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고 싶은 책 2006. 9. 19. 08:47

역사를 보는 눈을 뜨게 해주는 책 / 김성중



제목 :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개빈 멘지스 지음 , 조행복 옮김
사계절, 2004

1421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나라는 세종대왕이 조선왕조의 4대 임금으로 재위하던 시절이고, 중국은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가 통치하던 시기였으며, 서양은 중세에서 근대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유럽은 이슬람세력에 의해 인도와 격리가 되어 향료가 있는 동양에 대한 욕구와 환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이 책을 쓴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1937년에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3년에 영국 해군에 입대해 17년 동안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고, 퇴역 후 ‘피치가노 해도’를 만난 것을 계기로 정화 함대의 숨겨진 항해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14년 동안 140여 개국, 900곳 이상의 문서보관소, 도서관, 박물관, 과학연구소, 중세 후기의 주요 항구 등을 답사한 끝에 2002년 정화함대에 대한 연구 결과인 이 책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1492년에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의 발견은 누군가보다 71년이나 늦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도 ‘역사상 최초’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명나라의 정화 함대가 이미 1421년에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마젤란보다 100년 먼저 바닷길로 세계를 일주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이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대항해에 나섰던 것이다.

우연히 만난 1424년의 ‘피치가노 해도’(베네치아)에 이미 카리브 해의 섬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지은이는, 콜럼버스 이전에 누군가가 이미 이 섬들을 탐사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 후 10년 동안의 연구 끝에 도달한 결론은 15세기 초에 대규모 항해를 통해 정밀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중국(명나라)뿐이며, 실제로 그 시기가 1421년~1423년 정화함대의 원정과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처럼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지은이는 해군장교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서 풍부한 현장답사와 치밀한 문헌연구를 토대로 그 주장의 근거들을 보여준다. 일차적으로 정화 함대에 대한 흔적을 찾아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지만, 당시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정화 함대의 원정기록이 파기되고, 이후 명나라가 세계로부터 고립된 길을 택하는 과정, 그로 인해 달라진 역사에 대해서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2002년에 출간된 이 책은 불과 2년 사이에 세계 22개 국어로 번역되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철저한 논증을 토대로 기존의 역사서술의 편향성을 극복하며 빈약한 역사적 상상력을 넓혀준다.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37쪽). 우리들은 멘지스의 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거인은 이 책의 지은이 개빈 멘지스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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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책 2006. 9. 19. 08:17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에밀 졸라-인간과 역사를 탐험한다 03 | 니콜라스 할라즈 저/황의방 역 | 한길사

[진실을 땅에 묻을 수는 없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슈바르츠코펜의 독백-


들어봐라, 프랑스 사람들아.
드레퓌스에겐 죄가 없다.
모든 것이 거짓이고 모략이다.
당시에 빠리의 독일대사관 무관이었던 내가
1917년 죽기 직전에 뱉은 말이다, 진실이다.
그대가 단지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대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모진 고초를 겪었구나, 드레퓌스여.
사악한 집단이 만들어낸
집단발작과 집단최면으로
하마터면 프랑스혁명이 죽을 뻔했구나.
나는 죽은 지금에도 그대에게 미안하구나.
정말로 미안하구나.
에스떼라지 소령이 명세서를 넘겼다지만
내가 보기도 전에 잃어버렸고
프랑스 참모본부가 이를 조작했단다.
나는 백골이 되었어도
참혹했던 1894년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대가 악마도로 떠난 그때를.


드레퓌스를 아는가?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서양의 외로운 섬 악마도의 감옥에서 족쇄를 찬 채 울부짖는 선량한 유태인, 프랑스 육군 대위 드레퓌스, 우리는 그를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 지하에 묻어버린 진실이 얼마나 될까? 권력을 쥔 세력들은 왜 진실을 감추려고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진실은 어떻게 밝혀지는 것일까?

[나는 고발한다]는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책이다. 이 책을 손에 잡는 순간 당신은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야 책을 놓을 것이다. 니콜라스 할라즈는 엄밀한 자료를 바탕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은 거짓을 증오하고 위선을 혐오하고 진실을 밝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친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잡혀가서 유죄를 선고 받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선량한 시민이 편견 때문에 누명을 쓰고 유죄를 선고 받는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적인 문호 에밀 졸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나], [목로주점], [제르미날] 등 [루공 마까르 총서]로 이름을 날린 에밀 졸라는 왜 대통령을 고발하는 공개편지를 신문에 발표했는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식인의 양심을 읽어야 한다. 불의를 보고도 짐짓 못 본 채 한 우리들의 비겁을 읽어내야 한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프랑스를 내전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드레퓌스 사건은 남북분단과 지역감정으로 갈가리 찢긴 한반도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비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당신이 지식인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고발한다]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배기지 못 할 것이다.

책에서 인용 : 졸라는 슈레르와 피카르를 찬양했다. 그들이 비록 악마가 설치는 동안 신의 처분만 기다리기는 했어도.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기보다는 대통령의 임무였다. 나는 궁극적으로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하겠습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은 지하에 묻혀서도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가장 먼 곳까지 재앙을 미치게 할 지뢰를 매설했는지 아닌지........ 긴 편지를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나는 뒤파티 중령을 고발합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나는 이 점을 믿고자 합니다) 법적 과오의 악마 같은 중개인이었음을, 또한 지난 3년간 가장 부조리하고 역겨운 음모와 자신의 사악한 행위를 계속해서 은폐했음을 고발합니다.(중간생략)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 2001/02/17 (kimbyeol)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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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싶은 책 2006. 9. 19. 08:14
조지 오웰은 자유와 자연과 반권력의 정신이었다 / 김성중


박홍규 지음, 조지 오웰, 이학사, 2003.6.25, 326쪽, 13,000원


2003년은 조지 오웰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여서 그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다. 더구나 NEIS(네이스)를 반대하며 정보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1984년'의 빅브라더(Big Brother)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너무 끔찍하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1945)과 '1984년'(1949)을 쓴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물농장'이 미국무부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어로 최초로 번역이 되었다(1948년)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공소설로서 말이다. 그만큼 우리들은 조지 오웰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지은이 박홍규는 조지 오웰이 영국에서는 중요한 작가나 정치사상가로 대접을 받는데도 우리 나라 영문학계에서는 푸대접을 받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조지 오웰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서 이 평전을 썼다고 말한다.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의 궤적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다.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인간오웰, 제2부는 사회주의 작가, 제3부는 반권력의 작가이다. 영남대 법대 교수인 지은이는 오웰을 민중적 사회주의자로 본다. 오웰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모두 전체주의로 보았으며, '동물농장'이나 '1984년'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오웰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본명이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인 오웰은 1903년에 식민지인 인도에서 마약국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립명문인 이튼스쿨을 졸업하고 식민지 버마에서 식민지경찰 노릇을 하다가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회의에 빠져 1927년에 사직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제국주의에 반발하며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다가 1937년에 스페인 시민전쟁에 참전하여 파시스트와 싸운다. 폐결핵과 싸우면서 '1984년'을 쓰고 1950년 1월에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불꽃처럼 스러진다.

오웰의 삶은 그가 스페인 시민전쟁에서 만난 무명의 시민용사를 노래한 시에 집약되어 있다. '당신 얼굴에 나타난 것은/어떤 권력도 빼앗을 수 없는 것./어떤 폭탄도 산산조각으로 부수지 못할 /수정 같이 맑은 정신'.

담배를 꼬나물고 타자를 치는 깡마르고 꺼벙한 조지 오웰을 통해 우리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세상을 얻을 수 있을까? 조지 오웰이 바랬던 보통 사람(민중)들이 인간적 품위(decency)를 지키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오웰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목록은 다음과 같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소설,1933), 버마의 나날들(소설,1934), 목사의 딸(소설,1935), 엽란을 날려라(소설,1936), 위간부두로 가는 길(에세이,1937), 카탈로니아 찬가(르포,1938), 숨쉬러 올라오기(소설,1939), 고래의 뱃속에서(에세이,1940), 사자와 일각수(에세이, 1941), 동물농장(소설,1945),1984년(소설,1949), 코끼리를 쏘다(에세이,1950)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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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2006. 9. 18. 00:02
<시에 전화하기>

이미지로 와서 착종하는 젊은 시 / 강은교



그렇다.현대시는 소리를 잃어버렸다. 이미지를 얻은 대신 메시지 성이 강한 소리를 잃어버렸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도화지이다. 표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엇인가 이미 그려져 있는, 비어있는 캔버스이다. 그 끊임없는 도화지 위에서 소리와 이미지는 끊임없이 축소되고 확대된다. 소리는 이미지의 스피커이다. 또는 소리는 직접화법이며 이미지는 간접 화법이다. 우리의 시 위에서는 그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의 끊임없는 교차가 일어난다. 이미지는 끊임없이 팽창되고 증식되며, 그에 따라 소리는 끊임없이 축소되고 확대된다.

어둠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어둠 속이 보이듯이, 어둠은 수천의 어두운 밝음들의 비늘로 이루어져 있듯이, 현대시의 소리는 소리의 비늘 속에서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또는 이미지의 비늘 속에서 소리를. 그것이 교환이다. 이미지와 소리의 교환의 기적, 특수와 보편의 교환의 기적, 나와 그의 교환의 기적, ___ 그러한 기적이 언어 위에 어둠의 비늘을 쉴새없이 털어 대는 시____그것이 젊은 시이다. 끊임없이 젊은 시이다.




김수우의 시는 가끔 그런 이미지가 되는 소리길 위에 우리, 함께 서 있게 한다.




☎전화하기____1. 김수우




결혼을 앞둔 딸의 단지에

어미는 낙타젖을 따른다.

이는 세상의 강물이니 다 마셔야 한다

코끼리같은 허기가 기다리리니

저 펄럭이는 사막을 안아야 하리니

딸아, 이것을 다 마셔야 한다

사람이 네게로 흘러오리니

사람이 네게서 넘쳐나리니

일곱 살에 색칠햇던 하늘, 한 뼘 한 뼘 완성되어

말라깽이 가슴도 젖살이 오르리라

낙타 등에 올라탄 언덕을 보아라

야자나무가 키우는 낮달을 보아라

이 세상 강물이 달지 않느냐




어미 젖가슴에서 쏟아진 사막

딸의 앞자락 속으로 감겨든다



_______김수우「낙타의 젖이 달다」




김수우에게 전화를 한다.




☎ 위의 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착상이 떠올랐는지,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3년 가까이 생활한 적이 있다. 맨발로 뛰어다니던 말라깽이 아프리카 소녀들. 자라서 결혼이 정해지면 움막에 넣어놓고 낙타젖을 먹이는 원주민의 풍습이 있었다. 살을 찌우기 위해서다. 어머니들이 물려받은 사막을 딸에게 물려주는 하나의 과정이랄까. 그건 마치 이제부턴 삶이라는 사막과 홀로 정면대결을 해야한다는 하나의 결단처럼 여겨졌다. 딸이 사랑하고 살아가고 또 다시 낳아야 할 사막이고 삶이었다. 내게 사막은 존재론적인 세계였다. 사막은 삶의 원형이며 생명의 근원적 울림이 담긴 곳이다. 그 척박함을 살아내야 하는 사막 사람들의 방식에서 생명 자체에 대한 질긴 애정을 본다. 낙타젖을 먹고 살이 찌우려는 의식, 그것이 곧 세상 강물을 달게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현실 그 자체가 아닐까.







이미지와 소리가 시의 몸 위에서 뒤채며 끊임없이 비늘을 털어대고 있는 시가 또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는 소리의 간접화법을 이루고 있으며, 소리는 그 이미지의 직접화법이 되고 있는 시, 소리가 보이는 시, 이미지가 들리는 시_______문태준의 시이다.




☎전화하기___2.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_______「문태준/맨발」


☎ 시 ‘맨발’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착상이 떠올랐는지,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 ‘맨발’은 물론 어물전에서 보고 손으로 만진 개조개 때문에 착상이 되었지요. 그러나, 부처가 열반 후 슬피 우는 가섭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며 마음을 전했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모티브로도 하고 있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부처는 제자 가섭에게 내보인 것이 아닐지요.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나뭇짐을 지고 이십 리가 족히 넘는 김천장까지 그것을 팔러 다니셨던 일을 여러번 말씀하셨지요. 새벽에 집에서 지게를 지고 나서면 반나절을 걸어가셨다고 해요. 나뭇짐을 장에 내다 팔고 빈 지게로 돌아오실 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쓴 시입니다.

☎시를 처음 쓰실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흔히 무엇인지요? 단어, 이미지, 문장, 혹은 주제, 이념 중에서?(단어∠ 이미지∠ 문장∠ ........식으로, 관심도의 순서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 시는 단어로도 오고 이미지로도 오고 문장으로도 오고 주제로도 오고 또 구멍가게에 동네 주민 드나들 듯 수시로 찾아오지요. 마흔 해 넘게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는 한 분이 그러시길, 직접 교열을 보다보면 책장을 그냥 넘기기만 해도 잘못되거나 빠뜨린 글자가 툭, 툭 벼룩 떨어지듯 튀어 나온다고 해요. 시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을 전면으로 스치고 지나갈 때 수면 위로 새우가 뛰듯 혹은 숭어가 뛰듯 튀어 오르는 수상한 놈. 이 놈이 와서 착종하는 게 시라고 봐요. 빈도로 봐서 저에게는 이미지로 자주 오고 그 다음이 문장, 그 다음이 단어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의 소리길 위에서는 이미지의 팽창 ․ 증식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지의 팽창 ․ 증식에 따라

소리의 확대 ․ 축소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의 교차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미지는 소리가 된다. 이미지는 소리의 스피커가 되고 있다.




☎ 전화하기________3. 신경림

소리길은 결국 메시지 성을 띄우고 우리에게 달려온다.

소리의 시각화(視覺化)와 이미지의 청각화(聽覺化)가 순간 일어난다.

중국 실크로드에 있는 돈황굴의 그림 하나가 생각이 난다. 바람을 그린 풍신(風神)의 그림과 우뢰를 그린 뇌신(雷神)의 그림이다.그 그림은 각각 바람을 보이게 하고, 우뢰를 보이게 한다.

소리의 시각화이며, 이미지의 청각화이다.




신경림의 최근작시 두편을 소개한다.




하얀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빨갛고 가녀린 발이 뿅뿅뿅 밟고 갔으리

언덕이 끝나는 곳에서 그것은 끝나고




새파란 허공에

해맑은 새 한 마리 실루엣으로 찍혀 있다




어쩌나

내 발자국 끝나는 곳에서 둥실 떠올라

나도 저처럼 하늘에

실루엣으로 남는다면....

해맑기는커녕

검고 칙칙한 얼룩으로 누더기가 되어

허공에 실루엣으로 남는다면....

[허공/신경림]




어쩌다 꿈에 보는




복사꽃이 피어 있었을 거야.

장마당 앞으로 길게 강물이 흐르고 강물 위로는 안개가 피어나고.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면서 웅성웅성 뜻 모를 말들을 주고받고

나는 덜렁덜렁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즐거워도 하고 슬퍼도 했지.

어디선가 물새도 울었어, 아침인데도 닭들이 홰를 치고.

나는 노새였던가 아니면 나귀였던가.




어쩌다 꿈에 보는 이것이 내 전생일까!




나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는 일도 있다.

낮이고 밤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람과 눈비에 시달리면서

안타까이 그 전생의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꿈을 꾸는 일도 있다.

조금은 거짓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위선에 빠지기도 하면서

그것이 부끄러워 괴로워도 하고 또 그것이 다행스러워 자못 안도도 하던.

막상 왜 사는지도 모르고 무슨 재미로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이 억울하고 한스러워 밤새 잠을 이루지도 못하던.




어쩌다 꿈에 보는 이것이 내 내생일까!

[어쩌다 꿈에 보는/신경림]




신경림의 시는 소리의 시각화와 이미지의 청각화를 보여준다. 소리의 시각화가 놓인 길은 소리길이다. 소리길 위에서 이미지는 팽창되고 축소된다. 이미지의 판을 이룬다. 이미지의 판이 현실이며 구체성이라면, 소리의 길은 신경림 자신의 말처럼 단순성이며, 성찰성을 이루는 메시지의 길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판 위에서 소리는 끊임없이 확대되고 축소되는 이미지의 스피커 노릇을 한다. 이렇게 소리와 이미지가 잘 결합했을 경우에 그 시는 소리길 위의 그림____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의 교차를 획득한다.




신경림에게 묻는다.




☎시를 처음 쓰실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흔히 무엇인지요? 단어, 이미지, 문장, 혹은 주제, 이념 중에서?(단어∠ 이미지∠ 문장∠ ........식으로, 관심도의 순서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 이미지-주제-이념-구체적인 언어.




리얼리스트인 그에게서 ‘이미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다.

이미지는 ‘가장 현실’이다. ‘가장 구체성’이다. 거기서 얻는 시는 아주 단순한, 직접화법의 시이다. 신경림의 시든지 김수영의 시든지, 소리와 이미지가 가장 단순하게 잘 결합했을 때,간접화법의, 직접화법으로의 자연스러운 전이(轉移)가 성공하고 있다.

그러니까 좋은 시의 비결은 시쓰는 이의 소리길과 현실인 이미지와의 접합 밖에 없다. 또는 이미지가 투사하는 소리길을 잘 뚫는 수밖에 없다.

소리와 이미지가 잘 결합했을 때, 잘 꿰매졌을 때, 그 시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사유화(私有化)를 벗어나며, 사담(私談)을 벗어난다.




다시 한 번 말하자. 이미지의 팽창,증식-소리의 확대 축소____소리는 시라는 소리길들이 있는 소리판 위에서 끊임없이 축소되고 확대되는, 이미지의 스피커이다.




좋은 시에서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교차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 8, 시인세계2006 봄]



[출처 : 강은교 시인 홈페이지]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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