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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생각
김성중
터미널은 세상의 시작이며 끝이다.
터미널에 가면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시외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시절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음박질치던 시절
대인동 시외버스 터미널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지.
그날 나는 아버지의 위장약을 사가야만 했는데
선배라며 나타난 사내와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위궤양에 좋다는 단방약 이야기를 들었지.
그 사내에게 약을 살 돈 만 원을 빌려주었어.
약속한 날 문학부 벤치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선배라던 그 사내는 오지 않았고
나는 바보 같은 나를 저주했어.
나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스무 살이었어.
오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세상 물정을 모르던 그때가
차라리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
김성중
과거는 흘러갔다고
어느 가수는 노래했지만
과거는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누군가는 과거가 흘러가버리기를 바라겠지만
과거는 그 자리에 머물러 화석이 된다.
20년을 넘기고서야 제자들을 만났다.
마흔이 넘은 노총각 결혼 피로연에서
그들의 눈은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히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불편한 과거를 잊고 싶어하지만
누군가는 그 사건을 완벽하게 기억한다.
과거는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잊고 싶은가?
숨을 쉬지 않으면 과거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 과거를 기억할 사람들은 오늘도 태어나고 있다.
과거를 잊고 싶은가?
그러면 나쁜 과거를 만들지 마라.
좋은 일만 하면 좋은 과거만 남을 것이다.
과거는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히는 것이 아니다.
풍천장어는 비싸다
풍천장어는 필리핀 동쪽 어느 깊은 바다에서 부화하여 실뱀장어의 몸으로 6000km나 되는 험난한 태평양을 헤엄쳐서 어미의 고향인 선운사 어귀 인천강(풍천)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민물장어가 산란하러 먼 바다로 떠나려고 기수역(강의 하구)에서 월동하며 적응할 때가 가장 맛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잡아먹었다. 지금은 회유하는 실뱀장어의 개체수가 급감하여 자연산 민물장어를 구경하기는 어렵다.
지난 6월 10일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선운사 지역을 다녀왔다. 미당시문학관을 들러서 서정주의 문학세계와 마을 풍광을 두루 살피고 나서 그 유명한 풍천장어를 맛보려고 신덕식당에 들어갔다. 차림표를 보니 장어구이가 1인분에 32,000원이나 한다. 5인분을 시키면 160,000원이다. 식구들은 깜짝 놀라 장어구이 3인분과 장어탕 2인분을 주문한다. 나는 장어구이를 아껴서 먹었다. 계산할 때 보니까 111,000원이 나왔다.
풍천장어가 비싼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양식을 한 장어를 바닷물에서 축양(노폐물을 뺌)하면 육질이 좋아진단다. 장어를 양식하면서 얼마나 많은 노폐물이 체내에 쌓이겠는가? 민물에서 양식한 장어를 바닷물에 풀어놓으면 장어가 바닷물에 적응하느라고 몸속의 노폐물을 다 빼낸다고 한다. 그래도 진짜 풍천장어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얼마나 많이 장어를 잡아먹었으면 씨가 말랐을까? 인간의 식욕을 만족시킬 수 없는 풍천장어여!
어렸을 때 동네 실개천에서 바위를 들치며 어른들이 배터리를 이용해 민물장어를 잡았고, 그 장어를 석쇠에 얹어 구워먹었었다. 그때 맛보았던 민물장어의 고소한 맛을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강도 오염되었고 땅도 오염되었고 세상도 온통 오염되었다. 그래서 옛날이 더 그리운지도 모른다.
모퉁이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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