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사진으로 세상보기
2006. 9. 11. 10:46
더위 떨치기
김성중
뜨겁다. 에어컨을 틀어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다.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학원 수업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다. 자료를 찾아서 이 곳 저 곳을 일개미처럼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학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느낀다.
식구들은 대학원 수업이 언제 끝나느냐고 아우성이다. 남들은 다 피서를 떠나는데 성냥곽 같은 아파트에서 선풍기나 돌리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다. 아내는 아예 포기한 것 같다. 물론 종강이 된다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공부한답시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아빠나 남편을 식구들은 이해하는 눈치다.
주말에 담양 관방천이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관방천을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시원해진다. 내 어린시절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관방제림의 시원한 그늘이 눈에 선하다.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들은 수령이 200년이 넘었다. 그 나무 숲에서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던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꼬맹이들에게는 자장가였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은 관사포에 몸을 던졌고 입술이 파래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쯤 물에서 나와 햇볕을 쐬곤 했다. 그 시절에 우리들의 피서지는 미역을 감는 곳이었다. 양각산이나 수바래도 빼놓을 수 없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산강 상류인 관방천의 품에서 나의 꿈은 영글어 갔다.
더위가 하도 기승을 부리니까 나는 자꾸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담양군 용면 쌍태리 세칭 물통골이다. 물통골 약수는 물맛이 하도 좋아서 광주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내 고향마을은 전라북도 순창 복흥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담양군내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늘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별장을 짓거나 아예 살러 들어오는 곳이란다.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난 내게 쌍태리는 아련한 추억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에 ‘산불’이라는 영화를 고향 마을에서 촬영했다.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을 때 나와 동생은 외가집 감나무 뒤에서 숨어서 두려움에 떨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른들 말에서 도금봉이나 신성일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들었고, 신성일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마을 앞 냇물에 뛰어드는 장면이 기억난다.
우리 꼬맹이들은 당산나무 아래 냇물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놀았다. 신나게 헤엄을 쳤던 곳에는 ‘영화 산불 촬영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동네 위쪽에 저수지를 막은 뒤부터 냇물이 보타버렸다. 어린 시절 헤엄치던 곳은 너무나도 작아져 있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을까? 세월은 이렇게 강산을 변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세월이 무섭게 흘렀음을 실감한다. 문득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초소가 생기고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 떠오른다. 군용트럭을 타고 면소재지까지 갔던 일이며 잠자리비행기를 보았던 일이 꼭 어제일 같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외삼촌의 죽음을 느낄 나이가 아니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했던 그해,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간첩이 나타났던 그해에 우리 마을에도 무장공비가 나타나 내 외삼촌을 살해한 것이다. 마을 뒷산에 갔다가 공비들에게 허리띠로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하고 암매장이 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나 외숙모님의 슬픔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외삼촌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그 무렵 나는 두 번의 죽음을 더 보았다. 내 사촌 형님이 갑자기 죽었다. 새벽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나는 형이 죽었고 그냥 길가에 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나이였다. 내 친구 중기는 앞을 못 보는 봉사였다. 그 아이는 다리가 새다리인데 머리만 컸다. 우리들은 그런 중기를 가분수라고 불렀다. 우리 집 바로 아래 살던 중기는 하루 종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도리도리만 했다. 나는 중기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중기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중기는 도리도리만 할 뿐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중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만을 내게 들려주었다. 이런 중기가 죽었다. 나는 친구가 보이지 않아서 그가 먼 세상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덥다고 아우성이다. 광주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 열섬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구보다도 더 더운 도시가 광주라고 한다. 대구는 오래전부터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었는데 광주는 녹지공간을 택지로 개발하면서 나무를 베어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제 아스팔트 바로 위의 온도를 측정하니까 40도를 웃돌았다고 한다. 나무를 심어야 한다. 도심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복사열을 흡수할 녹지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까 사람들은 더위를 먹는 것이다.
더우면 나무그늘을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에게는 언제라도 달려갈 관방천이 있다. 내 유년의 꿈이 묻어있는 관방천은 언제나 싱그럽다. ‘관방천 품안에 포근히 안겨 옥녀봉 바라보는 담양남학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가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이여,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열 받고 더위 먹었을 때 내 고향 담양의 관방천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른지.
2005.8.5.
김성중
뜨겁다. 에어컨을 틀어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다.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학원 수업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다. 자료를 찾아서 이 곳 저 곳을 일개미처럼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학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느낀다.
식구들은 대학원 수업이 언제 끝나느냐고 아우성이다. 남들은 다 피서를 떠나는데 성냥곽 같은 아파트에서 선풍기나 돌리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다. 아내는 아예 포기한 것 같다. 물론 종강이 된다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공부한답시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아빠나 남편을 식구들은 이해하는 눈치다.
주말에 담양 관방천이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관방천을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시원해진다. 내 어린시절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관방제림의 시원한 그늘이 눈에 선하다.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들은 수령이 200년이 넘었다. 그 나무 숲에서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던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꼬맹이들에게는 자장가였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은 관사포에 몸을 던졌고 입술이 파래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쯤 물에서 나와 햇볕을 쐬곤 했다. 그 시절에 우리들의 피서지는 미역을 감는 곳이었다. 양각산이나 수바래도 빼놓을 수 없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산강 상류인 관방천의 품에서 나의 꿈은 영글어 갔다.
더위가 하도 기승을 부리니까 나는 자꾸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담양군 용면 쌍태리 세칭 물통골이다. 물통골 약수는 물맛이 하도 좋아서 광주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내 고향마을은 전라북도 순창 복흥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담양군내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늘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별장을 짓거나 아예 살러 들어오는 곳이란다.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난 내게 쌍태리는 아련한 추억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에 ‘산불’이라는 영화를 고향 마을에서 촬영했다.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을 때 나와 동생은 외가집 감나무 뒤에서 숨어서 두려움에 떨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른들 말에서 도금봉이나 신성일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들었고, 신성일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마을 앞 냇물에 뛰어드는 장면이 기억난다.
우리 꼬맹이들은 당산나무 아래 냇물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놀았다. 신나게 헤엄을 쳤던 곳에는 ‘영화 산불 촬영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동네 위쪽에 저수지를 막은 뒤부터 냇물이 보타버렸다. 어린 시절 헤엄치던 곳은 너무나도 작아져 있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을까? 세월은 이렇게 강산을 변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세월이 무섭게 흘렀음을 실감한다. 문득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초소가 생기고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 떠오른다. 군용트럭을 타고 면소재지까지 갔던 일이며 잠자리비행기를 보았던 일이 꼭 어제일 같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외삼촌의 죽음을 느낄 나이가 아니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했던 그해,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간첩이 나타났던 그해에 우리 마을에도 무장공비가 나타나 내 외삼촌을 살해한 것이다. 마을 뒷산에 갔다가 공비들에게 허리띠로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하고 암매장이 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나 외숙모님의 슬픔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외삼촌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그 무렵 나는 두 번의 죽음을 더 보았다. 내 사촌 형님이 갑자기 죽었다. 새벽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나는 형이 죽었고 그냥 길가에 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나이였다. 내 친구 중기는 앞을 못 보는 봉사였다. 그 아이는 다리가 새다리인데 머리만 컸다. 우리들은 그런 중기를 가분수라고 불렀다. 우리 집 바로 아래 살던 중기는 하루 종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도리도리만 했다. 나는 중기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중기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중기는 도리도리만 할 뿐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중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만을 내게 들려주었다. 이런 중기가 죽었다. 나는 친구가 보이지 않아서 그가 먼 세상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덥다고 아우성이다. 광주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 열섬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구보다도 더 더운 도시가 광주라고 한다. 대구는 오래전부터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었는데 광주는 녹지공간을 택지로 개발하면서 나무를 베어냈으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제 아스팔트 바로 위의 온도를 측정하니까 40도를 웃돌았다고 한다. 나무를 심어야 한다. 도심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복사열을 흡수할 녹지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까 사람들은 더위를 먹는 것이다.
더우면 나무그늘을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에게는 언제라도 달려갈 관방천이 있다. 내 유년의 꿈이 묻어있는 관방천은 언제나 싱그럽다. ‘관방천 품안에 포근히 안겨 옥녀봉 바라보는 담양남학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가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이여,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열 받고 더위 먹었을 때 내 고향 담양의 관방천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른지.
200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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