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6. 9. 12. 21:31

창작의 기본 태도

-백현국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 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쓴 작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는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넷째는 자기만 감동시키는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 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 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공부하지 않는 습작 시인의 문제이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작품은 구조성이 중요하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 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 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끝으로 습작은 습작이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심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2005년 봄 계간 e문학 창간호>


출처 : 정자나무 그늘 아래 원문보기 글쓴이 : 바람숲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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