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6. 9. 11. 14:54

시 쓸 때 알아둘 일 / 이상인 / ‘문학들 다음카페’에서 가져옴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 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을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노트> [시안] 2002년 봄 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 만하다.



<추기> 다음은 <시안)2003년 봄호에 실린 박남희의 신인상 예심평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심사과정에서 제외된 작품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결점을 안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1)알맹이는 없이 장식적인 어구를 구사하고 있는 경우

2)미처 객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감상성이나 관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경우

3)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빤한, 평면적인 상상력에 기대고 있는 경우

4)치기 어린 사랑시에서 못 벗어나 있는 경우

5)너무 낯익고 관습적인 묘사나 비유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

6)시와 산문의 차이점을 모르고 평면적인 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경우

7)<-하노라> <-구나> <-어라>등과 같이 의고체나 감탄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경우, 등인데

8)개중에는 앞부분의 몇 작품은 괜찮은데, 중 후반부의 작품들이 편차가 너무 심해서 제외된 경우도 있다.



<추기) <현대시> 2002년 5월호에 실린 오세영시인의 다음 말에도 귀를 기울이자


첫째는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시는 무의미다, 유희다, 그런 입장과 변별되지요. 시는 일단 진지하게 쓰는 거라는 것이 나의 첫째 원칙이예요. 둘째는 시의 원리는 건강성이라고 보는 거죠. 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기여해야지, 인간의 존재를 해체하고 감수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건강한 정서는 시의 아름다운 덕목 아닐까요? 셋째는 아름다운 것을 쓴다는 입장이예요. 아름다운 것만 가지고 써도 다 못 쓰잖아요. 굳이 혐오스럽고 추한 것까지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문제고요. 마지막으로 넷째 원칙이 있다면 쉽게 써야 한다고 봐요.


....독선적으로 문학이 아닌 하나의 이념을 고수한다든지, 시류에 속박되어 버린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가령 한바탕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지나갈 때도 그러했지만, 요즘도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앞선 시인의 아류적 모방이거나 시류적 타협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맹목적으로 시적인 기류에 섞여드는 것은, 창조적 상상력을 오히려 구속하고 억압하는 획일화의 한 예가 될 수 있지요.(... 획일화된 사유는 안됩니다.)



<추기>평론가 박재열은 <포에지>2001년 겨울호에서 멜로우 포에츄리의 예로서 다음 몇 가지를 들었다.


1)잠언이나 금언 경구 같은 것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

* 시인 황동규는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아포리즘으로서 유머와 슬픔의 반경 안에 들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정록의 "슬픔"의 전문인, '열매보다 꽃이 무거운 생이 있다'를 들어 보이면서 '그러나 이 멋진 아포리즘은 시의 근원인 노래에서 멀어지기 쉽다'고 지적한다.

2)대상 자체의 물질성이나 즉물성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 자신이 즐겨쓰는 시어에 의탁하여 통속적인 정서를 불러내는 것

3)이미 여러 시에서 도식화해 놓은 등장인물, 주제, 시적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

4)도식적으로 소재를 인식하는 것, (양식화한 자연관, 이분법적 사고와 고식적인 태도를 포함한다)



<추기>

.......그(윤동주)는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 하지를 않았다.....


위와 같이,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2년 후배인 정병욱씨가 1976년 <나라사랑> 23호에 발표했던 회고담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강인한 시인은 "시의 어법이 결국은 합리적, 보편적 상식과 바른 문장 표현으로부터 출발한다" 는 점을 강조했다.(현대시 2002년 7월호)



<추기> 시인 송수권은 자선시집 <여승>에 실은 배한봉 시인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시는 사유재산이고 비밀재산이에요. 그런데 대중을 상대로 유통언어를 얼마나 많이 뿌리는가요? 그런 시를 나는 '뽕짝조' 타령이라고 부르거든요. 그것이 카페정서지 민족정서라곤 볼 수 없어요. 대학 강단에선 언급도 안되는 시들이 바깥 세상을 얼마나 오염시키는가요. 베스트셀러 시집들의 속성이 그렇잖아요. 말초적 감각을 흔드는..., 그래서 잘 팔리는 시인들이 따로 있지요. 이런 현상은 저널리즘이 문제입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시를 보는 눈이 천박한 독자 수준을 넘지 못해요. 문창과 신입생들에게서 이 유통언어를 걷어내는 데 1년이 넘게 걸려요. 또 사회교육원 시 전문반만 해도 뽕짝조에 물들어 자기 사적인 비밀언어를 무덤 쓰고 살아요. 시가 기본수준도 안되는 원인이 이 때문인 줄 모르니 여고생 때 썼던 시를 평생 쓰고 있는 우스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추기> 시인 유용주의 다음 "고백"을 들어보자


.....참 부드럽고 아늑하고 겉보기에 풍성한 곳을 많이도 찾아 다녔다네. 사근사근 혓바닥에 구르는 당의정처럼 독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연애시의 마을, 자기가 쓰고도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른 해독 불가능한 난해시의 패거리, 요설과 장광설 하나로 포스트모던의 적자임을 강조하는 외국 입양을 못해 안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임, 엄살과 광기로 얼룩진 반장들 동네, 공식을 만들어 놓고 언어를 조립하는 조립식 건축업자들의 단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도사풍의 시, 끊임없이 남의 시를 조금씩 베끼는 쥐새끼들의 시, 주제만 너무 주장하다가 그 주장에 치어 저도 감당하지 못할 말을 주저리주저리 동어반복하는 사람들까지 수없는 마을과 동네를 기웃거렸다네.

한때는 그 사람들과 들고나면서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 배면에 깔려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 모시고 섬기는 일에 너무 인색해. 모두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지금 말한 내 말도 내가 그런 과정을 거쳐 오면서 부화뇌동했다는 고백을 하기 위함일세.

-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



<추기>오늘의 우리 시를 읽는 대중들은 김소월을 뛰어넘지 못하는 소박한 수준임에 비추어 정지용 이상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의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시들을 한두 편 예로 들면 대체로 이런 부류의 시들이다.


①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 뛰어든 / 나는 / 소금인형처럼 / 흔적도 없이 / 녹아 버렸네


② 그대를 만나던 날 /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 따뜻한 배려가 있어 /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 오래 사귄 친구처럼 /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①은 류시화의 '소금인형' ②는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시들이다. 그래도 류시화의 경우는 깊이 있는 명상을 동반하는 시이므로 나은 편이지만 용혜원의 경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을 겨냥한 얄팍한 감상주의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것을 한 꺼풀 벗기면 에로틱한 연애편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글에선가 이승하 시인이 지적했듯이 류시화의 시는 이 땅의 현실이 완전히 제거된 신비주의적 명상 내지는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고, 목사 시인인 용혜원의 시는 소녀적인 감상을 포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둘 다 상업적인 전략의 차원에서 쓰여진 시라 할 것이다


- 강인한 '시와 시인, 독자와 시의 거리'―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중에서


<추기> 시는 언어예술이기에 시인은 말을 잘 부릴줄 알아야 한다. 또한 시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이른바 진정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참신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시와는 다른 목소리와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런 것들이 또다른 시와의 변별성이며 개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의 모험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얻어지는 것이 시의 독창성이며, 시의 진실이며, 시의 감동이며, 시의 진정한 모습으로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다.

- 제13회 <시와 사람> 신인상 심사평 중에서



<추기>...딸의 신발이 작다고 신발을 벗기고 발가락을 자르는 아버지, 내 몸을 둘둘 말아 접시에 올려놓았더니 나를 집어 먹으려는 어머니, 몸이 기우뚱거리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자신을 쾅쾅 박아달라는 딸..., 그러나 여성시에 관한 한 이런 진술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조말선의 시에는 박서원의 자기 신체 훼손, 노혜경의 카니발리즘, 김언희의 도발적 상상력 등 선배 여성시인들의 언어가 큰 변주 없이 한 집에 모여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의 낡음이 사유의 낡음과 무관하지 않다면, 언어의 답습은 적지 않은 결함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한국시에 관한 한, 서정적 경향의 시라고 분류되는 것에는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한다. 대체로 자연친화적이고, 복고적이며, 전근대적 삶에 향수를 느끼고 있고, 세계의 불화나 갈등 보다 화해나 조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안이한 감상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단에서 여전히 주류를 점하고 있는 이러한 시들의 생산은, 정치적 현실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던 제도권 문학의 탓도 있지만, 최근 생태주의적 인식의 대두에 고무되어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다...안이한 서정시일수록 세계의 복잡다단함과 폭력성을 직시하기보다는 대상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사고에 기울어지는 추세가 있다. 그를 위해 순진무구한 자아를 설정하거나, 세계와의 합일이 가능한 시대나 지역이라고 생각되는 전근대 또는 문명화되지 않은 영역이 등장하는 경향이 한국 서정시에 빈번하다.

- 정문순 (다층 2002년 겨울호 '2002년 시를 점검한다' 중에서)



<추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도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 신경림, 시집<뿔>에 실은 '시인이라 무엇인가' 중에서



<추기> 다음은 시의 문장에 관한 이희중의 글이다.


시에 쓰이는 문장이 모두 통사적으로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까다롭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래야 한다도 대답할 수밖에 없다.일상의 말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명하게도 시가 요구하는 통사적 완성은 표현을 제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요청된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표현할 통사구조를 구하지 못했을 때, 또는 정확한 전달을 원하지 않을 때, 통사적 완성을 포기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은 이를테면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도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할 때도 생기므로.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3,4월호에 실린 평론가 이재복의 글이다.


요즘 젊은 신인들의 가증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시어의 요설과 사설이다. 언어를 응축하고 갈고 닦아 가려서 조금씩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생각들을 가감없이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린지 오래다. 시적 환경의 변화가 그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고 파편화 되어가는 시대에는 오히려 이런 식의 어법이 더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시어의 요설과 사설로 인해 고전적인 시의 양식이 가지는 응축과 균형의 묘미를 잃어감으로써 운문의 참맛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추기> 다음은 산문집 <멀리 보이는 마을>에 있는 최하림의 말이다.


명사나 동사, 형용사만을 중시하지 말아라. 현 편의 시에서는 토씨도 명사나 동사 이상으로 율조에 큰 역할을 하며 울림에 크게 기여한다.


<추기> 다음은 평론가 이형권이 쓴 김선태시 <동백숲에 길을 묻다>의 리뷰에서 발췌했다. 따라서 인용된 시는 모두 같은 책에 실린 김선태의 시이다.


1)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남도의 봄 연애사태여, 그리하여 나도 대지 위에 벌렁 누워 뒹굴고 싶은 아흐, 더는 참을 수 없는 봄의 오르가슴이여 ("봄의 오르가슴' 부분)


사실 감탄사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그 영향권 내에 있는 시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감탄사는 명징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거나 지적인 인식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발되는 수준이 아니라면 감탄사는 낭만적 감정이나 서정적 영감을 드러내는 데 여간 유요한 게 아니다. 이 시에서 사용된 감탄사 '오호라'와 '아흐'는 시상을 고양하여 여운은 길게 늘어뜨리는 데 긴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딱따구리 소리 또 한 번 딱따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울음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소리" 부분)


'딱'은 의성어이자 의태어이다. 새가 내는 소리의 한 부분으로 들을 때는 의성어이지만,아귀가 잘 드러맞는다는 뜻으로는 의태어 구실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상징어로서 '숲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인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물소리'등이 '하나'로 조화된 국면을 형상화하는 데 적잖은 효과를 발휘한다.


3)마음은, 지금, 어느, 남쪽, 섬, 기슭, / 한, 마리, 갯고동, 처럼, 엎으러져, 있어라("마음의 거처" 전문)


불과 12단어(혹은 어절)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쉼표가 11개나 사용되었다. 이 쉼표들은 시의 중심 매타포인 '갯고동'의 생리를 적실히 드러내는 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쉼표가 일반적인 용법에서 벗어나 시상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3년 5,6월호에 실린 정한용의 글 중 부분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힘차게 빨아들이던 희망/ 돌밭에 뿌리 드러내고 아침처럼 서 있는 나무/텅빈 허공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헛된 뿌리/ 날선 빛들로부터 얻은 굳은 상처/'

(시의) 각 시행이 거의 전편에 걸쳐 수식어구와 피수식어로 이루어져 있어 답답하다. 이런 수식은 시인이 대상을 묘사하면서 자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데에서 오는 오류이다. 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상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감상폭을 옥죄는 감옥이 된다.


<추기> 다음은 [시와 사람] 2003년 여름호에 실린 신인작품심사평의 일부이다.


이상하게도 비슷비슷한 시들이 많다. 곁보기에는 매끈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알멩이가 없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대학안팎의 각종 시창작강의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쓸것인가는 배워서 아는데 무엇을 쓸것인가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에 대들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요컨데 억지로 만든 시에 삶의 무게가 실릴 턱이 없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7,8월호에 실린 이승훈시인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시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관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심낱말을 반복하고 혹은 변주하는, 그러니까 결국은 동어반복의 세계이다. 최근의 우리의 시가 재미없는 것은 이런 미학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안하고 무슨 말들만 많이 하면 시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승훈 시인은 이 글에서 '낱말을 반복하라', '구와 절을 반복하라', '문장과 연을 반복하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추기> 다음 두 글은 [시안]2003년 가을호에 실린 신인상 심사평이다.


세련된 언어감각은 정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유나 감정이나 관찰이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지 않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는 허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는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시에서 인정되는 애매모호함이란 것도 실은 단순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의미나 느낌의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세공하고 조탁하려는 큰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는 곧 사유와 인식의 정확함을 높이는 노력이 될 것이다.(이남호)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창조행위다....따라서 시를 구성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한번은 써먹었음직한 상식적 언술의 사용은 피하는 것이 좋다.

작품중에는 산문체시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유행처럼 관례화되어 시의 긴장감과 응축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행 구분을 하지 않고 산문시 스타일로 이어가는 것은 병폐라 아니할 수 없다.

....형식의 절제가 필요하다. 긴 시행은 반으로 줄이고 시행의 수도 삼분의 이로 줄여보라. 시는 서정이지 서사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시상의 포인트를 중심으로 잔가지를 쳐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있었다>라든가 <-했네>등의 과거형 어사를 남발하는 것도 시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이숭원)



<추기> 다음은 월간 [현대시] 2003. 10월호에 실린 이은봉 시인의 말이다. 시인은 프로시인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지만, 구태여 프로시인에게만 한정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프로시인은 절제된 가운데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시를 쓰려면 무엇보다 시인이 저 자신의 고유한 언술방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읽어도 누구의 작품인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가령 신경림 시인이나 고은 시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posted by 추월산
:
멀리 보기 2006. 9. 11. 10:54
[연극]오월의 신부 / 김성중

황지우 원작. 오성환 연출. 극단 푸른 연극 마을
때 : 2003년 5월 17-18 16:00, 19:00 4회 공연
곳 :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

오늘은 광주민중항쟁 23주년 기념일이다. 5.18이 국가기념일이 되고, 망월동에서 기념식을 하고,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고, 텔레비전이 전국으로 생방송을 하고, 너무나도 변했다. 폭도로 몰린 지 23년이 지난 지금, 겉으로는 광주의 명예가 회복된 것 같아 보이지만, 아직도 광주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럴까?

전남대사대부고 2학년 학생들이 [오월의 신부]라는 연극을 단체로 관람했다. 이들 중에는 연극을 처음 보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연극을 보여줄 생각을 한 문학담당 박안수 선생님의 그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교사가 음악회에, 미술교사가 미술 전시회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듯이, 문학교사가 연극공연장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다니는 모습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전대사대부고의 박안수 선생님 너무 멋지다. 나는 박안수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연극을 보러가는 입장이 되었고,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지 못했는데, 공연장에 와서야 비로소 4회에 걸쳐서 나누어 관람을 한다고 들었다. 나의 무관심에 스스로 화가 나기도 하고, 박안수 선생님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의 뻔뻔함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처럼만에 연극을 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극을 외면했었다. 80년대에는 마당극 형식의 연극을 자주 보았는데, 90년대에 들어와서 연극을 본 기억이 없다. 나는 연극을 말할 자격도 없는 놈이다. 연극교사모임에서 주최한 연수에 참가했던 게 1999년 1월초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연극반을 만들어서 지도해볼까도 생각을 했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연극을 잊어버렸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고등학교 교사의 무지함이여! 애처로움이여!

무대에 불이 들어오면서 미친 허인호와 장요한 신부가 등장한다. 허인호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사다리를 올라가고, 장요한 신부는 허인호가 장요한신부 자신의 순교의 기회를 빼앗았고, 허인호가 성인이 되었다며 갑옷 같은 자신의 사제복을 잡으며, 자괴감이 들어있는 목소리로 절규한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 들불야학의 학생과 교사. 들불야학의 강학 김현식과 오민정 그리고 강혁. 들불야학의 학생 김혜숙과 그 친구들. 계엄군이 광주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혜숙이 죽어가고 자발적으로 시민군이 조직되고, 해방광주의 소식을 들불야학은 투사회보로 전하며 해방광주는 모두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된다. 그것도 잠시 무기를 회수하라는 계엄군의 최후통첩과 함께 도청으로 계엄군이 진격해온다는 다급한 소식이 전해지고 시민군들은 불안에 떤다. 서로가 복면을 벗고 본명과 나이를 밝히면서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가 되며 최후의 만찬으로 삽립빵을 하나씩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최후의 유언을 남기면서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강혁과 함께 떠났던 오민정이 도청으로 들어오고 김현식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둘은 포옹하며 시간이 없음을 절규한다. 이때 시민군들이 면사포를 준비해서 들어오며 두 사람의 결혼식이 시작된다. 장요한 신부의 주례로 말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오민정이 도청을 떠나고 잠시 후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민군들은 모두 죽는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다리를 저는 허민호는 미쳐버렸고 허민호에게 떠밀려 빠져나온 장요한 신부는 끝없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갑옷 같은 사제복에 갇혀버린 불쌍한 자신을 저주하는 장요한 신부,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지 23년이 지난 뒤에도 동지들이 잠시 잠을 자고 있다고 믿고 있는 미친 허인호. 무대에 불이 환히 밝혀지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배우들이 인사한다. 힘차게 박수를 친다. 그리고 극장을 빠져 나온다.

오월의 신부. 장요한 신부와 오민정.

시를 읊고 있는 배우들이 낯설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극이라는 형식이 낯설지도 모른다. 원작을 읽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빛의 면사포를 쓰고
새벽 창가에 서 있던 오월의 신부여!
우리, 눈부신 광주의 누이여!
저 바람재 푸른 새벽바람을 간직한 붉은 화관,
그대 이마에 얹지노니
먼 훗날 바람 불어 바람꽃 피면
남쪽으로 뻗은 비단길, 금남로에 뿌린 우리의 피,
부글부글 끓는 그 피, 바람꽃 되면,
우리가 눈뜨고 맞은 이 새벽의 피 묻은 말들, 전하라.
하여, 우리가 이 새벽에 쏟아낸 피,
불꽃 되고 빛 되시라!
그리하여 먼 훗날 넋 나간 이 역사,
믿을 수 없는 역사가 멍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혹시 아는가?
문득 눈에 띄는 이 새벽의 이름들,
불멸의 광채로 깜박거리고 있을지를.
-배우들이 읊은 시의 일부분-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프고 저려오는 5.18 광주민중항쟁, 정부에서 부르는 5.18민주화운동. 23년이 지난 지금도 진실은커녕 폭도들의 난동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분명히 있다. 그렇게 믿고 싶고 믿어야 안심이 되는 세력이 있다. 슬프다. 5.18을 광주의 학생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다른 지역 학생들은 말해서 무엇하랴. 교사들의 책임이 클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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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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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사진으로 세상보기 2006. 9. 11. 10:53
얼어버린 파초의 꿈

넓직한 잎을 자랑하던 파초가 영하의 날씨에 얼어버렸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이파리와 줄기가 얼어서 시들어버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파리를 힘차게 내밀던 파초였는데, 영하의 겨울은 파초에게 너무 가혹하다. 새로 올라온 파초의 여린 줄기도 얼어버렸다. 한 번 만져 보니까 물이 흥건하게 흐른다. 파초는 진정 남국이 그리울 것이다.

파초는 여러해살이 풀인데, 줄기가 얼어버렸는데 뿌리는 얼지 않았을지 몰라. 늘씬한 키를 자랑하며 새파랗던 너의 잎은 이제 시들어서 축 처져 있구나. 미리 겨우살이 준비를 하지 않은 우리들의 잘못을 파초야, 용서하렴. 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우리들이 아니냐?

한겨울의 추위를 너는 몰랐을 것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오래 꽃을 피우길 기대했는데, 초라하게 시들어버린 너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럽구나. 겨울을 모르는 너를 화단에 심어놓고 여름내 네 푸른 잎을 좋아했으면서도 정작 네가 시들어서야, 네가 추위를 못 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구나. 오, 나의 무지여. 나의 게으름이여.

내년 봄에 다시 너의 고운 얼굴을 보고 싶은데, 네가 기다리는 나에게 너의 얼굴을 보여줄른지 나는 모르겠구나.

바나나를 닮은 너의 모습. 바나나 비슷한 열매를 맺는다는 너를 보고 싶구나. 너를 너무 몰라서 미안해. 김동명 시인의 '파초'나 수와진이 부른 '파초의 꿈을 아오'에서나 듣던 너의 이름, 오늘 나는 너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한없는 자책을 하는구나. 알량한 나의 지식에 기대어 세상을 희롱하는 것은 아닌지, 인간의 지식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남국을 향한 파초의 꿈. 남극대륙 세종기지에서 대원들을 구하고 얼어죽은 전재규 대원이 떠오른다.

감성이 말라버린 오늘의 나를 반성해야 한다. 책 속에 파묻혀 죽은 지식이나 먹어치우는 하이에나가 되서는 안 된다. 교실수업을 잘 하기 위해서 너는 어떻게 했는가? 단순히 월급을 타먹는 월급도둑놈은 아닌지?

시들어버린 가련한 파초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본다.
2003년 12월 16일 교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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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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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6. 9. 11. 10:51
오월의 노래


사랑의 추억 - 박인희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피 /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뿐 너의 젖가슴 /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피 솟네~~.

이 노래는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전선에서 빠질 수 없는 불후의 명곡이었다. 움츠린 대중의 가슴을 열어제치고 대오를 함께 하며 진압경찰들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며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들이다. 특히 "오월의 노래"는 80년 5월 학살의 리얼리티를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가사의 선명함이 너무나 '민중적'이어서 함부로(?) 따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이 노래가 80년 5월 이후 이런저런 시위 현장에서 급속히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아마도 가사가 담고 있는 명료한 의미와 쉬운 멜로디 탓 이었을 것이다. 민중가수 정세현(범능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82년 여름에 이 노래를 처음 들었고,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히 대중 속으로 퍼져 나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선된 가사와 쉽고도 선동적인 멜로디는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당시에 이 노래의 출처를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80년대 중반이었을까? 오창규 당시 광주 MBC PD가 자신의 프로에서 5월 18일을 맞아 이 노래의 원곡을 들려주며 우회적으로 <오월의 노래>를 상기시키던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 오월 그 날을 맞아 방송을 통해 <오월의 노래> 원곡을 들으며 떨리는 가슴을 짓누르던 기억과 함께 뛰어난 선곡 능력을 가진 음악가가 대체 누굴까 적이 궁금해 했었다.알려진 대로 <오월의 노래> 원곡은 'Holiday'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샹송가수 Michel Polnareff의 'Qui A Tue Grand Maman'라는 노래였다. 제목이 <어느 할머니의 죽음>이라 번역되어 소개되던 그 노래는 샹송 특유의 뛰어난 서정성 때문에 당시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오월의 상흔을 <오월의 노래>와는 또 다른 의미로 흔들어 놓곤 했다.그러나, 우리가 아는 거센 행진곡풍의 <오월의 노래>와 뽈나레프의 서정성 짙은 그 노래는 분위기나 흐름으로 보아 상당히 편차가 있어 아마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름 모를 뮤지션이 당시 우리 곁에 몰래 '암약'하고 있나 보다고 최근까지도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작사자는 물론 편곡자가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이기 때문이다.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묵은 의문에 조그만 답을 주는 노래를 최근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목마와 숙녀>, <끝이 없는 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인희가 1975년 6월에 뽈나레프의 그 노래를 <사랑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개사 편곡해 부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상수리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아서/그대가 불러주던 고운 노래에 귀 기울인다/이제는 다시 돌아올 길 없는/사랑의 추억이어라…". 가사며 제목도 그렇고, 곡 전체의 분위기는 뽈나레프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은 우리가 익히 알고 목이 터져라 부르던 <오월의 노래> 바로 그것에 가까운 노래였다. 가사만 바꾼, 이름하여 '노가바'의 원조격이 바로 그 노래인 셈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학살의 피냄새가 채 가시지 않는 금남로 거리를 고통 속에 거닐며 가사를 생각해냈고, 자신이 알고 있던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을 다듬어 한국(민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뽈나레프-박인희-익명의 편곡자'로 이어지는 한 노래의 변천과정은 원 가사의 내용과 작 편곡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로 수미상관하면서 노래의 위대한 힘을 국경과 시간을 넘어 보여준 셈이다. 이제는 다시 그런 노래를 탄생시켜서는 안된다는 다짐과 함께 박인희 버전의 가사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위로하고 아껴주는" 따뜻한 인간들의 세상이 오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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