어 오르는데
열일곱의 느티는 눈발에 외발로 손들고 서있다.
남국(南國)을 그리는 해오라기처럼.
-함께여는 국어교육 2005년 겨울호(통권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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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로버타 진 브라이언트 * 몽상가는 꿈을 꾸고 작가는 글을 쓴다. 그런데 그 결실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행동―글쓰기―이다. 애오라지 당신만이 말 할 수 있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말하라! 정열적으로, 최대한 즐겁게! * 글쓰기 경험은 종이 위에 낱말을 늘어놓으며 글과 씨름을 하다보면 저절로 생긴다. * 글쓰기를 배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글쓰기 자체보다 선생님의 격려와 관심이 중요했다. * 내가 글쓰기 강의를 하는 이유, 그리고 이 책을 쓴 주된 이유는 바로 바버라가 온 마음을 다해 가르친 것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전염된 듯 확산되는 글쓰기의 기쁨과 언어의 맛,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즐거움, 글쓴이만의 개인적 경험이 갖는 가치, 사소함의 가치, 백일몽이든 공상이든 자기만의 생각을 이야기로 탈바꿈시키는 창조적 노력의 가치, 이 모든 가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깊은 믿음을 나는 갖게 되었다. * 여러분에게 정작 무엇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직관, 자신의 창조성을 믿도록 하라. * 여러분이 기꺼이 한번 놀아보겠다는 흔쾌한 기분으로 접근하면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하기보다는 그저 재미로 해볼 때 더욱 깊은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 별개이다. 몽상가는 꿈을 꾸고 작가는 글을 쓴다. * 글 쓰기 제1법칙 ― ‘글쓰기’는 행동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글쓰기는 머리가 아닌 종이에 낱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 최초의 낱말 하나를 쓰고, 새로 낱말을 하나 더 보태는 것, 이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흔히 사람들은 글쓰기를 시도해보고, 가까스로 시작했다 싶은 순간 손을 놓아버린다. 무엇보다 먼저 약간의 배짱이 필요하다. 배짱은 글쓰기를 시작할 때 뿐만아니라, 글쓰기를 계속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 글쓰기를 함으로써 우리는 내면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 대해 배움으로써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된다. * 창조적인 사람들은 나이를 떠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과정에 도전한다. 우연한 기회를 포착하려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버리는 게 없다. 실수도 폐기처분되지 않고, 해결책의 일부로 재활용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 *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야말로 창조적 과정의 최대 걸림돌이다. *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개를 내밀고 틈만 노리고 있다가, 기꺼이 바보가 되어 자신을 송두리째 까발려야 한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송두리째 준다는 것을 뜻한다. 주기를 망설이며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훌륭한 작가는 모든 것을 내주는 작가다. 내주길 망설인다는 것은, 파종을 늦춰서 발아를 억제하다가 결국 씨앗을 죽이는 행위이다. 작가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노출하는데, 우리는 그 위험을 감당해야만 한다. * 창조성은 다만 심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창조성은 쉽게 깨질 수 있는 섬세한 균형 상태이다. 새로운 것에 대해 활짝 열린 마음을 잃지 않고, 창조성을 북돋우며, 최적의 능률을 올릴 수 있는 섬세한 균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과제이다. * 어떤 분야에서든 진정 창조적인 인간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인간이다. 비정상으로 태어나서 비인간적으로 민감한 인간. 이런 인간에게는 누가 쓰다듬어주는 게 주먹질이고, 소리는 소음이고, 운이 좀 나쁜 것은 비극이고, 기쁨은 황홀경이고, 친구는 연인이고, 연인은 신이고, 실패는 곧 죽음이다. 그는 창조를 해야만 하고, 창조물을 쏟아내야만 한다. 규명되지 않은 생소한 이 내적 긴박감 때문에, 그가 창조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 글쓰기 첫 단계에서는 생각이 쓸모없다. * 나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어렵게 버렸다. 부적절한 어휘로 가득 찬 헛간을 과시하고 싶은 유혹도 포기했다. 그 후 비로소 글쓰기가 나아지기 시작했고, 글이 생동감을 띠기 시작했다. * 글쓰기는 자기 발견을 가능케하는 행위였다. *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표현한 글로 이런 조조브라 그림을 그린 후 이것을 화형시킨다. * 공책이나 타자기를 붙들고 생산적인 활동을 한 시간과 에너지보다, 그저 넋 놓고 수동적으로 낭비한 시간과 에너지가 배로 많았다. 글을 좀더 창조적으로, 좀더 빨리, 좀더 잘 쓰지 못하는 것을 고민할 뿐, 꾸준히 글을 쓰지 않았다. * 자기를 아는 유일한 길은 어떤 글이든 글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 글을 쓰려고 씨름을 하며 나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깨닫곤 했다. 즉, 글을 써서 작가가 되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길은 무조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 꿈만 꾸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말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무조건 써야 한다. 글쓰기가 여느 노동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 * 엉성하더라도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써 갈기기 전까지는 평가를 유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저 더욱 많은 글을 쓰기만 하면 저절로 글이 원숙해질 거라고 굳게 믿어야 한다. * 양은 질을 낳는다. 애오라지 많은 글을 쓰기만 하면 한결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다작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디어의 질이 더 높아지는 게 아니다. 고양된 상태와 창조성은 하염없이 글을 씀으로써 얻어진다. *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내 글쓰기 성취도가 종이에 뭔가를 기록한 시간의 양에 정비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행동에 옮길 것인가, 꿈만 꿀 것인가? * 글쓰기 경험은 자기를 내던짐으로써 얻어진다. 우레 속의 피뢰침처럼 영감에 자기를 맡기고 빠르고 사납게 휘갈겨 씀으로써, 손으로 낱말을 버무림으로써, 아이디어와 춤을 춤으로써. * 잠재 가능성을 펼치는 최고의 방법은 놀이 연습을 하는 것이다. * 세계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도 믿음은 꼭 필요한 것이다. 자기에 대한 믿음은 자기 세계를 심화 확대할 수도 있고, 역으로 경험을 제한할 수도 있다. * 혹시 여러분이 진짜 작가(직업적인 혹은 전문적인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면 글 쓰기의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 환상 때문에 잘못된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목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작가란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다. 이러한 정의는 내가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책상에 앉아서 꾸준히 글을 쓰는 데 단단히 한 몫을 했다. * 우리가 작업에 몰두할 수 있으려면 생활이 규칙적이어야 한다. (발작크) * 모든 재능의 핵심에는 자각과 확신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재능이란 일종의 정신력이다. * 진짜 작가란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단지 열심히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 책을 펴내는 것만이 글쓰기의 유일한 목표는 아니라고, 자기를 위해, 혹은 자녀를 위해 글을 쓰는 것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삶을 고양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무용가인 마샤 그레이엄은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용가로서 우리는 연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고 나는 믿는다. 장차 어떤 성취를 이룰 것인가는 바로 이 연습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연습과정에서 나는 영적 만족감과 존재의 실감을 느낀다.” * 경험은 시작을 하는 순간 축적되기 시작한다. “나는 경험이 전혀 없어요.”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데, 처음부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작하라. 뭐든 시작하면 저절로 경험이 생긴다. * 배를 만드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서 만드세요. 그건 배일뿐이에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좀 서툴다면 그게 어떻단 말인가. 얼마 후에는 일이 척척 손에 붙게 될 것이다. * 무조건 글을 쓰는 것이 글쓰기 비결의 전부이다. 글쓰기에 서툴수록 오히려 글을 술술 쓸 수 있다. 완벽하게 써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마음 가볍게 글쓰기 연습을 하는 썩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도피 글쓰기’이다. 도피 글쓰기 escape writing는 기존에 해온 도피 독서 escape reading를 밑거름으로 삼는다. * 내 경우에 독서는 미덕이라기보다 악덕이었다. 글 솜씨를 닦는 데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자문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 독자가 되고 싶은가? 능동적이고 싶은가, 수동적이고 싶은가? * 가능한 한 빨리, 멈추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두 쪽의 글을 쓴다. 그러면서 즐긴다. 일단 쓴 것은 다시 읽지 말라. * 도피 글쓰기의 핵심은 오로지 재미이다. 수사법도, 문학성도 필요 없고, 발표에 한눈 팔지 말고, 남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조리 있게 글을 쓸 필요도 없다. 허무맹랑해도 무방하다. * 인간이 가장 창조적인 것은 외적 보상이나 압력이 아니라 일 자체에 대한 관심과 즐거움, 만족감, 도전의식으로 동기화되었을 때이다. * 글을 쓰다가 그만 너무 진지해져서 글발이 술술 풀리지 않으면 이렇게 자문하라. 다시 나 자신을 위해 더욱 즐겁게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아나이스 닌이 진지하게 쓴 문학작품들, 초현실주의 소설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일기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은 닌은 그것을 편집해서 책으로 펴냈다. *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시를 썼다. 친구 시인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펴내지 않아서, 그녀의 시편들 대부분이 사후에 발표되었다. * 글을 써서 명예와 부를 얻겠다는 것은 잘못된 목표이고, 어리석은 야망이다. 글 솜씨가 날로 늘어가더라도 거짓되거나 비현실적인 기대에 부풀지 않도록 하라. * 나는 명성에 그리 관심이 없다네. 자부심이 부족한 사람들이야 유명해지는 걸 기꺼워하겠지. 게다가 얼마나 유명해져야 만족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한단 말인가? 아무리 유명해진들 인간의 욕심이 다하는 법은 없고, 바보가 아닌 한 죽는 순간에는 명성의 덧없음을 알게 마련이지. 우리의 예술 작품이 올곧고 훌륭하다면 결국은 반응을 일으키게 될 테고, 6개월 안에, 6년 안에, 혹은 죽은 후에라도 제대로 평가를 받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플로베르) *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 개인적 가치를 위한 글쓰기는 습작을 할 때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계속 경력을 쌓아갈 때에도 필요하다. 그런 글쓰기는 모든 글쓰기의 든든한 버팀목인 것이다. * 그들은 글쓰기 행위자체, 글쓰기의 과정이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글쓰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글쓰기 과정에서 얻게 되는 개인적 보상이 인쇄된 작품을 손에 쥐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 모든 사람이 회고록을 써서 개인적 기록을 남겨야 한다. * 글쓰기는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 발표를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렸다. * 내가 믿는 것은, 아이디어를 키우며 아이디어와 더불어 노는 것―아이디어가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값진 일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 글쓰기에 심취함으로써 내 일상은 은은한 즐거움이 감돌고, 더욱 큰 즐거움을 위해 다시 글쓰기에 열중하게 된다. 그 성취감은 너무나 강렬해서, 공책에 쓴 글을 책으로 인쇄할 뿐인 저 바깥세상에서 내 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하등 중요하지가 않게 된다. *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기 구원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잠시 쉬면서 그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이 또 다른 존재로 탈바꿈을 한다 해도, 당신은 도무지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조지 쉬한) * 나의 내면에 도사린 비판적인 자아는 글쓰기 과정을 통제하려고 한다. “첫 문장이 이게 뭐야? 이걸 글이라고 썼어?” * 내면에서 능동적인 글쓰기를 부추기는 창조적 자아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황홀해하며, 언어의 맛에 도취한다. 창조적 자아는 다섯 살배기 아이 같아서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 많다. 창조적 자아의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그건 칭찬을 듣거나 인정받길 원하는 것이다. * 초고를 쓰기가 그토록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토록 많은 잠재 작가들이 글쓰기에 손사래을 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사람들이 글쓰기에 주눅이 드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 창조성을 억누르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검열이다. 실제로든 가상으로든, 끊임없이 평가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굳어버린다. 굳은 상태에서도 일을 끝낼 수는 있겠지만, 그저 무난한 수준에서 멈출 뿐 감히 도약을 하려고 하지는 않게 된다. 완벽주의자라면, 혹독한 자기 평가의 채찍 아래서 마냥 뒤로 미루기만 하다가 포기해 버리기 십상이다. * 읽기가 쓰기를 ‘죽인다’. * 글쓰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읽기이다. 읽기는 곧 글쓰기의 죽음이다. 이미 쓴 글을 되돌아가서 읽어봄으로써 더 잘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거듭 앞 부분으로 돌아가서 글을 고쳐 쓰기 위해 매번 주춤거리게 된다. 그러면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한 페이지를 끝까지 써내지도 못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도 못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든 간에, 더듬거리며 불완전하게라도 일단은 끝까지 글을 쓸 필요가 있다. * 글을 쓸 준비가 되면, 사정없이 검열관의 목덜미를 거머쥐고 벽장 속에 쑤셔 넣도록 하라 * 창조적인 정신은 논리 정연하지 않다.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어린 창조자는, 검열관 없이 일단 글을 쓰기 시작만 하면 곧바로 글쓰기에 심취해서 몇 시간 씩 내리 글을 쓸 수도 있다. 생각과 느낌의 파도를 타고 미끄러져가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글쓰기 행위 자체의 즐거움에 심취하게 된다. * 유일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글 쓰기는 직관적인 글쓰기이다. 글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미리 다 알고 글을 쓴다면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글쓰기는 신명나는 것, 즉흥적인 것, 줄곧 뜻밖인 것, 놀라운 것이어야 한다. 엉겁결에 씌어진 글이 아름답다. 나는 계산하지 않고, 다만 행동하고 반응하며 강한 정서에 이끌린다. 그러면 저절로 좋은 글이 나온다 * 글쓰기의 제 2법칙― 열정적으로 쓰라. 차분한 사람이라도 좋아하는 일은 열정적으로 추구하게 마련이다. 열정에는 창조성이 뒤따른다. * 글을 쓰는 날이면 창작의 샘을 자극하기 위해 야외로 나선다. * 내가 글을 쓰는 날, 글을 쓰는 시간이 내게는 예배의 시간처럼 신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외에서 조깅을 하는 것, 조용한 작업실에서 차 한 잔 하는 것, 우선 5분쯤 준비 운동으로 일기를 쓰는 것, 그 모든 것이 내 예배 의식의 일부이다. * 책상 앞에 앉은 나는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다섯 살 배기가 되어, 일종의 집단 창조성과 교감을 하고자 한다. 나는 종교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글쓰기 시간을 할애하고 수호한다. * 어떤 이야기, 어떤 책, 어떤 생각도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 힘겹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그런 믿음을 키운다. * 알몸으로 노출된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90퍼센트이다. * 날마다, 혹은 일주일에 서너 번씩이라도 계속하다 보면 달리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 내게는 글쓰기가 달리기와 똑 같다.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 할 때에는 항상 처음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컨디션 조절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 나는 책상머리에 일과표를 붙여두고, 글을 쓰는 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전화 통화나 가사노동에 시도 때도 없이 매달린다거나, 주의력이 흐트러져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나는 달리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하는 것도 습관화하려고 한다. 하나의 습관을 들이거나 깨뜨리는 데에는 21일이 걸린다. *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면 두뇌에서 모르핀 같은 천연 분비물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 분비물이 쾌감이나 행복감을 일으킨다. 이 분비물에 중독되어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금단현상에 시달린다. * 나는 여러분이 글쓰기 중독에 걸리길 바란다. 글쓰기 습관도 긍정적으로 중독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루라도 고요히 책상 앞에 앉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난다. * 글쓰기에 중독되었을 때 우리는 일을 하고 있다기보다 다만 즐기고 있는 셈이다. *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섹스보다 더 즐겁게.” * 준비 운동을 하듯 5분씩 글쓰기의 힘줄을 풀어주는 버릇을 들여보자. 준비운동 5분만으로 습작을 계속 할 수 있다. 하루에 5분조차도 글을 쓸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5분 동안 줄 곧 종이 위에서 펜을 놀리는 것이다. 생각을 하기 위해 펜을 멈추면 안 된다. 생각을 해야만 하겠다면 종이 위에서 하라. *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눌러서 소리를 내듯, 펜으로 종이를 눌러서 글을 써내도록 하라. 맞춤법은 무시하라. * 나는 뭔가 배우고 있을 때 행복하다. 글쓰기는 곧 배움이고 깨달음이다. 글쓰기는 곧 놀이이다. * 부적격자처럼 여겨지는 나 자신, 나의 생각 혹은 믿음, 나만의 경험, 나의 유일무이함을 글로 써야 하는 것이다. * 나이 마흔이 넘은 사람은 쓰고 또 쓰고 또 아무리 글을 써도 다 쓸 수가 없을 만큼 흥미로운 온갖 경험을 한 사람이다. * 생각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글쓰기는 머리가 아닌 종이에 낱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 올바른 길이란 없다. 올바르지 않은 길도 없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만이 있다. 이런 연습을 하는 목적은 종이에 낱말을 늘어놓는 버릇을 들이기 위해서 이다. * 올바른 낱말을 찾겠다고 손길을 멈칫거리면 안 된다. 새롭게 떠올려야 할 낱말이 있다면 그 자리를 비워두고 계속 나아가도록 하라. 다음에는 뭘 쓸 것인지 생각하며 손길을 멈추지도 말라.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종이 위에 낱말로 늘어놓아야 한다. * 컴퓨터를 사용할 경우, 앞서 쓴 글을 읽고 실수한 것을 고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모니터를 까맣게 해두거나, 수건 따위로 모니터를 가려놓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 멈추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글쓰기 방법을 이용하면 자기검열을 피할 수 있고, 창조의 흐름을 자극할 수 있으며, 놀이하듯 글쓰기를 할 수 있다. * 여러분이 벽에 부닥친 작가라면 더욱 이 해방감을 만끽할 필요가 있다. 쓰지 못할 말이 없는데 정작 쓸 말이 없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면 바로 그 사실을 쓰면 된다. * 자기 작품은 놀이의 결과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정말 놀랍도록 진지하게 논다. 하다못해 줄넘기를 할 때에도 그렇다. 누구나 놀이에 몰입하면 진지해진다. 거기엔 분명 어떤 리듬이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처음 15분에서 20분 혹은 30분에 걸쳐 글을 쓰며 리듬에 몸을 맡겨보라. 일단 글쓰기에 몰입하면 리듬을 타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놀이 상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대상이어도 좋다. 실내에서 눈에 띄는, 마음의 눈에 띄는 것을 하나 고른다. “나는 거시기다......” 여러분은 받아쓰기를 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인터뷰 기자여도 좋다.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말하게 하라. * 마지막 한 쪽의 글이 종잡을 수 없는 흰소리라 해도, 할 말이 없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기꺼이 한 쪽만 더 쓴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글쓰기가 습관이 되고, 글에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 일기를 쓰라. 일기 쓰기야말로 손쉽게 종이에 낱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 일기는 개인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발표한 글들을 쓰는 데 밑거름이 된다. * 글을 써서 책으로 펴내겠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최고의 길이 바로 일기를 쓰는 것이다. 일기는 글쓰기를 통해 삶을 탐구하는 최고의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 일기 쓰기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손쉬운 글쓰기 방법이다. 일기를 친구로 여기는 것이 좋다. * 은밀한 일기야말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글쓰기 공간이다. * 글쓰기 제3법칙― 정직하게 쓰라. 알몸을 드러내라. 독창적인 것에는 진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개를 내밀고 틈만 노리고 있다가 기꺼이 바보가 되어 자신을 송두리째 까발려야 한다. * 일기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자기 인생의 크고 작은 기쁨과 행복을 저장할 수 있는 곳이다. * 작가로서, 세상에 보여줘야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유일한 당신 자신이다. * 책 한 권을 저술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리에 앉아(혹은 일어나) 글을 쓸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어렵다. (에드워드 애비) * 나는 글쓰기가 두렵지만, 으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부한다. 해야 할 일이 막중하다는 사실, 그 막중한 일을 혼자서 해야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나는 다만 겸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다. 나는 이제 정신의 어둠을 헤치며 나아가게 될 것이다. (스타인벡) * 우리는 누구나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한다. 가능한 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며,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삶이 단순하고, 확실하고, 순탄하기를 바란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한다. 확실성은 의심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으며 결과는 실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의심 없는 확실성, 실험 없는 결과를 얻고자 한다. 어떻게든 문제를 처리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어둠과 무지를 헤치고 나아가는 길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결과만 듣고 싶어하며,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을 때에만 모종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어둠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식 속의 모든 계몽된 사고의 힘을 불러내야 한다. 나아가 깊은 사고를 해야 한다. * 글쓰기에 성공할 수 있는 비결 하나는, 머릿속이 아닌 종이 위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다. * 나는 내가 쓰려고 하는 글과 비슷한 유형의 남의 글은 읽지 않으려고 한다. 비교를 해서 득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다잡게 하는 자극적인 책을 찾아 읽는다. * ‘쓰려고 한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허한 몸짓일 뿐이다. * 글쓰기는 종이 위에 펜을 얹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쓰려고 해봤다’는 것은 구차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글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 그 중간은 없다. * 글쓰기는 낱말을 늘어놓고 문장을 만들어내며 쪽수를 늘려 가는 행위이다. * 글쓰기야말로 위대한 기술이라고 말한다. 대리석이 아니라 점토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영구적인 청동이 아니라 종이로 작업하는 것이며, 첫 문장은 되는 대로 어수룩하게 쓰도록 하라. 첫 문장을 써놓고 허둥지둥 출판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되는 대로 첫 문장을 쓰고, 이어서 다음 문장을 써라. * 글쓰기의 첫걸음은 어떻게든, 어떤 방법으로든 첫 문단을 기꺼이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미리 정해둔 글쓰기 시간이 끝날 때까지, 펜이나 손가락을 그저 끊임없이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 두려움은 자기 의심의 한 형태이다. 이 두려움의 의붓자식인 완벽주의야말로 창조성의 최대 걸림돌 가운데 하나이다. 완벽주의자는 행위나 성취에 대해 이상적인 기준을 세운다. 그는 독창성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부풀리고, 필요로 하는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예상치도 부풀린다. 안타깝게도, 지각과 감각이 있고 창조적인 사람들 대다수가 완벽주의를 앓고 있다. *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글을 추구하는 것이 글쓰기에 걸림돌이 된다면, 이제까지의 글쓰기와 관련된 모든 폐단을 버려야 할 것이다. 첫 단계의 글쓰기를 하면서부터 가치를 저울질하는 타성을 버리고, 종이 위에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세를 기를 필요가 있다. 글쓰기를 기꺼이 즐긴다는 마음을 북돋우도록 하라. * 용기야말로 자기 의심 중독증을 치유할 수 있는 묘약이다. ‘졸렬해도 좋다’는 용기만 있어도 된다. 내면의 비평가가 판단 중지를 거절 할 때, 졸렬해도 좋다는 용기만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내면의 비평가로 하여금 제안을 하게 할 뿐, 비난을 퍼붓게 하지 말라. 막막하고 어수선하고 몽롱한 아이디어를 붙들고 씨름하며 대담하게 실험적인 글을 쓰고자 할 때면 심호흡을 하라. * 글이 혼란스럽다고 느껴지면, 이르고자 하는 투명함이 저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되새기도록 하라.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졸렬하더라도 뭐든 계속 쓰도록 하라. * 미지의 세계를 향해 대담하게 뛰어드는 사람에게는 자기 의심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 때로 나는 앞에서 쓴 몇 개의 문단을 계속 베껴 쓰기만 할 때도 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다시 넉넉한 흐름을 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나는 곧잘 5분 정도 그날의 자기 의심을 종이 위에 되는 대로 늘어놓으며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나는 자기 의심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글쓰기에 끼어드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 자기 의심을 이해하고, 자기 의심과 벗하라. 어쩌면 여러분과 자기 의심이 서로 도우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 글쓰기는 너무 진지해서 더는 진지할 수 없다 * 글쓰기 제4법칙―재미로 써라. 자기를 위해! 작가가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면, 어떤 독자가 그 결과물을 즐기겠는가. * “나는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유희적인 너의 일부분이야. 너 자신을 즐겨라. 진지하기로 마음먹으면 내가 도와 줄 수가 없어.” * 말장난이라도 하면서 기분전환을 하는 게 내 장기야. 말을 비틀고, 의미를 비틀고, 엉뚱한 말들을 짝짓기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거든. * 글쓰기의 걸림돌: 쓰기 전에 생각한다. 쓰지 않고 연구만 한다. 수많은 조언을 구한다. 나쁜 평가를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영감을 기다린다. 뒤로 미루고 또 미룬다. 항상 진지하다. * 자신의 걸림돌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자신의 뮤즈, 영감 혹은 내면의 지혜와 토론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어도 좋다. * 나는 세상이 결딴난다 해도 타자기 앞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방정을 떨고 돌아다닌다면, 나타날 준비가 된 언어는 모습을 감추고 말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대해 수다를 떨거나 꿈꾸지 않고 바로 글을 쓴다.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입을 놀리지 않고 손을 놀려서 글을 쓴다. * 나는 자제력 discipline보다 한결 더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끈기. 자제력이 없어도 끈기 persistence는 있을 수 있다. 끈기와 자제력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는 자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그 부정적인 의미에 숨이 턱 막혔다. 끈기라는 말은 훨씬 더 긍정적이었다. * 계속 밀어붙이도록 하라. 끈기를 당해낼 만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재능도 끈기보다는 못하다. 세상에는 재능이 많은 실패자가 우글거린다. 천재성도 끈기보다는 못하다. 세상에는 펴보지 못한 천재가 널렸다. 교육도 끈기를 따라 잡지 못한다. 세상에는 교육받은 낙오자가 즐비하다. 끈기와 결연한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 글쓰기 제5법칙―무조건 쓰라. 기를 꺾는 내면의 혹은 외부의 어떤 말도 무시하라. 끈질기면 항상 얻는 게 있다. *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고자 하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행동하라. 실패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 끈질기게 계속하고 또 계속하라. * 소망이 주어질 때에는 그 소망을 실현시킬 힘도 더불어 주어진다. 다만 수고를 좀 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면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 아이디어를 종이 위에 옮겨서 생명을 부여하는 일에 몸을 던지면 된다. 몸을 던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 몸을 던진다는 것은 실제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뒤따른다. * 내가 배워온 글쓰기 방법은, 우선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구상하고, 얼개를 잡고, 그 얼개를 고수하며 글을 써 나가라는 것이다. *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글을 써내기도 한다. * 나는 원래 구상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탈은 죄책감을 낳았다. 내가 죄책감에서 벗어난 것은 ‘교정모형correction model' 이라고 불리는 학습이론 얘기를 들은 후였다. 먼저 행동을 하고 나서 잘못을 교정한다. * 글쓰기의 경우야말로 시행착오-착오-착오 방법이 그대로 적용된다. 낭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버려지는 것도 없다. 어떤 시행착오를 통해서든 항상 뭔가 얻는 게 있기 때문이다. * 글쓰기 제6법칙― 많이 써라. 모든 것을 이용하라. 글과 씨름을 하다 보면 버릴 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빙판과 빙산의 차이를 간파해 낸다. * 실패한 일이 있을 뿐, 실패한 인간은 없다. 나는 소설을 멋지게 마무리짓는 데 실패할 수 있고, 책으로 펴내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실패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 경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통해, 뭔가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배우는 게 많기 때문이다. * 아주 흥미롭게도 나는 실패를 할수록, 성공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 중요하지도 않은데 의무감으로 글을 쓰지는 말아야 한다. 글쓰기를 통해 남이 아닌 내가 먼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나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한계 안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서정적인 글을 쓸 능력이 없었다. 어휘력이 부족했지만 어휘력을 늘리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은유에 재능이 없었다. 독창적이고 절묘한 직유도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시적 비약을 하거나, 폭넓게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도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리한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놓쳐버리는 수많은 것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내가 본 것을 명료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풍성한 어휘력이 없으면 원하는 만큼 글을 잘 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논리적 감각이 있어서, 타고난 한계 안에서 좋은 글을 쓸 수는 있을 거라는 고통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서머셋 모옴) * 계획한 글이 잘 씌어지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1. 이 글을 쓰는 게 누구를 위해서인가? 2.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운가? 3.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가? 4. 이 글쓰기는 내게 얼마나 중요한가? 5. 지금이 이 글을 쓸 적절한 때인가? 6. 지금 쓰고 있는 글의 내용에 열정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가? 7. 이 아이디어를 글로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의 능력을 끌어 올려서 기꺼이 탐구해보겠다는 열의가 있는가? 8. 초고를 완성할 때까지 규칙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의향이 있는가? 9. 완벽을 바라는 온갖 기대나 요구를 떨쳐버릴 수 있는가? 10.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글쓰기를 끝까지 밀어붙일 의지가 있는가? 11. 창조적인 탐구의 기회 혹은 자기 발견의 기회를 즐긴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가? *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알 필요가 있다. 생각이란 부뚜막과 같다. 이 부뚜막에서 모든 진실이 죽고, 털이 뽑히고, 토막이 나고, 튀겨지고, 절여진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책이다. 생각하기보다는 날것과 더불어 있게 하는 책 말이다. (루드비히 보른) * 참된 수련은 스스로를 무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무식하게 만드는 수련이야말로 가장 유용하고 가장 훌륭한 자기 수련이며, 아무나 해낼 수가 없는 수련이다. * 참된 생각의 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 독창적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아우성을 듣지 말고 자기 마음 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깨달은 것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모든 천재성의 원천은 성실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적일수록 현명해진다. * 글쓰기 제7법칙―몰입하라. 자신의 아이디어에, 작가로서의 삶에 몰입해서 글을 쓰도록 하라. 자신을 믿어라. * 규칙적으로 글을 쓸 시간을 할애하라. 반드시 날마다 쓸 필요는 없다. 꾸준히 규칙적으로 쓰면 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는 규칙적으로 반드시 글을 쓰는 삶을 목표로 삼는다. * 최소한 한 시간 반은 글을 써서 손이 굳지 않도록 한다. 정해진 시간에는 무조건 글을 쓴다. 종이 위에 낱말을 늘어놓는다. * 사실 30분 동안 무엇을 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글쓰기의 꿈은 날이 갈수록 강렬해지고, 날이 갈수록 글도 강렬해질 것이다. * 아무리 사소한 일과라도 날마다 계속하기만 한다면, 어쩌다 한 번 하는 헤라클레스의 노동을 빰칠 수 있다. 실제로 글을 쓰는 시간만 따지면, 어떤 작가라도 하루 서너 시간이면 족하다. * 때로는 글을 쓰는 재미, 설렘, 창조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지난날 나는 결코 책을 쓰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책이란 것도 결국은 차례로 한 페이지씩 씌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책을 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늘 한 페이지의 글을 쓸 수 있는가였다. 글쓰기의 꿈은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글을 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 내 시간을 수호할 만큼 글쓰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실은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 사람은 누구나 정신과 육체가 가장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에너지 수준을 타고난다. 타고난 그 수준을 억지로 바꾸려 하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천성적으로 활달하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제 페이스대로 온힘을 다해 달리지 못하게 제동을 거는 것은, 수동적이고 목가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남보다 앞서 가서 최고의 업적을 이루라고 다그치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다. (한스 셀리에) * 즐긴다는 것이야말로 첫 단계의 글쓰기 혹은 창조적인 글쓰기의 주된 목적이다. 개인적 가치가 있는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항상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하라. * 좋은 작가가 되려면 날마다 최소한 원고지 13배의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은 다만 쓰레기를 치우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쓰레기에 파묻혀 지내는데, 쓰레기에 치여서는 좋은 글감을 발견할 수 없다. 글쓰기는 운동경기와 같아서 군살이 찌면 곤란하다. 그러기 위해서 13매는 긁어야 한다. (레이 브래드버리) * 1단계 글쓰기에서는 정서적인 우뇌의 특성이 발현된다. 재미, 감각, 직관, 상상, 자발성, 원시적 표현 등이 그것이다. * 2단계 글쓰기에서는 지적인 좌뇌의 힘을 이용하게 된다. 논리, 판단, 절제, 초점, 위트, 언어의 정확성 등이 좌뇌의 영역이다. * 좌뇌형의 학생들은 체계적이고, 기교 지향적이고, 현재의 사실을 얘기하는 데 능하지만, 픽션을 쓰는 데에는 약한 경우가 많다. 우뇌형의 학생들은 과정을 즐기고, 글쓰기 행위를 즐긴다. 그러나 글의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는 서툰 경우가 많다. 그들은 사실적이고 체계적인 글을 쓰는 데 약하다. * 좌뇌형 작가들은 좀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 글을 쓰고 또 쓰는 동안 비판적 자아를 잠재워둘 필요가 있다. 그에 반해 우뇌형 작가들은 분석적일 필요가 있다. * 연습을 통해서 좌우 두뇌 사이의 소통이 원활해지면 유려하면서도 적확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 나로서는 글쓰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글쓰기가 쉽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최초의 낱말 하나를 쓰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작품 전체에 있어서랴. 첫줄을 쓸 때 나는 최대한 빨리 타자기를 두드린다. 그건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상하고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첫 부분을 고민하지 말고 일단 쓰기 시작하라. 대다수의 초보작가들이 벽에 부닥치는 것은, 어떤 문장이든 깔끔하게 다듬어놓은 후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초고의 카오스 상태를 인내하며 초고를 써내는 길을 찾아낸다. (마크 해리스) * 권태는 얇게 퍼진 분노이다. 처음의 흥분이 사라지면 나는 왠지 화가 난다. “이런 쓰레기를 만들어내려고 여태 시간을 낭비했단 말인가?” * 권태는 인생과 예술의 최종 산물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초기 단계의 산물이다. 맑은 작품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필터를 거치듯 권태를 거쳐야 한다, 권태를 겪고 권태를 이겨내야 한다. (스콧 핏제럴드) *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 특히 등장인물이 정해지기도 전에 처음 몇 쪽의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 권태로운 게 아니다. 50쪽을 쓴 후에는 권태가 말끔히 사라진다. (어빙 월리스) * 권태를 인정하고 어쨌든 계속 글을 쓰는 것이 그 방법이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고양 상태에 이를 수 있고, 새로운 수준의 창조성과 희열을 경험할 수 있다. * 작가는 말하지 말고 보여줘야 한다. 묘사를 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설명하는 분석적인 낱말들은 독자를 소외시킨다. * 창조적인 글쓰기의 정수는 허용하는 것이다. 아등바등하며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며 종이 위에 저절로 낱말로 펼쳐지도록 허용하는 것, 어떤 작가는 다만 일어나는 일들을 관조할 뿐이라고 말한다. * 일종의 해방 혹은 방목 상태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조의 상태가 있다. 그런 관조의 상태에서 나는 마음을 비운 채 풀잎처럼 나부낀다. * 창조 상태를 활성화하는 방법 1. 글을 쓰기 전에 먼저 30분 남짓 율동적인 운동을 한다. 2. 글을 쓰기 전에 긴장을 푼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면 놀랍도록 글이 술술 풀리는 사람도 있다. 3. 글을 쓰는 동안 음악을 틀어 놓는다. 산만하지만 않다면 어떤 음악이라도 좋다. 4. 손목시계를 풀어놓고, 다른 시계도 눈에 뜨지 않는 곳에 둔다. 5. 맨 처음 쓰는 글은 손으로 쓴다. 6. 새로 구상한 글을 쓰려면 새로운 공책을 사용한다. 7. 밤에 잠들기 전에, 글쓰기에 심취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8. 글을 쓰기로 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글을 쓴다. 9. 벽에 부닥쳤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웃음 명상’을 해본다. 책상 앞에 앉아서 웃으면 된다. 뭐든 글을 쓰기 시작 할 때까지 계속 웃도록 하라. 무엇을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뭐든 쓴다는 사실이다. * 창조 상태에 접어들면 1.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글쓰기에 몰입하게 된다. 2. 자의식이 사라진다. 심지어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3. 창조하는 모든 것, 모든 과정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다. 4. 즐거움, 재미, 잔잔한 기쁨, 희열, 만족,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 글쓰기도 너무 오래 중단되면 초고를 쓰는 데 필요한 열정이 식어버릴 수 있다. * 문장의 의미만 명료하다면, 맞춤법이나 문법은 일부러 왜곡하거나 어겨도 무방하다. * 독자의 반응을 구하거나 반응을 받아들일 때, 글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말라. 자기 작품은 자기와 깊은 관계가 있으면서도 별개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자기보다 남들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면 글쓰기가 괴로워질 것이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의 비전을 믿는 행위이다. 계속 아이디어에 힘을 실어 주고 가능하면 규칙적으로 글을 쓰도록 애써야 한다. * 자신의 글쓰기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꺾어버린다거나, 글을 쓰는 데 걸림돌이 되는 비평은 건설적이지 못하고 그런 비평은 피해야 한다. * 작가가 작품에 혼신의 힘을 쏟을 때 작가의 개인적 신념이나 열정에서 초월성이 우러나오게 된다. 어떤 독자에게 어떤 말인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간절함을 느낀다면, 일단 초월성의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 초월성은 작가가 스토리와 상호 작용을 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되는 독특한 유기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는 거룩함, 가장 비천한 삶의 그늘에도 기적처럼 깃들어 있는 거룩함과 소중함, 바로 그것을 드러내는 능력이야말로 소설 쓰기와 읽기를 더없이 중요한 인간적 행위로 만드는 중요한 특성이다. 그래서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일 수도 있는 소설이 우리 인생에 대해 더없이 진지한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드러낼 수 있다. 그 유일무이함이 바로 우리가 글로 써야 할 것이기도 하다. * 초월성은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위해 몸을 던질 때 더욱 선명히 우러난다. * 일상의 한계, 기존 지식의 한계, 가능한 경험의 한계, 생각의 한계, 상상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에 바로 초월성이 있다. * 글쓰기를 하며 일상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을 목표로 하라. 노동자는 두 손으로 일을 하는 자이며, 장인은 두 손과 머리로 일하는 자인데, 예술가는 두 손과 머리와 가슴으로 일하는 자이다. 글을 쓸 때 자신의 모든 기능이 총동원되도록 하라. * 책을 펴내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 덕목을 기르도록 하라. 1. 끈기(한번 결단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기질). 2. 열린 마음(글과 씨름을 하며 자기 발견을 한다는 의식). 3. 열정(글쓰기의 길라잡이). * 작가가 된다는 것의 위험과 보람 1. 가슴에 귀를 기울이라. 2. 완전히 준비가 될 깨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다. 너무 많이 읽지 말고, 너무 많이 연구하지 말라. 답을 다 알 때까지 기다렸다가 글을 쓰려고 하지 말라. 3. 꿈을 따르라. 꿈은 논리를 뛰어 넘으며, 설명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4. 글을 쓰거나 책을 펴내고 싶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는 남의 의견을 물어 볼 필요가 없다. 5. 어떤 글이 독자를 사로잡을까 생각하지 말라. 6. 완벽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7. 작가의 꿈을 이루려면 마땅히 값을 치러야 한다. * 글을 써서 작가가 되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길은 무조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 양은 질을 낳는다. 고양된 상태와 창조성은 하염없이 글을 씀으로써 얻어진다. 난데없는 번개에 충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염없이 글을 씀으로써! *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노력도 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재능이란 일종의 정신력이다. * 인간이 가장 창조적인 것은 외적 보상이나 압력이 아니라 일 자체에 대한 관심과 즐거움, 만족감, 도전의식으로 동기화 되었을 때이다. * 글쓰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읽기(되돌아가서 읽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든 간에, 더듬거리며 불안하게라도 일단은 끝까지 글을 쓸 필요가 있다. * 유일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글쓰기는 직관적인 글쓰기이다. 엉겁결에 씌어진 글이 아름답다. * 일단 글쓰기에 몰입하면 리듬을 타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놀이 상태에 이르게 된다. * 아무리 사소한 일과라도 날마다 계속하기만 한다면, 어쩌다 한번 하는 헤라클레스의 노동을 뺨칠 수 있다. * 나는 글쓰기가 두렵지만, 으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부한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다. 나는 이제 정신의 어둠을 헤치며 나아가게 될 것이다. * 글쓰기야말로 위대한 기술이다. 되는 대로 첫 문장을 쓰고, 이어서 다음 문장을 쓰라. 한편의 글이 완성된 후 첫 문단 전체, 혹은 한 페이지 전체가 칼질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 문단이 없다면 두 번째 문단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나는 세상이 결딴난다 해도 타지기 앞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방정을 떨고 돌아다닌다면, 나타날 준비가 된 언어는 모습을 감추고 말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대해 수다를 떨거나 꿈꾸지 않고 바로 글을 쓴다.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입을 놀리지 않고 손을 놀려서 글을 쓴다. 나는 정말 열심히 작업한다. * 계속 밀어붙이도록 하라. 끈기를 당해낼 만한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끈기와 결연한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 소망은 홀로 주어지지 않는다. 소망이 주어질 때에는 그 소망을 실현시킬 힘도 주어진다. 다만 수고를 좀 해야 할 필요는 있다. * 배워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만 많다. 획득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잊어야 할 것만 많다. * 1년이라는 시간을 내서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면, 우리는 인생의 1년을 덜어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머리 끄덩이를 붙잡혀서 그만큼 무덤 가까이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화초는 죽으라고 내버려두라. * 대상을 바라보며 더불어 살도록 하라. 애써 생각하지도 말라. 단지 바라보고, 만져보고, 냄새맡고, 귀를 기울이며, 대상 속으로 침잠하라. * 당신이 주춤하는 순간, 대상과 떨어져서 낱말을 의식하며 걱정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걱정이 낱말들 속으로 스며들어 낱말들이 서로 죽이기 시작 할 것이다. * 우리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창조성과 아이디어와 개성의 원천을 펌프질해서 끌어올릴 수 있다. 실패의 두려움 혹은 성공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평생 글 쓰기라는 취미에 매달려온 지은이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글쓰기 법. 로버타 진 브라이언트 지음, 승영조 옮김. 예담/1만원. |
출처 : 문학들 원문보기 글쓴이 : 이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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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교육에 대한 생각 / 김성중
문학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교훈을 주거나 정서적인 감화와 순화를 준다. 그 가운데 시는 짧은 형식 속에서 다른 어떤 문학 장르보다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압축하여 표현한 장르다. 이런 시의 특성은 시가 상상력과 감정을 동원해야 감상할 수 있는 장르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생들은 시를 배우면서 상상력을 계발하고 정서를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제7차 국어 교육과정의 문학 교육의 목적은 ‘문학의 수용과 창작활동을 통하여 문학능력을 길러, 자아를 실현하고 문학 문화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바람직한 인간을 기른다.’이다. 이는 학습자의 수용주체로서 능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학습자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작품 해석과 비평 활동을 통해 개인의 문학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교육과정에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창작활동’을 명시하고 있고 문학교과서도 ‘창작활동’을 강조하는 편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교육현실은 문학 교육과정의 정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창작을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전문작가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는 학생들이나 교사들이 많다. 문학작품이나 창작이나 작가에 대한 경외를 넘어 공포를 느끼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문학교사들은 작품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지식을 주입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시 교육은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한다. 시교육의 본질은 학습자의 정서를 자극하여 감상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기르는 데 있다. 그런데 상상이라는 작용은 자유롭고 수용적인 분위기 속에서 활발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 수업의 최종적인 목표는 학습자가 시를 읽고 감상할 줄 알며 더 나아가서 시를 즐기고 창작하는 문학능력을 갖추게 하는데 있다. 7차 교육과정에서 수용과 창작을 강조하는 이유도 작품의 창작을 통해서 문학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고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늘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중에서 일상적인 것은 수다 떨기다. 인간은 고독을 참지 못한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대화의 상대가 없으면 혼자서라도 독백을 해야 한다. 이것이 깊어지다 보면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드러내는 글을 쓴다. 일기 쓰기가 대표적이다. 수필을 쓰기도 한다. 시를 쓰기도 한다.
사람들이 시를 쓰고 시에 무엇인가를 담는다.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무슨 절박함이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동시를 많이 쓴다. 중학교에서도 국어시간이나 계발활동 시간에 시 창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입시 때문에 글을 쓰는 것 자체를 멀리 할 수밖에 없다.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은 있으나 그 욕망이 사라지려 하고 있고, 다른 공부를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시 쓰기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교환가치가 이 시대를 지배하면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삶의 양식으로는 비인간화, 추상화, 소외, 물화, 물신숭배” 때문에 자아가 분열되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 물신화에 따른 배금주의의 팽배, 상대적 빈곤감의 확대, 생산 자동화에 따른 인간소외, 상업주의의 팽배에 따른 취향문화의 확산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아존중감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학창시절에 배운 시 말고 애송하는 시가 있는지 물어본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머뭇거릴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학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문제를 풀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시를 시답게 감상할 기회를 박탈당했고, 그래서 시에 대한 증오심만 키웠던 것이다. 물론 시 지도교사들의 능력 부족도 지적해야 한다. 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입식 강의식 수업으로 시를 해체해버린 쓰라린 기억을 교사들은 가지고 있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창작’이 강조되는 이 시점에도, 문학교사들은 시를 나누고 쪼개고 분석하기에 바쁘다. 해체하여 분석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것처럼 교사들의 시 지도 방식은 자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작품을 읽거나 창작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문학을 통해서 해방을 꿈꾸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특히 시창작의 경험은 학생들에게 창조의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후기산업화 시대에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자칫하면 주체가 소멸될 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래도 문학이 있어서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시 창작을 경험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은 창조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분명히 차이가 날 것이다. 상황에 대한 능동적이고도 창의적인 대처능력을 시 창작을 통해 내재화 한 효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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