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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산의 시 2017. 10. 22. 22:35
통합 게시판

[김성중 10월 토론작품] : 염포 외 11편



단오작성시간2017.10.20  조회수3

0

염포
김성중

 


적금도 비췻빛 바다 풍광에 흠뻑 취했다가
외나로도 섬의 끝자락 염포에 들렀네.

몽돌이 은빛으로 빛나며
바닷물에 몸을 적시면
먼 곳 섬들은 그저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고
철썩이는 파도소리 자장가 삼아
낮잠이나 자볼까나

고흥반도 끝난 자리
세상일 다 잊어버리고
석 달 열흘 눈이 짓무르도록
은빛 바다를 보아도 좋으리.

세상은 막 가자고 아우성인데
그저 햇살에 눈이 부시다고 할 뿐
게으르디 게으르게 겨우 눈이나 뜨면서
올 놈은 오고 갈 놈을 가라는 듯
염포 바다는 꿈을 꾸듯 엎드려 있네.




모퉁이

복판보다는 모퉁이에 서는 게 편했다.

세상의 복판에서 주목을 받기보다는

조용히 숨어서 은자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대로 살게 해주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 앞에 서는 선생이 되었고

글을 써서 이름을 알리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은 내 글쓰기 마당

씀은 매우 정교한 글쓰기 마당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스마트폰으로 글을 쓸 때가 많아졌다.

나는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집게손가락으로 두들긴다.

그러나 나는 복판보다는 모퉁이가 편하다.




남한산성

 

언젠가 성남에 갔다가 남한산성에 가려고 했는데 가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 영화를 보면서 남한산성에서 두 시간을 살았다. 삶이냐 죽음이냐의 경계에 선 자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보았다. 명분과 실리의 투쟁을 보았다. 줏대 없이 흔들리는 군주를 보았다.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았다. 민들레꽃이 피면 송파강으로 꺽지를 잡으러 갈 어린 소녀 나루가 희망이다. 대장장이 날쇠가 희망이다. 이름없이 살아간 이들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가. 남한산성은 나에게 물음투성이로 남는다.



후원금



전화가 걸려온다

굿네이버스다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후원을 중단했다고 말한다

은행에 가서 해지했다고 말한다

유니세프에서도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똑같이 얘기한다

뜨거웠던 지난 여름

후원을 중단한 단체가 여럿

이번 가을에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우물

 

우물이 있어도

사람들은 우물물을 마시지 않는다

정읍 구절초 공원 우물에서

‘마시지 마세요’ 팻말을 보았다

이제는 생수를 사서 마시거나

수돗물을 정수해서 마시거나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다 마신다

 

샘물의 변신

우물

펌프

상수도

생수공장

 

우물에 제 낯바닥을 비추는 아이도 없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산모퉁이 외딴 우물"은 보이지 않는다.

 

우물을 보며 상상력을 키우던 아이는

어디로 가버렸나

 

 

느티나무새

 

운동장가를 빠르게 걷고 있는데

새 한 마리 날갯짓도 우아하게

이 나무 저 나무 날아다니다

느티나무 가지 끝에 폴짝 앉는다

느티나무 가지는 새를 살포시 안고서

잠시 춤을 추며 출렁대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 산만 바라보고

느티나무새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다음에 날아갈 나무를 물색한다.

나는 황홀히 풍경을 구경하다

운동장가를 다시 걷기 시작한다.

 

 

걷기

 

걸어보니 알겠다

걷는 게 얼마나 좋은지

걸어보니 알겠다

걸으면서 얼마나 정신이 맑아지는지

걸어보니 알겠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걸으면서 해찰하면서 둘러보면서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면서

거북이처럼 천천히 느리게 걸으면서

 

오늘도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걷다보면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 또 걷는다

 

만보 이만보 삼만보

걷고 또 걸으면서

세상을 읽는다

 

오늘은 만보만 걷자



메모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오르는 생각을

적을 때도 있다.

 

여기 저기

적을 수 있는 것이면

어디라도 상관없이

적고 또 적는다.

 

수첩에 적고

노트에 적고

달력에 적고

명함에 적고

메모지에 적고

스마트폰에 적고

페이스북에 적고

큐메모에 적고

밴드에 적고

카페에 적고

카톡에 적고

디카로 적고

폰카로 적고

 

나는 오늘도

여기저기에

적고



적는다.




전화

 

오늘 점심을 먹고 남부대를 산책하고 나서 교무실에서 원격연수를 신청하고 있는데 모르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으니까 더케이 손해보험사라고 한다. 지난 10월 14일(토) 화순 운주사 주차장에서 난 사고가 접수되어서 전화를 한다고 한다. 나는 "범퍼가 살짝 긁혔고 차가 살짝 밀렸지만 큰 이상은 없다. 운전자가 외국인이고 낡은 차를 운전하고 있더라.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보험사 직원이 호의를 베푸는 거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10월 14일 화순 능주 소재지에서 조광조 적려유허비를 둘러보고 운주사에 들렀다. 해가 기울어지기 전에 서둘러서 기기묘묘한 탑을 둘러보고 와불을 보러 산길을 올라가는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내 차 뒷 범퍼를 들이받았다고 한다. 운전자는 외국인 남편이라고 했다. 나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고 했다. 와불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곧바로 하산했다. 보내온 사진을 보니까 크게 상한 것은 아니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갔더니 젊은 외국인이 갓 돌을 지난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 남자의 아내이거나 처형인 듯한 여자가 사고 경위를 설명했다. 나는 내 차를 살펴보았다. 내 차가 조금 밀려나 있었지만 별 이상이 없길래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서 헤어졌다. 그녀는 보험회사에 사고를 접수했다고 했다.

 

1992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해직교사였고, 엔진오일이 줄줄 새는 낡은 포니2를 엔진오일을 부으면서 운전하고 다녔다. 제1순환도로 법원 네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뒤에서 클랙슨을 빵빵 울리길래 차에서 내렸다. 뒷 차 운전자는 내 차가 뒤로 밀려서 자기 차 범퍼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수동변속기여서 내 차가 뒤로 밀렸나 보다. 그 운전자는 나의 행색이나 내 고물차를 보더니 괜찮다고 하면서 가보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도 내 처지가 서러웠다. 해직의 시절이었다.




팔영산 능가사에서

 

 

응진당 앞

미로 차밭을 벗어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차 꽃을 찍으려고 하니까

차 꽃은 부끄러워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꿀을 따는 나나니벌도

애를 먹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는 능가사에서

여덟 개의 봉우리를

세고 있었다.




일곱 시간

 

막내여동생이 추석날 친정으로 오는데 걸린 시간이다. 오후 두 시 십오 분에 부산을 출발하여 밤 아홉 시 십오 분에 도착했다. 무엇이 그녀를 이리도 험한 길로 이끌었을까? 친정에 와도 뭐 특별히 맛있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밥을 먹고 떠나려고 일곱 시간을 달려왔다. 자본주의 시대에 맞지 않는 셈법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의 정이 그리워서 왔겠지. 고향이 그리워서. 나도 10년을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서울을 오르내렸다.



바람처럼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다.

어디에 소속이 되면 내 자유가 구속된다.

바람은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줄을 서지 않았다.

나는 라인이 없다.

누구의 후광을 입은 적이 없다.

조용히 내 할 일을 해왔을 뿐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 나다운 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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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카테고리 없음 2017. 8. 13. 00:27
월간 <<시와 표현>>에 연재중인 <이 달의 시인>. 이번 달(2017/08)엔 송재학 시인론  "비애의 기원, 검은 색의 심연"입니다.

ㅡ오민석(시인)

------------------------

비애의 기원, 검은색의 심연
-송재학론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I.
지금까지 나온 송재학의 시집 아홉 권을 모두 읽었다. 첫 시집 『얼음시집』(1988)을 읽는 동안, “비애”, “눈물”, “슬픔”, “울음” 같은 단어들을 자주 만났다. 그리고 어떤 질문 하나가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났다. 그는 왜 슬퍼할까. 그는 왜 울고 있으며, 그의 ‘비애’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나는 예감했다. 이 질문은 결국 그의 문학의 기원에 대한 질문이며,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야말로 그의 시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칠흑의 머리칼 올올이 뒤쫓아
어둔 길,
땅 끝에 서면
어느 세월 어느 꿈이
엉겅퀴 쑥꽃 찔레꽃 따위
숨막히는 비애로 피어나는지, 그럴수록
눈물길 먼 길
한참이고나,
-「먼길 1-그리움」 부분

그러나 첫 시집에서 그 비애의 정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슬픔의 시니피앙만을 여기저기 던져놓을 뿐, 시니피에의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비애의 기표들을 흩뿌려놓고 기의의 추(錘)를 감추는 방법으로 ‘모호성’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가령 첫 시집의 「詩論」의 화자는 “한번의 호흡마다 치미는 아픔은 참기 어렵군요 처음 시를 쓴 것은 우울에 기대어서였지요”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시의 어디에도 그 “아픔”과 “우울”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다가 세 번째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1994)의 첫 번째 시에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슬픔의 기원을 알게 되었다. 그의 우울과 비애의 기원은 바로 ‘아버지의 부재’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날
장사를 하느라 홍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과 마주한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소래 바다는」 전문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버지를 아직도 보내지 않고 있다. 그는 소래 포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귀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아버지를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그 늙은 사람이 “젊은 여자”와 술 마시는 모습은 그대로 아버지의 서사로 바뀐다. 첫 행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라 해놓고 마지막 행에서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는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그는 처음으로 ‘비애의 정체’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다음에야 나는 우연히 그의 산문 「기억들」(『우리 시대의 시인』, 시와반시, 2002, 268~273쪽)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나를 문학의 원형인 괴로움으로 이끈 끈이 나의 가족사”라 고백하며, 위 시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를 “나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제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내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비밀이기도 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산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때 시인은 고작 중1이었다.
이렇게 그의 시의 ‘원형’을 찾고 나서 나는 다시 그의 첫 시집으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나는 그가 흩뿌린 시니피앙의 닻을 찾은 것이다. 첫 시집의 짧은 「自序」에서 그는 “이승의 불 속에 계시는 선친과 어머님, 편안하시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이 자서를 쓴 1988년을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선친”은 “이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20년 전에 이미 ‘저승’으로 떠났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으나, 그는 아버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은 ‘영원성’의 상징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가슴 속의 불이다. 그 안에 그의 아버지는 계속 살아있다. 많은 남성 시인들의 시에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로 어머니이다. 남성 시인들의 작품에서 많은 경우 아버지는 겨루기의 대상이고, 극복의 대상이며, 죽임의 대상이다. 이것이 우리가 수많은 남성 시인들의 작품들에서 읽어내는 ‘오이디푸스적’ 징후이다. 그러나 송재학 시인에게 오이디푸스는 없다. 그는 아버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와 싸우고 있다. 그는 아버지와 겨루기는커녕, 현세의 풍경에서 죽은 아버지를 살려내며 상상적이지만 “젊은 여자”를 아버지에게 제물로 바친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부재이고 결핍이며, 그 부재와 결핍이야말로 그의 고통의, 그의 문학의 진원이다. 두 번째 시집 『살레시오네 집』(1992)에서 그는 “아버지는 흘러버린 날짜의 맨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책의 첫 페이지에 서 있다 그곳의 시간은 늘 멈추어서”(「하구에서…아버지의 시간」)라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의 “책”(문학)의 “첫 페이지”이며, 아버지의 시간은 “멈추어서” 흐르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계속 살려두며, 그가 가는 모든 행선지로 호명해낸다. 아버지는 죽은 자가 아니라, 다만 “늙은 사람”일 뿐이다. 그의 시들 속에 “늙은 사람”, “늙은 나무”, “늙어버린 사람”, “늙은 소리” 등의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그의 시가 아버지와의 ‘오랜 동행(同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II.
아버지의 부재는 그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구멍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그에게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앗아간 세계는 그 자체가 혼란이며 모순어법이다. “생나무 끊임없이 쓰러지고 흐르는 물과 타오르는 불의 눈부신 땅, 제 번뇌 비추는 얼음벽도 만나는 짐승이 밟고 가는 어두운 잠속”(「침엽수림의 꿈」)은 고스란히 그가 탐구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물”과 “불”과 “얼음”이 공존하는 “어두운 잠속”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그가 대면하게 된 세계의 속살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평생 씨름해야할 ‘정신의 밀도 깊은 행성’이 태어나는데, 그것은 대체로 ‘검은색’의 외피를 입고 있다. 송재학에게 있어서 색깔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데, 특히 검은색은 초기 시집 이래 같은 제목의 최근 시집(『검은색』 2015)까지 그가 계속 대면해온 숙제 같은 색이다. 그가 만일 시의 ‘면벽 수도’ 같은 것을 하고 있다면, 그 면벽은 바로 검은색이다. 그것이 검은색인 이유는 그 출발이 죽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검은색의 속성이 모순성 그리고 규정불가능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검은빛은 죽음이 아니다, 비애가 아니다 검은빛은 환하다 때로 파도와 맞물리면서 新生의 거품을 떠밀거나 버려진 돌들을 이끌고 바다 깊이 담금질하며 주전의 검은 돌들은 더욱 맑아져 사람의 삶을 부추기고, 그때 검은빛은 심연의 입구다

검은빛을 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빛이 그로부터 비롯된다면

검은빛을 관념이라 적지는 말자 어떤 애벌레들은 마흔 날이 되면 다시 제 몸에서 애벌레를 게워낸다
-「주전」 부분

그는 애써 검은빛이 “죽음이 아니”고 비애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런 진술은 검은빛의 ‘기원’이 죽음과 비애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비애는 검은빛의 분명한 유발인자이지만, 그로 인해 그가 대면한 “세계”로서의 검은빛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성물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최근 시집 『검은색』의 프롤로그는 “어디서나 나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검은색이 있다”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렇다면 검은색은 이미 보편적(“어디서나”) 존재로서의 한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검은빛을 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모든 빛이 그로부터 비롯된다”는 위 시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위 시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인 『푸른빛과 싸우다』에 나오는데, 그때부터 그는 이미 ‘검은색’을 그의 ‘세계’로 설정해놓고 있다. 한편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검은색이라는 강도 높은 정신의 세계가 그저 ‘관념’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검은빛을 관념이라 적지는 말자”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계인 ‘검은빛’은 앞에서 내가 ‘정신의 밀도 깊은 행성’이라고 말한 것처럼 ‘관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하여 마주친 검은색의 ‘세계’는 물질적 현실이 아니라,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정신적 ‘강밀도(强密度 intensity)’의 세계이며, 그는 그것과 씨름하면서 그것의 내밀한 속살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 내밀한 속살을 읽어낼 때 다시 말해 그 안에서 “애벌레”들을 “게워”낼 때, 검은색의 관념은 신비의 아우라(Aura)를 벗고 현실로 내려올 것이다. 그는 네 번째 시집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1997)의 「自序」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따라갔던 애매성의 공간에 명쾌함을 부여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서투른 노래는 그 공간에 더욱 사로잡힐 뿐이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가 여기서 말하는 “애매성”이란 바로 ‘검은 세계’의 관념성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는 이 자서를 통해 (매우 겸손하게) 그것과 싸우고 있는 자신 그리고 그 싸움에서 오는 피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자서와는 전혀 다르게 나는 이 네 번째 시집부터 관념의 검은색에서 구체성의 애벌레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기어 나옴을 본다. 그의 고백과 다르게 이 구체성의 애벌레들 때문에 앞의 세 시집보다 네 번째 시집은 훨씬 잘 읽힌다. 말하자면 애매성과의 싸움에서 그는 일정 정도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애월 길은 미끈거리는 食道
검은색의 비애에 사로잡힌 건 내 소용돌이다
칼날이 된 바다가 옆구리에 박힌다
천천히 서 있는 전신주들,
느낌표처럼,
터질 듯 부푼 어떤 생의 입구마다 꽂혀 있다
애월 바다는 파랑 주의보에 익숙했으리
검은색 따라간 며칠 새
몇 개의 부음을 받았다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애월 바다까지-제주시편 2」 부분

그는 여전히 “검은색의 비애”와 씨름하고 있지만, “미끈거리는 食道”, “칼날이 된 바다”, “터질 듯 부푼 어떤 생” 같은 감각적 표현들은 검은색의 관념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애벌레들 같다. “부음”을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로 묘사한 대목은 ‘물질화된’ 죽음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처럼 불안과 죽음을 ‘풍경화’한다.   

앰뷸런스는 死者에게 빌린 옷을 입고 지나간다
바꾸지 못한 시트에는 잔설이 묻어 난다
붉은 빛이 내 몸 뒤에서 토악질을 한 건 피 때문이었을까
앰뷸런스는 하나하나 불빛으로 바뀌는 울음의 슬로우 모션이다
폭우 사이를 뚫고 달리는 앰뷸런스 쫓아가 문 열리는 시간까지 기다린다
늦은 밤 냉장고 문을 열 때 당혹스레 쏟아지던 불빛처럼
두 손이 잠기는 늪이 내 눈알의 뒤쪽인지 알고 싶다
금방 터져 버려 퍼 담지 못할 양수 같은
酸性의 육체는 별을 기다리는가
앰뷸런스는 구겨지는 길을 지나간다
-「앰뷸런스」 전문

같은 시집에 나오는 이런 시는 “애매성의 공간에 명쾌함을 부여”하려는 그의 노력이 허사가 아님을 잘 보여준다. 앰뷸런스를 “하나하나 불빛으로 바뀌는 울음의 슬로우 모션”이라고 묘사한 대목이나, 앰뷸런스가 “死者에게 빌린 옷을 입고 지나간다”고 서술한 부분은, 새삼스럽게도 시의 생명이 대상 자체가 아니라 표현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쉬클로프스키(V. Shklovsky)가 그 유명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설명하면서 “예술은 대상에 부여된 기교성(artfulness)을 경험하는 한 방식이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을 때의 “기교성”이란, ‘관념’을 ‘감각’으로 옮겨놓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III.
관념 자체가 혐의일 수는 없다. 플라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세계의 본질을 관념으로 설정한 무수한 사유들을 접해왔다. 이 ‘관념의 왕자들’에게 관념은 양보할 수 없는 세계의 실체이다. 그러나 시는 지식 혹은 관념을 말할 때에도 감각 혹은 지각(perception)의 층위를 경유한다. 관념은 시의 적이 아니다. 관념은 시의 원료 중의 하나이며 시는 그것을 감각의 세계로 옮겨놓는 기술(art)이다. 또한 애매성 혹은 모호성(ambiguity) 자체가 혐의일 수 없다. 신비평(New Criticism)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인 엠프슨(W. Empson)은 모호성을 시적 언어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간주하였다(『모호성의 일곱 가지 유형 Seven Types of Ambiguity』). 그러나 시적 모호성은 관념적 모호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을 강제로 연결시킬 때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된 화학반응’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적 모호성은 사물들 사이의 (긴장된) 관계에서 생산되므로 물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관념을, 정신적 강밀도를 끊임없이 ‘감각으로 번역하는 언어’이다.
 (내가 볼 때) 그의 시집들 중에 관념의 강밀도가 감각으로 가장 잘 번역된 시집은 다섯 번째 시집 『기억들』(2001)과 여섯 번째 시집인 『내간체를 얻다』(2011)이다. 이 시집들에서 송재학은 검은색의 관념을 다양한 사물어(事物語)들과 감각어(感覺語)들을 동원해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하고 있다. 그는 시 속에 다양한 종류의 사물과 감각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무와 식물들, 그리고 색깔의 동원이다. 이는 관념에 감각을 부여하고 그것을 사물과 뒤섞음으로써 시로 변용하는 행위이다.  

흰 수피의 나무들 사이
내가 가진 검은색 버리고
신발도 가지런히 나무 가랑이 아래 벗어놓고
나무 속 발광체라는 생각으로
나무 속에 들어가보았으면
혼자 썩을 수 없는 물질이었으니
물의 모세관을 따라가보았으면
-「나무장(葬)」 부분

“검은색 버리고/ 신발도 가지런히 나무 가랑이 아래 벗어놓고” 나무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는 화자의 태도는 다소곳하다. 여기에서 “나무 속에 들어가”는 행위는 관념(“검은색”)의 층위에서 사물의 층위로의 이동을 나타내되, 그 이동은 단순한 관계 맺기가 아니라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는 “나무 속 발광체”가 되어 “물의 모세관”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주체와 사물의 완전한 ‘포개짐’의 상태를 지향한다.

풀잎들은 언제 사랑하게 되는가
고요의 거울 속에 초록의 목발이 가득했다면
초록 거울 안은 방금 고요와 입 맞춘
동성애 풀잎들이 가득 누워 있다
-「풀잎들은 언제 사랑하게 되는가」 부분

“초록 거울”은 실물의 “풀잎들”을 번역(반영)하는 감각의 ‘언어’이다. 그 안에 비친 이미지들을 “동성애 풀잎”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영(번역) 이전과 반영 이후의 사물들이 완벽한 ‘동질의 것(homoglot)’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시의 목표이기도 한데, 『내간체를 얻다』의 「시인의 말」에 나오는 “내 시가 때로 상처의 무늬와 겹쳐진 오래된 얼룩이었으면 합니다”라는 문장은 관념을 사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잘 드러내준다. “상처”가 그의 문학의 재료라면, “오래된 얼룩”은 그의 시다. 그것들이 “겹쳐”지기를 바라는 것은 재료로서의 이데아(Idea)와 감각언어로 옮겨진 시가 완벽한 동체(同體)이기를 바라는 소망을 의미한다. 마슈레(P. Macherey)의 말처럼 문학이 일종의 ‘생산’이라면, 문학은 문학 이전의 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계속 ‘낳는’ 행위이다. 가령 “산벚나무 산도(産道)에 먼저 불이 붙고 꽃잎은 흰색에서 분홍빛으로 번지면서 온 산이 산벚나무의 희고 붉은 울음을 견디지 못할 때 먼저 봄 산욕(産褥)을 거쳤던 참나무가 되돌아서서”(「숨죽이기-생물계절학」)라는 표현은 나무와 색깔이 어우러지면서 관념이 사물로 ‘출산(出産)’되는 과정을 화려하게 재현하고 있다.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톱니바퀴 모양으로 바깥에 맺힌 것
계관이란 떨림에 매달은 錘이다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감옥이다
극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낙타의 혹처럼, 숨표처럼
볏이 더 붉어지면 이윽고 가뭄이다
-「닭, 극채색 볏」 전문

이 시는 관념과 실물 사이의 ‘위대한 충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터져나가 이룬 것이 닭의 볏이라니. 그리고 그것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다니. 송재학에게 있어서 “정신”(관념)은 웬만한 “뇌수”로는 담을 수 없는 거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을 얻는 것은 오로지 “극채색”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물 속에서이다. 시는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계관”이 시의 감옥이다.

IV.
근작시 「불가능의 흰색」 역시 그가 얼마나 색깔이라는 감각의 특수영역에 오래 몰두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흰색의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수컷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북쪽에는 남몰래 우는 낮과 밤이 있다 흰색의 목마름이 색깔을 지운다면 지평선은 얼음을 지운다 허기진 북극곰이 흰색을 삼키거나 애먼 흰색이 북극곰을 덮친다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다
-「불가능의 흰색」 부분

이 시에서는 색깔(감각)이 존재를 대치한다. “허기진 북극곰이 흰색을 삼키거나 애먼 흰색이 북극곰을 덮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존재들 사이의 충돌과 부딪힘은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는 풍경으로 대체된다. 이런 시도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관념과 싸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관념은 그의 시의 고향이지만, 그것은 감각의 거울을 들이댈 때 비로소 잠을 깨는 거대한 동물 같은 것이다.
신작시와 함께 소개된 산문에서도 그는 여전히 색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팜므파탈의 색깔 이미지는 주로 검은색과 붉은색이다. 혹자는 팜므파탈이 처음 유럽의 문학에서 시작할 때(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그 예이다), ‘여성의 권리가 급성장하자 남성의 불안 심리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팜므파탈의 검은색은 타나토스(Thanatos)의 파괴충동(죽음충동)을, 붉은색은 에로스(Eros)의 욕망을 나타내는 ‘색깔 기호’들이다, 굳이 이런 설명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는 관념에 노동을 투여해 시를 생산할 때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감각의 도구들을 불러낸다. 색깔은 그가 호명해내는 ‘감각 장비’들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가 관념에 색깔을 입히는 모습은 머릿속의 이데아를 화폭에 옮기는 화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 시집부터 최근 시집까지 그를 사로잡은 것은 “검은색”이다. 그는 검은 색의 스펙트럼 여기저기에 흩뿌려져있는 붉은색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거기에는 때로 푸른색이 끼어들기도 했다. 이제 그는 무슨 색깔로 관념의 심연을 들여다볼 것인가.
또한 송재학의 신작시들에서 ‘관념-구체의 미적분’을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시의 오래된 뼈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성을 향해 가지만 완성되지 않는 방정식인데, 왜냐하면 관념의 심연에는 바닥이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절반은 침묵이지만,
누군가 손가락을 베어 피의 글자를 쓴다지만,
저녁 7시는 ㄱ과 ㄴ을 나눈다
ㅏ와 ㅓ의 뼈를 발라 흰 접시에 담는다
갑자기 창을 두들기는 빗방울에
저녁의 귀가 길어지면서
몽환의 감정이 생긴다
걸어오는
저녁 7시의 기억을 멈추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섬세해진다
청색이라는 어스름의 갈피를 만지고
직립하는 빗방울마저 헤아릴 수 있다
저녁 7시의 등불을 켜고
누가 죽고 살았는지 살펴보렴
-「저녁 7시가 걸어온다」 부분

“목소리의 절반은 침묵이지만,/ 누군가 손가락을 베어 피의 글자를 쓴다지만,”이라는 표현은 모든 재현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적시한다. 아무리 치열하게 “피의 글자”로 재현을 할지라도 세계의 절반은 재현되지 않는다. 관념의 심연은 그것의 ‘짝패’를 생산하려는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치열성과는 별개의 영역인 것이다. 그 대신 이 시 속의 화자는 “저녁 7시”라는 구체적 시간이 세계를 섬세하게 해부하는 것을 목격한다. “저녁 7시”가 “ㅏ와 ㅓ의 뼈를 발라 흰 접시에 담는다”는 서술은 재현불가능이라는 주체의 ‘무력(無力’)을 사물 세계의 ‘유능(有能)’으로 대체한다. 주체가 빠진 자리에 ‘자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 7시”는 주체 대신에 세계를 비춰주는 “등불”이 된다. 주체는 자신의 관념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 비로소 세계를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작시 「신기루의 사전」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추상적 말놀이 같지만, 사막-호수-신기루의 순서로 발생하는 ‘문학 생산(literary production)’의 방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기루는 호수의 생멸 일부이다 사막의 기억은 사라져버린 호수를 찾아서 현재의 모든 호수와 연결하려는 것이다”라는 구문이 바로 그것이다. 신기루가 생산되려면 먼저 사막이 있어야하고 사막 어딘가에 호수가 있어야한다. 호수가 공기층의 어떤 거울에 특정한 각도로 비춰질 때 신기루가 생산된다. 여기서 거울은 바로 언어이고, 신기루는 언어가 세계(호수)를 비추어낸 결과이다. 송재학은 관념의 사막에서 갈증을 견디며 호수를 찾아다니고, 호수에 언어의 거울을 들이대 신기루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신기루가 바로 시이며, 따라서 시의 먼 고향은 관념의 사막인 것이다.
posted by 추월산
:
추월산의 시 2017. 8. 1. 12:16
통합 게시판

[김성중 7월 토론작] : 느티나무 옷걸이,시,탁란-00,랙,회화나무,환대,철로,광주송정역에서,습관,스탠드,스탠드와 지렁이,탁란,학교방송는 쉬지 않는다 13편



단오작성시간2017.07.20  조회수3

0

느티나무 옷걸이

 

번다한 교무실을 피해서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바람을 쐰다.

느티나무에게 저고리를 맡기고서

내 맘은 한없이 자유롭다.

월요일 1,2교시 수업을 했으니

나에겐 달콤한 휴식이 필요하거늘

내가 쉴 곳은 운동장 스탠드뿐

느티나무를 곁에 두고서

상념에 젖는다.

 




 

시가 다가온다는 말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시에게 늘 다가간다.

내가 시에게 다가가면

시는 언제나 뒷걸음치곤 한다.

그래도 나는 또 시에게

웃음을 띠면서 다가간다.

왜냐하면 나는 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나에게 늘 비우호적이다.

때로는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시의 마음에 들 때까지

들이댈 것이다.

 


탁란-00

 

붉은머리오목눈이야 알을 지켜라

뱁새야 뻐꾸기를 몰아내라

뻐꾹 뻐꾹 뻑꾸욱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몰래 알을 낳은 뻐꾸기 암컷은

알을 지키느라 분주하고

붉은머리오목눈이 암컷은

뻐꾸기알을 품느라 힘이 빠지고

제 새끼를 죽인 원수새끼

뻐꾸기새끼를 기른다

저보다 더 큰 뻐꾸기새끼 주둥이에

벌레를 물어다 준다

탁란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숲

뻐꾹 뻐꾹 뻑꾸욱

뻐꾸기새끼 날아간 하늘은

푸르디푸르다.

 




 

연결 지연
랙에 걸리면

 

아무 것도 못 해

답답해서 죽어

 

내 컴퓨터는 지금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작업을 못 해서

안절부절 못 하는데

 

주변의 동료들은

8월 야자 당번을 바꾸기에 바쁘고

 

8월 개학일에나

컴퓨터를 바꿔준다고 한다.

 

 

회화나무

 

저 나무는 어떤 언어로 대화를 나눌까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있어

나는 머리를 싸고 고민에 빠진다.

나무니까 나무 목자를 써서 목어일까

아니 그건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어

그러면 물을 먹고 사는 나무니까

물먹어로 대화를 나눌까

아니 아니 나무는 아름다운 존재니까

미인어로 회화를 하지 않겠어?

나와 당신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일곡동 가로수 회화나무는

말없이 꽃만 피워대며

벌과 밀어를 속삭이는 한여름.

 


환대

 

정원의 시집 「환대」 두 권

한 권은 새 책

한 권은 헌 책

포도시 구했다.

도시에서는 환대를 하기도

환대를 받기도 어려운데

환대에서 니은이

떨어져나가면 어떡한다냐

환대를 읽으며 나는

환장허게 좋아분다.




철로

 

늘 평행선

만나서는 안 될 친구

그리워서 미치는

녹이 슬어도

기차가 한 번 지나가면 스러지는

내 마음과 같은

기다림의 달인

설 줄 모르고 누워만 있는

우직하게 견디는

반란을 꿈꾸지 않는

거짓을 모르는

기적소리 요란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싣고

휴전선을 거침없이 뭉개고 싶은

첼로가 아니어서

아재 소리를 듣는

두 줄이니까 해금 연주를 하고 싶은

광주송정역 9번과 10번 플랫폼 철로




광주송정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장맛비가 잠깐 갠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드넓은 주차장엔

주인 떠난 자동차들이 가득 찼고

녹슨 철로는 마음 졸이고

이름 모를 나무는

작은 열매를 달고 있고

광주송정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도깨비가지꽃이 피어서

나를 반긴다.



습관

 

차에 오르니 비가 내린다.

오늘 퇴근할 때는 늘 복잡한

양산초등학교 앞길을 피했다.

첨단2교를 건너서 모처럼만에

우회전하여 첨단2산단을 지나서,

연제피오레를 지나서,

코카콜라사거리를 지나서

일동중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주행시간은 15분(17:20-17:35)이고

주행거리는 7.3km다.

양산초등학교 앞길보다

0.8km가 더 멀다.




스탠드

 

교무실이 답답해질 때면

운동장가 응원석으로 간다.

느티나무가 긴 그늘을 드리우고

지붕이 햇볕을 가려주는 곳

나는 이곳에서 마음이 한가하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인데

누군가 땀 흘리며 뛰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응원석에서 소리 없는 박수를 치는

나의 호사를 당신은 모르리.

나의 자리는 손수건을 깐 자리

비단 방석도 없는 자리

내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운동장가 응원석으로 간다.




스탠드와 지렁이

 

운동장가 스탠드에 앉아서

한여름 뜨거운 바람을 쐬며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을 보았다.

시멘트 계단 응원석에서는

온 몸에 모래를 바른 실지렁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저 지렁이 저렇게 가다가는

큰 일 나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점심을 먹고 그곳에 다시 가서 보았더니

지렁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뜨거운 여름날 절망한 지렁이는

이카루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갔나

두더지처럼 시멘트 스탠드를 파헤치고

깊은 땅속으로 스며들었나

짝을 찾는 매미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탁란

 

국립공원 무등산 원효계곡

풍암정과 풍암제 풍광에 반해서

감탄사만 연발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왕버드나무 충효동 호수생태공원에 들렀다.

쭈그렁 할매 푸성귀 몇 잎

진열해 놓고 졸고 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깻잎이며 솔을 사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젊은 아낙이 달려와서

자기 물건이라고 한다.

풍암정 가는 길에

파라솔을 펴놓고 옥수수를 파는 할매한테

옥수수를 사기도 했는데

쭈그렁 할매를 앞세워 장사하는

저 젊은 아낙의 장사수완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는

일요일 저녁이었다.




학교 방송은 쉬지 않는다

 

학년실 방송은 쉬지 않는다.

교무실 방송도 쉬지 않는다.

선생들은 틈만 나면 방송을 한다.

수업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행사 안내

누구 교무실로 와라

지금 종례하러 간다.

반장은 당장 교무실로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곧장 교무실로 달려오고

나는 방송의 위력을 실감하면서도

아직까지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반 아이를 호출하거나

다른 반 아이를 호출하지도 않았다.

친절하게도 나는

교실을 찾아가서 전달하거나

해당 학생을 찾았다.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학교 방송은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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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작성시간2017.07.20  조회수3

0

느티나무 옷걸이

 

번다한 교무실을 피해서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바람을 쐰다.

느티나무에게 저고리를 맡기고서

내 맘은 한없이 자유롭다.

월요일 1,2교시 수업을 했으니

나에겐 달콤한 휴식이 필요하거늘

내가 쉴 곳은 운동장 스탠드뿐

느티나무를 곁에 두고서

상념에 젖는다.

 




 

시가 다가온다는 말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시에게 늘 다가간다.

내가 시에게 다가가면

시는 언제나 뒷걸음치곤 한다.

그래도 나는 또 시에게

웃음을 띠면서 다가간다.

왜냐하면 나는 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나에게 늘 비우호적이다.

때로는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시의 마음에 들 때까지

들이댈 것이다.

 


탁란-00

 

붉은머리오목눈이야 알을 지켜라

뱁새야 뻐꾸기를 몰아내라

뻐꾹 뻐꾹 뻑꾸욱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몰래 알을 낳은 뻐꾸기 암컷은

알을 지키느라 분주하고

붉은머리오목눈이 암컷은

뻐꾸기알을 품느라 힘이 빠지고

제 새끼를 죽인 원수새끼

뻐꾸기새끼를 기른다

저보다 더 큰 뻐꾸기새끼 주둥이에

벌레를 물어다 준다

탁란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숲

뻐꾹 뻐꾹 뻑꾸욱

뻐꾸기새끼 날아간 하늘은

푸르디푸르다.

 




 

연결 지연
랙에 걸리면

 

아무 것도 못 해

답답해서 죽어

 

내 컴퓨터는 지금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작업을 못 해서

안절부절 못 하는데

 

주변의 동료들은

8월 야자 당번을 바꾸기에 바쁘고

 

8월 개학일에나

컴퓨터를 바꿔준다고 한다.

 

 

회화나무

 

저 나무는 어떤 언어로 대화를 나눌까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있어

나는 머리를 싸고 고민에 빠진다.

나무니까 나무 목자를 써서 목어일까

아니 그건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어

그러면 물을 먹고 사는 나무니까

물먹어로 대화를 나눌까

아니 아니 나무는 아름다운 존재니까

미인어로 회화를 하지 않겠어?

나와 당신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일곡동 가로수 회화나무는

말없이 꽃만 피워대며

벌과 밀어를 속삭이는 한여름.

 


환대

 

정원의 시집 「환대」 두 권

한 권은 새 책

한 권은 헌 책

포도시 구했다.

도시에서는 환대를 하기도

환대를 받기도 어려운데

환대에서 니은이

떨어져나가면 어떡한다냐

환대를 읽으며 나는

환장허게 좋아분다.




철로

 

늘 평행선

만나서는 안 될 친구

그리워서 미치는

녹이 슬어도

기차가 한 번 지나가면 스러지는

내 마음과 같은

기다림의 달인

설 줄 모르고 누워만 있는

우직하게 견디는

반란을 꿈꾸지 않는

거짓을 모르는

기적소리 요란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싣고

휴전선을 거침없이 뭉개고 싶은

첼로가 아니어서

아재 소리를 듣는

두 줄이니까 해금 연주를 하고 싶은

광주송정역 9번과 10번 플랫폼 철로




광주송정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장맛비가 잠깐 갠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드넓은 주차장엔

주인 떠난 자동차들이 가득 찼고

녹슨 철로는 마음 졸이고

이름 모를 나무는

작은 열매를 달고 있고

광주송정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도깨비가지꽃이 피어서

나를 반긴다.



습관

 

차에 오르니 비가 내린다.

오늘 퇴근할 때는 늘 복잡한

양산초등학교 앞길을 피했다.

첨단2교를 건너서 모처럼만에

우회전하여 첨단2산단을 지나서,

연제피오레를 지나서,

코카콜라사거리를 지나서

일동중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주행시간은 15분(17:20-17:35)이고

주행거리는 7.3km다.

양산초등학교 앞길보다

0.8km가 더 멀다.




스탠드

 

교무실이 답답해질 때면

운동장가 응원석으로 간다.

느티나무가 긴 그늘을 드리우고

지붕이 햇볕을 가려주는 곳

나는 이곳에서 마음이 한가하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인데

누군가 땀 흘리며 뛰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응원석에서 소리 없는 박수를 치는

나의 호사를 당신은 모르리.

나의 자리는 손수건을 깐 자리

비단 방석도 없는 자리

내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운동장가 응원석으로 간다.




스탠드와 지렁이

 

운동장가 스탠드에 앉아서

한여름 뜨거운 바람을 쐬며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을 보았다.

시멘트 계단 응원석에서는

온 몸에 모래를 바른 실지렁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저 지렁이 저렇게 가다가는

큰 일 나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점심을 먹고 그곳에 다시 가서 보았더니

지렁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뜨거운 여름날 절망한 지렁이는

이카루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갔나

두더지처럼 시멘트 스탠드를 파헤치고

깊은 땅속으로 스며들었나

짝을 찾는 매미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탁란

 

국립공원 무등산 원효계곡

풍암정과 풍암제 풍광에 반해서

감탄사만 연발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왕버드나무 충효동 호수생태공원에 들렀다.

쭈그렁 할매 푸성귀 몇 잎

진열해 놓고 졸고 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깻잎이며 솔을 사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젊은 아낙이 달려와서

자기 물건이라고 한다.

풍암정 가는 길에

파라솔을 펴놓고 옥수수를 파는 할매한테

옥수수를 사기도 했는데

쭈그렁 할매를 앞세워 장사하는

저 젊은 아낙의 장사수완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는

일요일 저녁이었다.




학교 방송은 쉬지 않는다

 

학년실 방송은 쉬지 않는다.

교무실 방송도 쉬지 않는다.

선생들은 틈만 나면 방송을 한다.

수업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행사 안내

누구 교무실로 와라

지금 종례하러 간다.

반장은 당장 교무실로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곧장 교무실로 달려오고

나는 방송의 위력을 실감하면서도

아직까지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반 아이를 호출하거나

다른 반 아이를 호출하지도 않았다.

친절하게도 나는

교실을 찾아가서 전달하거나

해당 학생을 찾았다.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학교 방송은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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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17. 8. 1. 12:07
엘지 서비스센터

말바우 시장 건너편에 있는  엘지 서비스센터에 와 있다. 집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러 왔다. 핸드폰,PC,가전을 수리하러 온 사람들이 많다. 물건을 살 때는 이 물건이 고장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쓰다보면 물건은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물론 조작을 잘못해서 고장이 나는 경우도 있고, 조작할 줄 몰라서 고장이 난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비스센터에 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물건도 고장이 나고, 사람도 고장이 나고, 사회도 고장이 나고, 세계도 고장이 나고, 고장이 나고...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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