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시 2006. 9. 15. 14:34

이팝나무 수난사 / 정양주

중고 가전제품 창고 세워 플러그 질질 끄는 냉장고 속에 텔레비전 집어넣고 세탁기 속에 의자 돌리고 에어컨 눕혀놓고 컴퓨터 태우고 그 위에 목 떨어진 선풍기 올리고 하여간에 중환자실 들어갈 짓만 골라서 하더니 그만 숨이 꼴깍 넘어갔는지 온갖 녹물 흐르게 두다가, 어느 날 철근 한 트럭과 싹 바꿔치기 하여 짱짱한 창살을 촘촘히 짜 칸마다 개들을 가둬두는 것이여.

철근을 물어뜯고 우는 놈, 바스락대는 소리도 없는데 미친 듯이 짖는 놈, 핏발 선 눈으로 똥 오줌 질질거리며 먹는 놈, 그 중에 꼬리 홰홰 돌리며 눈 맞추려는 놈도 있더니, 몇날 며칠 굶어 개들 눈에 핏기도 가시고 목도 잠기고 아이들 폭죽 소리에도 드러누운 겨울, 개집채 실어 가버리데.

강아지풀 날아와 한철 잘 흔들리고 흰민들레 토실하게 꽃 피워 씨 날리고 개망초도 따라 건중거리다 모가지 꺾인 것 한참 지나, 이번에는 중장비 폐기장인가 크고 작은 포크레인 땅에 머리박고 일어날 줄 모르고 지게차는 바퀴가 펑크 나서 주저앉고 롤러는 제 몸뚱이 하나 굴리지 못하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나.

창고도 중장비도 말끔히 치워지더니 바로 앞까지 이차선 포장도로가 뻥 뚫렸어. 이제야 예전처럼 당산나무 구실을 하게 된 거지. 그래봤자 차 세워 두고 그 속에서 잠자는 사람뿐이지만. 가끔 근처 학교 선생 눈 피해 나온 아이들이 담배 피우고 내 몸에 지져 끄는 것도 뭐 괜찮지. 늙어 감각 떨어지는데 살짝 놀래기라도 해야 봄이면 머리 가득 쌀밥 채울 것 아니겠어.

-[문학들 ]5호(2006년 가을)에 실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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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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