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니어링을 그리며
도종환
모란꽃도 천천히 몸을 닫는 저녁입니다
같은 소리로 우는 새들이 서로 부르며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걸 보며 도끼질을 멈춥니다
숲도 오늘은 여기쯤에서
마지막 향기를 거두어들이는 시간엔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어제 심은 강낭콩과 감자에게도
다람쥐와 고라니에게도 편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흩어진 장작을 추녀 밑에 가지런히 쌓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주류사회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난 뒤
버몬트 숲속으로 들어갈 때는
진보에 대한 희망도 길도 잃었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그 대신 거대한 광기와 파괴와 황폐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마를 씻고
바위 위에 앉아 생각해보니
당신처럼 오늘 하루 노동하고 읽고 쓰고
자연과 사람의 좋은 만남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무토막과 잔가지들을
차곡차곡 쌓듯 내 삶도 이제는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가 잡힐 것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그리고 간소하게 저녁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둠이 숲과 계곡을 덮어오자
땅 위에 있는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별을 향해
손을 모읍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가족이며
크고 완전하고 넓은 우주의 품에 들어
넉넉하고 평온해지기를 소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 밤은 아직 구름에 가린 별들이 많고
내 마음에도 밤안개 다 걷히지 않았지만
점차 간결한 삶의 단순성에 익숙해지고
일관성을 잃지 않으며
내 눈동자가 우주의 빛을 되찾으면
별들이 이 골짜기에 가득가득 몰려올 것임을 믿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것들 중에
빠져나갈 것은 빠져나가고
제자리로 돌아올 것은 돌아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얼굴도 웃음도 제 본래 모습을 되찾고
의로움도 선함도 몸속에서 원융하여
당신처럼 균형잡힌 인격이 되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여름산도 가을숲도 다 기뻐할 것입니다
생의 후반에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생사의 바다를 건넌 곳에서도 편안하시길 빕니다
숲속에서도 별밭에서도 늘
완성을 향해 가고 있을 당신을 그리며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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