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6. 9. 13. 08:42

시원(詩源)을 생각한다

- 전동진



1.

심노숭(영․정조 연간의 문신)은 「누원(淚源)」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눈물은 기쁨, 슬픔, 분노, 괴로움 등을 가리지 않고 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한 특별한 순간과 마주쳐서 느꺼워졌을 때 나온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특별한 순간을 근원인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시간이 의식의 시간이다. 누원(淚源)과 시원(時源)은 상통하는 면이 많은 듯 하다.

마음과 눈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화와 감응으로 눈물이 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파극(新派劇)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과 이와이 순지 감독의 ‘소풍(picnic)'을 보며 흘리는 눈물과 위대한 예술작품과 조우하는 순간 휩싸인 희열 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다르다. 양(量)적 차원에서 다름이 아니라 질적 차원에서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시계 위에서 한 시간은 시침이 30°를 이동한 것이다. 공간화된 시간이며 양화된 시간이다. 이처럼 균질화된 시간과는 다르게 마음 안의 시간은 천변만화의 시간이며 천양지차로 구성된 시간이다. 베르그송의 약동하는 생의 시간, 니체의 영원회귀의 시간, 후설의 영원한 현재가 바로 질적 시간, 의식의 시간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을 살았고 21세기 초반을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이 ‘동시대’라는 말은 양화된 시간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마다 시간의 씀씀이가 다르고 각자의 시선은 과거, 현재, 미래로 다양하게 투사 된다. 이것을 인정할 때도 객관적 시간을 근거로 한 시간은 늘어지고 수축하는 표면적 시간, 표면적 현재를 넘어설 수는 없다. 또한 과거의 한 지점을 되살려 재구성하는 ‘역사적 현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가로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이 가로의 시간에 의해 객관적 시간이 구성된다. 객관적 시간은 우리의 일상이 기반으로 삼는 시간이기도 하다.

배가 고프면 점심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점심시간이 되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점심을 먹는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대안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에게 예전에 다니던 학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물었다. ‘정말 재미있는데 끝종이 울리면 그만해야 하는 것이 싫었어요. 정말 하기 싫은 데도 기어코 끝종이 울릴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은 더 싫었어요’라고 대답했다. 학력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대안학교에서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 싶게, 재밌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생활하는 것을 TV를 통해 지켜본 적이 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대안 세상’에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사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다. 나는 시인을 직업이나 기술, 어떤 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한 ‘인류’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정말 미치도록 빽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얼쩡거리는, 그래서 ‘꼴보기 싫어 죽겠는데’도 어찌 해버릴 수도 없어 곁에 두고 봐야 하는 얄미운 족속들이다.


2.

이쯤에서 오래된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구척절애(九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이 시는 몇 가지 점에서 ‘오래’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전라도의 소읍 영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게 쫓겨 만주로 몸을 피했던 조운이 영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을 본 해가 1921년이다. 그리고 1947년에 펴낸 『조운시조집』에 실렸으니 하나의 심상이 언어로 옮겨져 독자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실로 ‘오래’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구룡폭포」는 시조다. 그러니 ‘오래’된 형식이다. 그리고 이 시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으며 오랫동안 사랑받을 것이므로 오래도록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 시임에 틀림없다.

시간은 흐른다. ‘샘’, ‘강’, ‘바다’는 일상이 영위되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 흐름은 과거→현재→미래이거나, 과거←현재←미래처럼 선적(linear)이어야 한다. ‘풀끝에 맺히는 이슬’은 시가 잉태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그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이거나 과거←현재→미래처럼 현재로 수렴하는 시간이거나 확장하는 현재의 시간이어야 한다.

폭포는 연속하는 거대한 물의 기둥이 아니다. 마치 수 백만, 수 억만 개의 유리 구술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이 무수한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그 물방울 중의 하나가 되어 ‘구룡연(九龍淵) 구척절애(九尺絶崖)’를 굴러 내리는 짧은 시간, 그렇게 구성된 시적 현재는 몇 생, 몇 겁의 시간도 일거에 수렴할 만큼 깊고도 깊은 시간이다. 이 폭포의 물방울과 같은 무수한 시간의 입자들 중에서 현재를 구성하는 입자, 풀끝에 맺혀 있던 이슬 한 방울이 폭포를 구르면서 구성하는 시간, 그 두툼한 시간은 시간의 세로 지향성을 통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 시대’라고 할 때 ‘시대’는 시간의 가로 지향성을 통해 구성되는 객관적 시간을 전제로 한 말이다. ‘시의 시대’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시대는 가로의 시간 못잖게 세로의 시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때 세로의 시간은 단순한 ‘계보’와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시간은 강물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투스의 절망은 인간이 시간 위의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이 절망의 인간에게 우리 안을 흐르는 추억의 강에 두 번 같은 마음 적실 수 있도록 해주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간의 강물에 던져진 돌멩이는 의식의 표면과 닿아서 동그란 파문을 만든다. 얼마나 강렬하게 의식과 만나느냐, 그리고 의식 대상의 크기 정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인식의 질은 좌우된다. 그러면서 그 파문은 최초의 자리에서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지는 것이 아니라 또 아래로 흘러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니 그 파문이 아예 잦아들 시간이면 최초의 인식의 순간과 파문이 사라지는 동심원의 중심은 한참이나 멀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파문과 같이 최초의 근원인상에 끊임없이 달라붙는 시간의 꼬리들을 통해 현재의 지평은 구성된다. 그런데 시간은 꼭 이렇게 구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의식의 표면에서 파문이 희미해져 갈 때에도 최초의 자리에서 돌멩이는 여전히 가라앉으면서 내면에 굵은 흔적들을 새겨 넣고 있다. 이렇게 구성되는 시간이 세로의 시간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시적 현재’를 되살리는 것은 의식 표면의 흔적들만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가라앉았던 의식 대상을 최초의 자리로 솟구쳐 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시적 현재는 넓이의 지평만이 아니라 깊이의 지평까지 동시에 갖게 된다. 하이데거가 시를 최고의 예술로 보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이 구성되는 시적 현재 때문일 것이다. 존재자는 시간의 지평 즉 거처(居處) 위에서만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 바로 ‘현재’를 구성하는 근원인상인 것이다.

생의 시간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은 시를 통해 다시 살아나서 파문들, 시간의 꼬리들이 달라붙고 그렇게 하나의 생이, 한 토막의 생이 뛰놀 지평이 마련되는 것이다. 갑자기 죽음의 순간에도 직면할 수 있고, 최초의 생의 순간과도 조우하게 해주는 것이 이렇게 구성된 ‘시적 현재’라는 시간의 지평이다.

참으로 마술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적 현재는 결코 마술이 아니다. 시계-시간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잊혀지고 소외당한 ‘진짜 시간’인 것이다.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간-자체’를 사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하니 이와 같은 시간은 꿈처럼 만날 수밖에 없다. 시는 그래서 말짱한 정신으로 꾸는 꿈이어야 하고, 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해가 떠오른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너무도 명증한 일이지만 사실(fact)은 아니다. 천체 과학자라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서는 ‘지구가 벌써 180°를 돌아버렸군’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이 어느 정도까지 발달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기처럼 태어난 로봇이 고도로 발전한 인지과학을 통해 성인이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로봇은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먹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다스릴 수 있는 각각의 알약이 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도 시(詩)는 어떤 효용이 있을까, 존재 가치가 있을 것인가.

애초의 물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시원(詩源)은 시원(時源)과 다르지 않은 말인 것 같다. 시가 혹은 문학이 어떤 효용 때문에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던 때는 늘 위험하고 불온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개화기, 1920년대에서 30년대, 한국전쟁, 가까이는 1980년대가 그렇지 않았나 싶다. ‘무목적의 목적’도 결국에는 목적이니 칸트의 말도 썩 내키지 않는다.

우리의 생에는 세 번의 순간이 주어진다고 한다. 최초의 순간은 태어남의 순간이니 있었으나 기억할 수 없다. 마지막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니 있을 것이나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순간은 근원인상이 맺히는, ‘바로 지금’이라는 ‘생의 순간’이다. 이 ‘생의 순간’이 지평으로 열릴 때, 비로소 ‘현재’는 구성된다. 이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고스란히 살려놓는 것이 바로 ‘시적 현재’다.

그러니 시원(詩源)과 시원(時源)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시간’이 의미가 있는 한, 시계-시간이 아닌 ‘시간-자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한 시는 시간과 함께 솟아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시간’이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과 같이 시 역시 일상의 삶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조금 전에 내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지금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사실 때문에 이후에도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시적 현재라는 든든한 존재자의 거처 위에서 시인은 말한다. 지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의 내가 존재한다. 지금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후의 나도 존재한다.

- <시와정신> 2006년 여름호


출처 : 문학들 원문보기 글쓴이 : 구름달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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