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시 2006. 9. 17. 19:03



은밀한 사랑 / 고재종

신의 전언(傳言)인 양 반짝이던 잎새들이
마지막 것까지 져버린 저녁이다.
이제 뜨락 가득 어둠이 내리고, 마음은
애기 업고 동구에 나간 노인네처럼 서성거린다.
이제 집이 없는 자들은 사랑밖에 없나니
먼 데서 안 오는 말씀을 기다리지 말고
잠들지 말 것, 잠들면 두 연인은 다른 꿈을 꾸지,*
말하지 말 것, 말하면 엿듣는 자가 나타나지,
보지 말 것, 빛은 어둠을 갈라 결합을 떼어놓지,
소리 나지 않는 피아노를 연주하듯
한밤중 손가락들로 더듬어 찾는 사랑만이
영혼의 탄성을 발하고, 그것만이
하나 둘, 신의 음률 속에 별로 튀긴다는군.
시방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일랑은
이제 소슬하고 차가운 인동의 광휘일 뿐,
저무는 풍광의 뱃속으로 몰래 들어가
그 속에 내연(內燃)하는 잉걸불을 일굴 것.

*8~9행은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에서 전용


출처 : 정자나무 그늘 아래 원문보기 글쓴이 : 바람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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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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