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064건

  1. 2018.10.06 :: 가난한 장남 외 21편
  2. 2018.01.12 :: 2018 금시 겨울연수
  3. 2017.12.09 :: 2017 금시 송년시
  4. 2017.10.22 :: 9월의 시
추월산의 시 2018. 10. 6. 06:51
통합 게시판

[김성중 9월 토론작품] 가난한 장남 외 21편



작성자:단오작성시간:2018.09.28  조회수:2

댓글0


 가난(2018-9-금시-현대옥).hwp


가난한 장남 외 21편

김성중

 

 

아버지께 용돈을 두둑히 드리지 못 하는

가난한 장남이 할 일은 별로 없다.

일곡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일이다.

무등산에 가끔 오를 일이다.

 

결혼식장에 가서 축의금을

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서 망자의 편안한

저승길을 기원할 일이다.

 

사람들과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일이다.

막걸리 값을 가끔씩 낼 일이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날마다 빌 일이다.

 

가난한 장남이 할 일은

한새봉 농업생태공원에서 놀다가

영산강변 폐가를 찾아가서

텃밭을 일굴 일이다.

 

 

중국단풍나무 아래

 

 

한가위라 풍성한 날

중국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인생이란?

부모란?

효도란?

사랑이란?

 

중국단풍나무 아래

나긋한 벤치에서

나의 가을이 익어간다.

 


광주송정역

 

 

추석을 쇠고

떠나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나나

우리 이제 함께 가는 거죠

만나고 헤어지고

 

새벽 여섯 시 이십 분

딸아이를 실은 SRT열차는

철로를 미끄러지며

저 멀리 달아나고

 

새벽잠을 깬 내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한가윗달

 

 

소원을 빌어요.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

전쟁 없는 세상

빈부 없는 세상

 

질투는 저리 가고

칭찬만 남고

실업자는 없고

노동자가 넘치는 거리

 

금강산에도 가고

묘향산에도 가고

개마고원에도 가고

백두산 천지에도 가고

 

만월대도 가고

을밀대도 가고

박연폭포도 가고

가고

가고

또 가고

 

비무장지대는 저리 가고

우린 평화지대로 가고

 



 

 

나는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고민하며 세상을 살아가는가?

 

나는 뼈와 살과 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영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내 사유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조상을 그리워하며 수확의 기쁨을 함께 하는 한가위 명절, 조상의 피가 내 핏줄을 타고 흐른다. 기억할 수도 없는 조상들의 은덕을 생각한다.

 

나는 다시 내 존재의 이유를 생각한다. 뵌 적이 없는 6.25때 돌아가신 두 분의 큰아버지를 생각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뵌 적이 없는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한다. 내일이 추석인데 나는 내 존재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한다.



타이어 바람 주의

 

 

내가 세피아를 몰던 시절, 동네 카센터에서 타이어를 네 짝 모두 교체했다. 다음날 아버지를 모시고 춘천으로 사돈 조문을 가는 길, 운전을 하는데 자꾸 차가 한 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읍휴게소 근처에서 누군가 손짓을 해서 휴게소에 들러서 확인해보니까 운전석 쪽 바퀴의 바람이 많이도 빠져 있었다. 타이어를 교체하면서 "타이어 바람구멍"을 닫지 않은 것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잊지 못할 일이다.

 

 

다시 무씨 뿌리기

 

 

단오반 텃밭에 조심스럽게 뿌린

무씨가 싹이 트지 않았다.

 

말바우장에서 사온 무씨를

단오반 텃밭에 다시 뿌렸다.

 

추석 쇠고 가서 보니까

예쁜 싹이 솟아나 있었다.

 

무가 잘 자라게

잘 속아 주고

벌레도 잡아줘야겠다.

 

 

 

명옥헌 원림

 

창평 가는 길 후산리

명옥헌을 찾아갔더니

배롱나무꽃이

시원치 않다.

 

올 여름 폭염에

배롱나무도 지쳤나보다.

 

후산리 입구 왕버드나무 뚝방

수련이 피어있는 연못을 지나서

달팽이 걸음으로 걸어가서

 

명옥헌 마루에 앉아

배롱나무 연못을 바라보며

잠시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 가을.

 


무씨

 

 

텃밭에 무씨를 뿌리고

싹이 나오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배추 모종은

배추 모양을 갖춰가는데

무싹은 영영

싹아지가 보이지 않는다.

 

거름이 과했나?

그래서 녹았을까?

씨앗이 불량인가?

참새들이 쪼아 먹었을까?

 

무싹은 영영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슬

 

 

새벽에 텃밭에 가면 밭둑에

밤새 내린 이슬에 젖은

풀들이 나를 반긴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온 세상이 불타던 폭염의 새벽에도

어김없이 이슬을 머금은 풀을 만났다.

 

풀은 한 밤중이 지나는 시간까지 기다릴 줄 안다.

한낮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시들어가면서도

새벽녘에 맺힐 이슬을 기다릴 줄 안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땅 위에서 숨을 쉬는 것들의 생명수

 

이슬의 공덕을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슬의 이슬이 되지 못하면서

이슬을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보낼 일을 걱정하기만 한다.

 

보이지 않는 이슬은

시들어가는 풀과 나무를 살려내는

화타보다 더 신통한 명의.



스무 살 선생

 

 

담양야간중학교는

담양동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낮에 일한 청소년들을 불러 모았지.

나는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강학이었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살 먹은 중학생들에게

형 같은 오빠 같은 선생이었네.

교지 "등불"에

「돌을 깨는 사람」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었지.

스무 살 어린 선생이었던 난

순하디 순한

영혼을 만났었네.




소동파를 만나다

 

 

18년 전 광주제일고에서

적벽부를 가르치면서

동파를 만났지.

 

전라도닷컴 기자가 수업을 참관했었지.

전라도닷컴에 내 이야기가 실렸었지.

책을 여러 권 들고 교실에 들어갔었지.

지리 김선생이 그려준

적벽지도를 걸고 수업을 했었지.

 

6년 전에는

항저우 시호에서 동파를 만났지.

시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시호를 보수하던 동파를 생각했지.

 

오늘 나는 임어당이 지은

소동파 평전

"쾌활한 천재"를 읽으며

동파를 더 깊이 알아간다.



안마기

 

 

내 자동차는 정비중

나는 안마기에 앉아서 안마중

안마기는 내 삭신을

밀고 당기고 조이며

신바람을 내는데

내 삭신은 모처럼만에 호강중

가을비 내리는 카센터

가을맞이 정비가 한창




자동차 정비소

 

 

수리하려는 자동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은

이렇게 정비를 한 차들이다.

자동차는 때가 되면

정비를 해야 한다.

우리네 인생도 가끔씩

정비를 해야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려면...

 


죽염

 

점심을 먹고

죽염으로 양치한 다음에

병뚜껑을 닫고 서랍에

넣으려다가 병을 놓쳤는데

죽염이 바닥에 흩어졌다.

얼른 종이에 쓸어

담아 병에 담고

나머지는 화장지에

물을 묻혀서 닦아냈다.

방심은 늘 화를 부른다.

긴장의 끈을 놓더라도

정신 줄을 놓지는 말아야지.




생채기

 

무정한 전정 톱에

가지를 몽땅 잃어버린

첨단 우물살구나무가

가을비를 맞고 서 있다.

갑자기 잘려나간

팔다리가 그리운 모양이다.

내년 봄에 어떤 모습일까?

아, 정원수의 비애여!



볼펜

 

 

머리를 누르면 심이 나오고 또 누르면 심이 들어가는 똑딱볼펜을 사랑해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글을 쓰거나 싸인을 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볼펜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심을 꺼내보니까 잉크가 다 닳아져 있었다. 볼펜 껍데기는 멀쩡한데, 심만 갈아 끼우면 되는데, 나는 과감하게 나오지 않는 볼펜을 버렸다.

 

나는 그 볼펜이 계속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썼던 것 같다. 뭐든 쓰다보면 닳아지는데 말이다. 내 몸도 오랫동안 쓰다보니까 많이 닳아졌다. 눈도 닳아졌고, 팔도 닳아졌다. 어깨를 잘못 움직이면 통증이 심하다.



신새벽

 

 

나는 새벽 네 시에 신문이 왔는지 보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이 동네에서 새벽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우리 집 현관 앞에 놓인 지 20년이 되었다. 신문배달원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집 현관 앞에 신문을 던지고 간다.

 

나는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눈을 떠서 신문을 읽는다.

 

앞으로는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생활을 할 것 같다. 새벽의 고요함이 내 영혼을 맑게 하고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독서하고 사색하는 생활을 하고 싶으니까.




가을에

 

 

바람이 달라졌다.

구름이 달라졌다.

매미 울음이 그쳤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하늘이 달라졌다.

들판의 곡식이 익어간다.

나무들의 이파리가 달라졌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텃밭에 배추모종을 옮겨 심었다.

무씨도 뿌렸다.

텃밭에 물을 주면서 느낀다.

새들의 날갯짓이 달라졌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들이 똠방하다.

가을은 달라지는 계절이다.

가을에는 달라져야 한다.

 

 

수료

 

 

나는 한때 교육대학원생이었지

시창작교육을 고민했었지

석사학위 청구 논문 예비발표까지 마쳤으나

논문을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콱 막혀버렸지

수많은 석사학위 논문을 읽으면서

시창작교육이 매우 활발하다고 생각했었지

나는 아직도 시창작교육을 생각하고 있지

탈고 안될 논문을 구상하고 있지

 


사유

 

 

나는 가끔 우주를 사유한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먼저 사유한다.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을 사유한다.

지구가 돌고 있는 태양을 사유한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을 사유한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사유한다.

 

나는 무엇이든 사유한다.

천둥과 번개를

비와 눈과 이슬을 구름을

신과 사탄을

천국과 지옥을

부귀영화와 간난신고를

늘 사유한다.

 

인간은 소우주다.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반성한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인가?

 

 

거리에서

 

 

일곡동 식자재마트 옆

쉼터 앞 가로수에서

매미가 마지막으로

숨가쁜 울음을 토해내는

일요일 오후

바쁠 것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가하다.

일곡 청소년의 집

일곡 요양병원

북광주우체국

시방 일곡동은 한바탕

건축바람이 불고 있는데

오랫동안 이름을 날리던

봉창이 칼국수 집은 어디로 갔나.

그 자리에 ‘파도소리’ 들리는

횟집이 생겼다.


첨부파일1

댓글알림 설정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쓰기댓글쓰기

댓글 새로고침

이전최승권 9월 토론작품 : 보름다다음아침달다음[김성중 8월 토론작품]운동장가에서 외 18편

[김성중 9월 토론작품] 가난한 장남 외 21편



작성자:단오작성시간:2018.09.28  조회수:2

댓글0


 가난(2018-9-금시-현대옥).hwp


가난한 장남 외 21편

김성중

 

 

아버지께 용돈을 두둑히 드리지 못 하는

가난한 장남이 할 일은 별로 없다.

일곡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일이다.

무등산에 가끔 오를 일이다.

 

결혼식장에 가서 축의금을

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서 망자의 편안한

저승길을 기원할 일이다.

 

사람들과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일이다.

막걸리 값을 가끔씩 낼 일이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날마다 빌 일이다.

 

가난한 장남이 할 일은

한새봉 농업생태공원에서 놀다가

영산강변 폐가를 찾아가서

텃밭을 일굴 일이다.

 

 

중국단풍나무 아래

 

 

한가위라 풍성한 날

중국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인생이란?

부모란?

효도란?

사랑이란?

 

중국단풍나무 아래

나긋한 벤치에서

나의 가을이 익어간다.

 


광주송정역

 

 

추석을 쇠고

떠나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나나

우리 이제 함께 가는 거죠

만나고 헤어지고

 

새벽 여섯 시 이십 분

딸아이를 실은 SRT열차는

철로를 미끄러지며

저 멀리 달아나고

 

새벽잠을 깬 내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한가윗달

 

 

소원을 빌어요.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

전쟁 없는 세상

빈부 없는 세상

 

질투는 저리 가고

칭찬만 남고

실업자는 없고

노동자가 넘치는 거리

 

금강산에도 가고

묘향산에도 가고

개마고원에도 가고

백두산 천지에도 가고

 

만월대도 가고

을밀대도 가고

박연폭포도 가고

가고

가고

또 가고

 

비무장지대는 저리 가고

우린 평화지대로 가고

 



 

 

나는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고민하며 세상을 살아가는가?

 

나는 뼈와 살과 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영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내 사유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조상을 그리워하며 수확의 기쁨을 함께 하는 한가위 명절, 조상의 피가 내 핏줄을 타고 흐른다. 기억할 수도 없는 조상들의 은덕을 생각한다.

 

나는 다시 내 존재의 이유를 생각한다. 뵌 적이 없는 6.25때 돌아가신 두 분의 큰아버지를 생각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뵌 적이 없는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한다. 내일이 추석인데 나는 내 존재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한다.



타이어 바람 주의

 

 

내가 세피아를 몰던 시절, 동네 카센터에서 타이어를 네 짝 모두 교체했다. 다음날 아버지를 모시고 춘천으로 사돈 조문을 가는 길, 운전을 하는데 자꾸 차가 한 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읍휴게소 근처에서 누군가 손짓을 해서 휴게소에 들러서 확인해보니까 운전석 쪽 바퀴의 바람이 많이도 빠져 있었다. 타이어를 교체하면서 "타이어 바람구멍"을 닫지 않은 것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잊지 못할 일이다.

 

 

다시 무씨 뿌리기

 

 

단오반 텃밭에 조심스럽게 뿌린

무씨가 싹이 트지 않았다.

 

말바우장에서 사온 무씨를

단오반 텃밭에 다시 뿌렸다.

 

추석 쇠고 가서 보니까

예쁜 싹이 솟아나 있었다.

 

무가 잘 자라게

잘 속아 주고

벌레도 잡아줘야겠다.

 

 

 

명옥헌 원림

 

창평 가는 길 후산리

명옥헌을 찾아갔더니

배롱나무꽃이

시원치 않다.

 

올 여름 폭염에

배롱나무도 지쳤나보다.

 

후산리 입구 왕버드나무 뚝방

수련이 피어있는 연못을 지나서

달팽이 걸음으로 걸어가서

 

명옥헌 마루에 앉아

배롱나무 연못을 바라보며

잠시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 가을.

 


무씨

 

 

텃밭에 무씨를 뿌리고

싹이 나오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배추 모종은

배추 모양을 갖춰가는데

무싹은 영영

싹아지가 보이지 않는다.

 

거름이 과했나?

그래서 녹았을까?

씨앗이 불량인가?

참새들이 쪼아 먹었을까?

 

무싹은 영영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슬

 

 

새벽에 텃밭에 가면 밭둑에

밤새 내린 이슬에 젖은

풀들이 나를 반긴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온 세상이 불타던 폭염의 새벽에도

어김없이 이슬을 머금은 풀을 만났다.

 

풀은 한 밤중이 지나는 시간까지 기다릴 줄 안다.

한낮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시들어가면서도

새벽녘에 맺힐 이슬을 기다릴 줄 안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땅 위에서 숨을 쉬는 것들의 생명수

 

이슬의 공덕을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슬의 이슬이 되지 못하면서

이슬을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보낼 일을 걱정하기만 한다.

 

보이지 않는 이슬은

시들어가는 풀과 나무를 살려내는

화타보다 더 신통한 명의.



스무 살 선생

 

 

담양야간중학교는

담양동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낮에 일한 청소년들을 불러 모았지.

나는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강학이었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살 먹은 중학생들에게

형 같은 오빠 같은 선생이었네.

교지 "등불"에

「돌을 깨는 사람」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었지.

스무 살 어린 선생이었던 난

순하디 순한

영혼을 만났었네.




소동파를 만나다

 

 

18년 전 광주제일고에서

적벽부를 가르치면서

동파를 만났지.

 

전라도닷컴 기자가 수업을 참관했었지.

전라도닷컴에 내 이야기가 실렸었지.

책을 여러 권 들고 교실에 들어갔었지.

지리 김선생이 그려준

적벽지도를 걸고 수업을 했었지.

 

6년 전에는

항저우 시호에서 동파를 만났지.

시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시호를 보수하던 동파를 생각했지.

 

오늘 나는 임어당이 지은

소동파 평전

"쾌활한 천재"를 읽으며

동파를 더 깊이 알아간다.



안마기

 

 

내 자동차는 정비중

나는 안마기에 앉아서 안마중

안마기는 내 삭신을

밀고 당기고 조이며

신바람을 내는데

내 삭신은 모처럼만에 호강중

가을비 내리는 카센터

가을맞이 정비가 한창




자동차 정비소

 

 

수리하려는 자동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은

이렇게 정비를 한 차들이다.

자동차는 때가 되면

정비를 해야 한다.

우리네 인생도 가끔씩

정비를 해야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려면...

 


죽염

 

점심을 먹고

죽염으로 양치한 다음에

병뚜껑을 닫고 서랍에

넣으려다가 병을 놓쳤는데

죽염이 바닥에 흩어졌다.

얼른 종이에 쓸어

담아 병에 담고

나머지는 화장지에

물을 묻혀서 닦아냈다.

방심은 늘 화를 부른다.

긴장의 끈을 놓더라도

정신 줄을 놓지는 말아야지.




생채기

 

무정한 전정 톱에

가지를 몽땅 잃어버린

첨단 우물살구나무가

가을비를 맞고 서 있다.

갑자기 잘려나간

팔다리가 그리운 모양이다.

내년 봄에 어떤 모습일까?

아, 정원수의 비애여!



볼펜

 

 

머리를 누르면 심이 나오고 또 누르면 심이 들어가는 똑딱볼펜을 사랑해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글을 쓰거나 싸인을 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볼펜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심을 꺼내보니까 잉크가 다 닳아져 있었다. 볼펜 껍데기는 멀쩡한데, 심만 갈아 끼우면 되는데, 나는 과감하게 나오지 않는 볼펜을 버렸다.

 

나는 그 볼펜이 계속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썼던 것 같다. 뭐든 쓰다보면 닳아지는데 말이다. 내 몸도 오랫동안 쓰다보니까 많이 닳아졌다. 눈도 닳아졌고, 팔도 닳아졌다. 어깨를 잘못 움직이면 통증이 심하다.



신새벽

 

 

나는 새벽 네 시에 신문이 왔는지 보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이 동네에서 새벽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우리 집 현관 앞에 놓인 지 20년이 되었다. 신문배달원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집 현관 앞에 신문을 던지고 간다.

 

나는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눈을 떠서 신문을 읽는다.

 

앞으로는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생활을 할 것 같다. 새벽의 고요함이 내 영혼을 맑게 하고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독서하고 사색하는 생활을 하고 싶으니까.




가을에

 

 

바람이 달라졌다.

구름이 달라졌다.

매미 울음이 그쳤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하늘이 달라졌다.

들판의 곡식이 익어간다.

나무들의 이파리가 달라졌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텃밭에 배추모종을 옮겨 심었다.

무씨도 뿌렸다.

텃밭에 물을 주면서 느낀다.

새들의 날갯짓이 달라졌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들이 똠방하다.

가을은 달라지는 계절이다.

가을에는 달라져야 한다.

 

 

수료

 

 

나는 한때 교육대학원생이었지

시창작교육을 고민했었지

석사학위 청구 논문 예비발표까지 마쳤으나

논문을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콱 막혀버렸지

수많은 석사학위 논문을 읽으면서

시창작교육이 매우 활발하다고 생각했었지

나는 아직도 시창작교육을 생각하고 있지

탈고 안될 논문을 구상하고 있지

 


사유

 

 

나는 가끔 우주를 사유한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먼저 사유한다.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을 사유한다.

지구가 돌고 있는 태양을 사유한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을 사유한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사유한다.

 

나는 무엇이든 사유한다.

천둥과 번개를

비와 눈과 이슬을 구름을

신과 사탄을

천국과 지옥을

부귀영화와 간난신고를

늘 사유한다.

 

인간은 소우주다.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반성한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인가?

 

 

거리에서

 

 

일곡동 식자재마트 옆

쉼터 앞 가로수에서

매미가 마지막으로

숨가쁜 울음을 토해내는

일요일 오후

바쁠 것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가하다.

일곡 청소년의 집

일곡 요양병원

북광주우체국

시방 일곡동은 한바탕

건축바람이 불고 있는데

오랫동안 이름을 날리던

봉창이 칼국수 집은 어디로 갔나.

그 자리에 ‘파도소리’ 들리는

횟집이 생겼다.


첨부파일1

댓글알림 설정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쓰기댓글쓰기

댓글 새로고침

이전최승권 9월 토론작품 : 보름다다음아침달다음[김성중 8월 토론작품]운동장가에서 외 18편

'추월산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11월 토론작품  (0) 2019.01.01
2018년 10월 토론작품  (0) 2019.01.01
2018 금시 겨울연수  (0) 2018.01.12
2017 금시 송년시  (0) 2017.12.09
9월의 시  (0) 2017.10.22
posted by 추월산
:
추월산의 시 2018. 1. 12. 07:41
한새봉 청설모

김성중

 

 

한새봉을 걷다가 청설모 두 마리를 만났다.

산책로 옆 감나무에서 감을 따서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렵하게 날아서는

산책로를 건너서 소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청설모는 나무타기의 달인이다.

아주 작은 가지를 밟고서도

다른 나무로 휙 날아간다.

청설모는 몸무게가 없다.

 

청설모는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간을 매우 두려워한다.

인간은 자연계의 무법자니까.

 

신작로처럼 넓어져버린

한새봉 산책로 주변에서

청설모는 힘겹게

겨울을 지나고 있다.




겨울비

 

 

함박눈을 기다리는데

겨울비가 내린다

담양호반 물 빠진 자국 위로

소한 지나 겨울비가 내린다

겨울비가 포근히 내리는 날

대지는 겨우내 목마른 혀를 축이고

그리움에 마음 졸이던 내 가슴도

어느새 따뜻한 봄날을 꿈꾼다

 

 

어제는 비 오늘은 눈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으니

이제 겨울다운 겨울인가

차들도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세상은 느림보가 되어버렸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들

한 송이 두 송이 세다가

아, 눈이 내려서 좋은 아이들 마냥

나는 벌써 눈썰매를 타고 있다

어제는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리고

오늘은 천지사방 은세계

각시방에 드리운 순백의 커튼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건우봉에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쑥고개길

현대아파트 바로 뒷산에 오르니

온갖 새들이 아침을 우지진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도 느긋하다.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나그네새인가?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인가?

이제 곧 부여로 가겠네.

신동엽과 김시습을 만나러...

 


매월당 만나러 가는 길

 

 

부여 만수산 무량사

떠돌던 김시습이 머물다 스러진 곳

생육신 김시습을

내일 만나서

회포나 풀어야겠다.

 

어제는 무량사 가려다가

서울로 와버렸다.

무량사 가는 길이 이리 멀 줄

매월당 선생은 귀띔도 안 해주고

봉천터널 지나 신림동 비탈길

기어기어 올라왔다.

 

내일 내설악 용대리 백담사에 가서

대청봉에서 흘러내린 웅덩이가

백 개인지 세어볼까나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고

만해 한용운을 만나고

일해 전두환을 만나고

황태 명태 동태를 만나고

내 스무 살 군영시절을 만나고

 

오늘 옛날 사람을 만났다.

금오신화를 쓴 작가

김시습의 고독을 생각했다.

세상을 등지고 산에 들어

금오신화를 쓰던 시절

걷고 또 걸으며 인생을 곱씹던 시절

매월당의 허허로움을 만났다.

 



물병 잃어버리기

 


요즘 차를 담은 물병을 가지고 다닌다.

어제 연수를 갈 때도 가지고 갔다.

오동도를 걸을 때는 손에 들고 다녔다.

유람선을 탈 때도 가지고 갔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펜션에 갈 때도 가지고 갔을 것이다.

아침에 펜션을 나오면서 확인해보니까

물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버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확인해보니까 물병이 없다.

어디로 갔을까?

물병을 담는 주머니가 예뻤는데...

그 물병과 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이 많다.




월담

 

 

아침에 교정을 뛴다.

만보걷기의 시작이다.

 

우리 학교와 남부대 경계에 울타리가 있다.

첨단중과 방통대의 경계에도 울타리가 있다.

농구장과 텃밭 위 첨단2동 둘레길

경계에도 울타리가 있다.

사방이 울타리다.

 

오늘 아침에 급식실 옆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남부대 수영장 쪽에서 담을 넘으려고

울타리로 다가오는 남학생들이 보인다.

나는 소리친다.

"정문으로! 정문으로 돌아가라!!"

학생들은 똥씹은 얼굴로 정문으로 돌아간다.

 

오늘만이 아닐 것이다.

학생들은 지키는 이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담을 넘는다.

지름길이니까.

그러나 허락받지 않은 길이다.




나눔

 

 

누가 인터폰을 누른다.

"엄마가 어디 갔어요." 문을 열자

앞집 아이가 울면서 들어온다.

아이가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데

앞집에 인기척이 있다.

그 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잠시 후에 누가 문을 두드린다.

그 아이의 엄마다.

친정에서 김치를 담갔다면서

배추김치 반포기를 접시에 담아서 건넨다.

 

 


정보와 전언

 

 

수업중에 교실 바닥이 더러워서

"교실이 더럽다"고 얘기하면

학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보는 '교실이 더럽다'이고

전언은 '청소좀 해라'이다.

정보를 듣고 전언을 알아채고 있으면서도

학생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왜?

내가 하는 게 귀찮으니까.

귀차니즘이다.

쓰레기가 보이면 줍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쓰레기를 주워라"고 말하면

"제가 안 버렸는데요."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다.

내가 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주워야 하냐는 얘기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각화동에서

 

 

향년 87세, 유족들의 표정이 밝다.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고 육신의 옷을 벗은 고인

영정 사진에서 옛날을 읽어낸다.

상주의 모친과 동생, 누나 그리고 아들과 딸들

고인의 손자들이 부지런히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접객실

빈소 영정 사진은 한없이 평화롭고

한 시대가 저무는 시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곳

 

별세 소천 귀천 돌아가시다 사망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장례식장으로 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영정 앞에서 큰절을 하고

상주와도 맞절을 하지만

그뿐 인사는 지나가고

일상의 대화로 복귀하는데...

 

오후 네 시에 집을 출발하여 저녁 일곱 시에 도착

산을 넘고 골목길을 지나고 건널목을 건넜지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나의 순례길

물만 마시며 문상하다가

홀연히 일어서서 배낭을 짊어지고

밤길을 걸어 걸어서

밤 열두 시

삼만 천 일백 걸음만에

귀소했다.




저기요

 

 

학기말 시험을 보는 시간

전광석화처럼 시험지를 나눠주는데

가운데 줄에서 "저기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험지가 부족한데요?"

 

시험지 한 장을 뒤로 전달하며

시험을 보는 중이라

크게 말하지도 못하고

"여기가 시장이여? 식당이여?"

충격을 받은 내 마음을 다독이다가

시험이 끝나고 교무실에 와서

담임에게 얘기하니까

평소에도 거시기 한 애라고 한다.

 

교실에서

저기요

여기요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첨부파일1

김성중

 

 

한새봉을 걷다가 청설모 두 마리를 만났다.

산책로 옆 감나무에서 감을 따서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렵하게 날아서는

산책로를 건너서 소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청설모는 나무타기의 달인이다.

아주 작은 가지를 밟고서도

다른 나무로 휙 날아간다.

청설모는 몸무게가 없다.

 

청설모는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간을 매우 두려워한다.

인간은 자연계의 무법자니까.

 

신작로처럼 넓어져버린

한새봉 산책로 주변에서

청설모는 힘겹게

겨울을 지나고 있다.




겨울비

 

 

함박눈을 기다리는데

겨울비가 내린다

담양호반 물 빠진 자국 위로

소한 지나 겨울비가 내린다

겨울비가 포근히 내리는 날

대지는 겨우내 목마른 혀를 축이고

그리움에 마음 졸이던 내 가슴도

어느새 따뜻한 봄날을 꿈꾼다

 

 

어제는 비 오늘은 눈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으니

이제 겨울다운 겨울인가

차들도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세상은 느림보가 되어버렸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들

한 송이 두 송이 세다가

아, 눈이 내려서 좋은 아이들 마냥

나는 벌써 눈썰매를 타고 있다

어제는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리고

오늘은 천지사방 은세계

각시방에 드리운 순백의 커튼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건우봉에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쑥고개길

현대아파트 바로 뒷산에 오르니

온갖 새들이 아침을 우지진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도 느긋하다.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나그네새인가?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인가?

이제 곧 부여로 가겠네.

신동엽과 김시습을 만나러...

 


매월당 만나러 가는 길

 

 

부여 만수산 무량사

떠돌던 김시습이 머물다 스러진 곳

생육신 김시습을

내일 만나서

회포나 풀어야겠다.

 

어제는 무량사 가려다가

서울로 와버렸다.

무량사 가는 길이 이리 멀 줄

매월당 선생은 귀띔도 안 해주고

봉천터널 지나 신림동 비탈길

기어기어 올라왔다.

 

내일 내설악 용대리 백담사에 가서

대청봉에서 흘러내린 웅덩이가

백 개인지 세어볼까나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고

만해 한용운을 만나고

일해 전두환을 만나고

황태 명태 동태를 만나고

내 스무 살 군영시절을 만나고

 

오늘 옛날 사람을 만났다.

금오신화를 쓴 작가

김시습의 고독을 생각했다.

세상을 등지고 산에 들어

금오신화를 쓰던 시절

걷고 또 걸으며 인생을 곱씹던 시절

매월당의 허허로움을 만났다.

 



물병 잃어버리기

 


요즘 차를 담은 물병을 가지고 다닌다.

어제 연수를 갈 때도 가지고 갔다.

오동도를 걸을 때는 손에 들고 다녔다.

유람선을 탈 때도 가지고 갔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펜션에 갈 때도 가지고 갔을 것이다.

아침에 펜션을 나오면서 확인해보니까

물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버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확인해보니까 물병이 없다.

어디로 갔을까?

물병을 담는 주머니가 예뻤는데...

그 물병과 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이 많다.




월담

 

 

아침에 교정을 뛴다.

만보걷기의 시작이다.

 

우리 학교와 남부대 경계에 울타리가 있다.

첨단중과 방통대의 경계에도 울타리가 있다.

농구장과 텃밭 위 첨단2동 둘레길

경계에도 울타리가 있다.

사방이 울타리다.

 

오늘 아침에 급식실 옆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남부대 수영장 쪽에서 담을 넘으려고

울타리로 다가오는 남학생들이 보인다.

나는 소리친다.

"정문으로! 정문으로 돌아가라!!"

학생들은 똥씹은 얼굴로 정문으로 돌아간다.

 

오늘만이 아닐 것이다.

학생들은 지키는 이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담을 넘는다.

지름길이니까.

그러나 허락받지 않은 길이다.




나눔

 

 

누가 인터폰을 누른다.

"엄마가 어디 갔어요." 문을 열자

앞집 아이가 울면서 들어온다.

아이가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데

앞집에 인기척이 있다.

그 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잠시 후에 누가 문을 두드린다.

그 아이의 엄마다.

친정에서 김치를 담갔다면서

배추김치 반포기를 접시에 담아서 건넨다.

 

 


정보와 전언

 

 

수업중에 교실 바닥이 더러워서

"교실이 더럽다"고 얘기하면

학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보는 '교실이 더럽다'이고

전언은 '청소좀 해라'이다.

정보를 듣고 전언을 알아채고 있으면서도

학생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왜?

내가 하는 게 귀찮으니까.

귀차니즘이다.

쓰레기가 보이면 줍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쓰레기를 주워라"고 말하면

"제가 안 버렸는데요."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다.

내가 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주워야 하냐는 얘기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각화동에서

 

 

향년 87세, 유족들의 표정이 밝다.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고 육신의 옷을 벗은 고인

영정 사진에서 옛날을 읽어낸다.

상주의 모친과 동생, 누나 그리고 아들과 딸들

고인의 손자들이 부지런히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접객실

빈소 영정 사진은 한없이 평화롭고

한 시대가 저무는 시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곳

 

별세 소천 귀천 돌아가시다 사망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장례식장으로 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영정 앞에서 큰절을 하고

상주와도 맞절을 하지만

그뿐 인사는 지나가고

일상의 대화로 복귀하는데...

 

오후 네 시에 집을 출발하여 저녁 일곱 시에 도착

산을 넘고 골목길을 지나고 건널목을 건넜지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나의 순례길

물만 마시며 문상하다가

홀연히 일어서서 배낭을 짊어지고

밤길을 걸어 걸어서

밤 열두 시

삼만 천 일백 걸음만에

귀소했다.




저기요

 

 

학기말 시험을 보는 시간

전광석화처럼 시험지를 나눠주는데

가운데 줄에서 "저기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험지가 부족한데요?"

 

시험지 한 장을 뒤로 전달하며

시험을 보는 중이라

크게 말하지도 못하고

"여기가 시장이여? 식당이여?"

충격을 받은 내 마음을 다독이다가

시험이 끝나고 교무실에 와서

담임에게 얘기하니까

평소에도 거시기 한 애라고 한다.

 

교실에서

저기요

여기요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첨부파일1

'추월산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10월 토론작품  (0) 2019.01.01
가난한 장남 외 21편  (0) 2018.10.06
2017 금시 송년시  (0) 2017.12.09
9월의 시  (0) 2017.10.22
10월의 시  (0) 2017.10.22
posted by 추월산
:
추월산의 시 2017. 12. 9. 07:36
통합 게시판

[김성중 12월 토론 작품]:종로에서 낙짓집 찾기 외 17편



단오작성시간2017.12.07  조회수4

0


 김성중-금시-2017-송년회.hwp



1. 종로에서 낙짓집 찾기

 

어제 저녁에 종로1가 르메이에르 스포츠센터

건물 2층에 있는 낙짓집을 찾아서 헤맸다.

교보문고 배움에서 열린 북콘서트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무리 여기저기 찾아봐도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안 보인다.

엘리베이터는 5층부터 서고

외부 계단은 막혀 있다.

서울 여자들과 함께 가는데

그녀들도 2층으로 가는 길을 못 찾는다.

다시 처음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곳으로

돌아가서 눈을 부릅뜨고 보니까

계단으로 올라가는 문이 보인다.

숨을 헐떡이며 낙짓집을 찾아갔더니

일행은 벌써 좌정해 있다.

매운 낙지에 밥을 비벼먹으며

소주 말고 물만 마시다가

화장실에 가면서 보니까

대로변에 에스컬레이터가 떡 하니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2. 병뚜껑 돌리기

 

유리병에 담겨 있는 죽염을

작은 플라스틱병에 덜고 나서

유리병 뚜껑을 돌려서 닫는데,

아무리 돌려도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뚜껑을 돌리고 돌려도 닫히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플라스틱병 뚜껑을 돌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 짝이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

너와 나도 그렇다.

 

3. 신림역 회군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출판기념 토크쇼가 끝난 뒤에

매운 낙지에 찬물만 들이켜다가

신림동 애들 집으로 가려고

종각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탔다.

신도림역에서 환승하여 신림역으로 가다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있다가

급히 내리려고 보니 봉천역이다.

음악을 듣다가 신림역을 놓쳐버린 것이다.

다시 신림역으로 돌아가서

신림역 4번 출구를 나와 관악5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인 신림현대아파트 입구에서 내렸다.

조금 걸어서 내려오니 애들이 사는 골목길이다.

아는 얼굴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제 안심이다.



4. 한가한 살구나무

 

늦가을 비바람에

살구나무 이파리가 모두 떨어졌다.

이제 살구나무는 겨울잠을 자리라.

 

살구나무는 지금 한가하다.

근심 걱정 다 털어버리고

교무실을 올려다보며 하품을 하고 있다.

 

지금 학생들은 전국연합학력평가

탐구영역 시험지를 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교무실에서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를 읽고 있다.

기말고사 출제도 해야 한다.

 

살구나무는 한가하다.



5. 월계동 골목길

 

 

임방울대로 아래쪽 월계동엔 다세대 주택이 많다.

5층짜리 아파트가 월계동 장고분 근처에 있고

대부분의 집들이 다세대주택이다.

규모가 큰 건물은 학교다.

월계초등학교,숭덕고등학교,천곡중학교,

산월초등학교,첨단중학교,첨단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교,남부대학교,광주전자공업고등학교

무양서원도 있다.

 

주택이 많으니 골목길도 많다.

골목길을 다 둘러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학교 주변이야 늘 보아서 익숙하지만

약간만 벗어나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학교 주변을 익힐 때쯤이면

어김없이 바람이 분다.

동남풍이 분다.



6. 복판과 가장자리

 

 

가운데, 한가운데, 복판, 한복판, 가, 변두리,

가장자리, 중심, 중앙, 핵심, 변방, 지방, 변경

처음, 중간, 끝, 시작, 종말, 마무리, 시초, 태초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처음과 끝이 똑 같아야 한다.

시종여일.

용두사미는 사절한다.

끝이 좋아야 한다.

 

냄비에 물을 담아 끓이면 어디부터 끓는가?

복판인가, 가장자리인가?

 

나무의 뿌리는 시작인가?

우듬지는 끝인가?

나뭇껍질은 가장자리인가?

 

나의 피부가 가장자리라면 나의 중심은 어디인가?

심장, 간, 뇌인가?

아니면 피인가?

나의 한복판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지구, 우주, 은하

중심은 어디이고, 무엇인가?

 

내 사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내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7. 선생님, 처음 봅니다

 

 

오늘 3교시에 수업을 끝낼 무렵 한 학생이 나를 보며

"선생님, 처음 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내가 2학기에 수업을 하는 학급이 매우 많다.

그래서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얼굴을 처음 보다니...

 

이 학생은 수업시간마다 잠을 잔 모양이다.

그렇게 잠을 자고도 또 잠을 자는

학생을 보면 기이하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는 참 기이한 곳이다.



8. 2차 후원금 중단

 

 

은행에 가서 여름에 이어서, 늦가을에,

2차로 후원금 자동이체(CMS) 여러 건을 해지하였다.

융자받은 학자금을 갚아야 한다.

이제는 마음밖에 없다.

세월이 빨리 흘러가기를 바란다.

 

내가 해직교사였을 때

나에게 후원금을 전해준

금호고 해직동료들에게 늦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1989년부터 1994년 2월까지

후원금을 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9. 전공체험학습과 자판기

 

 

첨단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 40명이 광주보건대학교 응급구조학과와 물리치료학과에서 전공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캠퍼스를 이리저리 걷다가 다윗관에서 커피를 한 잔 뽑으려고 1,000원짜리 지폐를 투입하고 버튼을 눌렀습니다. 700원이 남아서 반환 손잡이를 돌렸지만 동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무차를 눌렀습니다. 그래도 400원이 남길래 코코아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100원짜리 동전이 튀어나왔습니다. 갑자기 커피, 코코아, 율무차를 연달아 마시게 되었습니다.

 

10. 만남과 떠남

 

만나면 떠나야 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물은 썩는다.

바람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저녁에 만난 친구는 밤에 헤어져야 한다.

아침에 학교에 온 학생들은 방과후에 하교해야 한다.

나무나 풀은 뿌리를 내리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식물은 씨앗을 바람에 날리거나 물에 띄우거나

동물의 먹이가 되어 이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바람처럼 떠도는 존재다.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다.

 

11. 슬픈 쪽지

 

학생들이 써낸 쪽지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 모두 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쪽지는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어떤 쪽지는 나를 슬프게 한다.

 

오늘 어떤 쪽지가 나를 슬프게 했다.

수업시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내용의 쪽지는 나를 슬프게 한다.

수업 내용이 없다는 얘기다.

아니 이럴 수가!

 

수업이 재미가 없다는 쪽지도

나를 슬프게 한다.

어떻게 해야 수업이 재밌을까?

 

그래도 나는 쪽지를 사랑한다.

 

 

12. 교장선생님


오늘 아침에 교정을 산책하다가 교문 쪽으로 가니까 이름을 모르는 여학생들이 "교장선생님!"하고 부른다. 나를 부르는 소리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농구장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여학생들이 나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날마다 만보걷기를 하는 내가 학교 여기저기를 점검하고 다니는 교장선생님처럼 보였나 보다. 아니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피우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리하여 나를 놀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처럼 걷고 걸을 뿐이다. 걷다가 담배꽁초를 보면 줍고 그럴 뿐이다. 나는 걷자 선생이다. 교정 선생이다.



13. 옷에 몸 맞추기

 

아침에 패딩을 입는데 팔이 답답했다. 나는 못 입겠다고 했다. 아내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작년에도 입은 옷이었다. 작년에도 답답했었다. 팔이 꽉 끼어서 답답한 옷을 판 의류업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홈쇼핑에서 구매했다고 한다.

 

내가 옷에 몸을 맞추어 입을 수는 없다. 옷을 입는 순간 숨이 가빠오는데 날렵하게 보인다고 그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패딩을 맞출 수도 없고.

 

소양강변 12사단 훈련소에서 288밀리미터 훈련화를 신고 훈련을 받다가 발뒤꿈치가 홀라당 까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1981년) 훈련화 하나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던 부패한 군대가 수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를 분노하게 한다.

 

나는 옷에 내 몸을 맞출 수 없다.



14. 서울대 앞 큰 길에서

 

나는 그냥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떤 여인이 강아지를 끌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강아지 인형이었다.

그 여인은 하이힐을 손에 들고 있었고

신발을 신지 않았다.

마침 근처 화원의 개는 인형개를 따라가려 하고

화원 주인은 개를 단속하느라 정신이 없고

나도 긴장하면서 흥미롭게 지켜보는데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난 자리에

금발 가발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여자였을까?

 

15. 안갯길

 

가을이 한창인데

진한 안개가

세상을 다 덮고 있었다.

안개 낀 출근길

앞 차 꽁무니를 따라 가면서

앞차가 서버린다면 어쩌나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용두동 사거리에서 승용차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서 있고

경찰관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영산강 첨단대교를 건너서

임방울대로를 힘겹게 달리면서

월계초 가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2017년 10월 26일이었다.

 


16. 내 몸

 

 

몸은 쇳덩이가 아니다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용불용설을 믿었다

건강검진결과는 경고등

핏속에 기름기가 많고

혈압이 약간 높고

음주 적색경고 발령

금주는 필수

유근피차가 내 생명수

마늘죽염환은

장의 노폐물 가스를 빼주고

 

내 코는 비염을 달고

잠을 잘 때 숨쉬기도 곤란한데

내 몸은 쇳덩이가 아니야

혹사시켜서 미안해

내 몸

 

 

17. 얍삽하다

 

 

얄밉게도 재빠르게 이익을 챙기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얍삽한 사람이라고 한다. 좋은 말은 아니지만 경쟁사회에서는 비난만 할 것도 아니다.

 

-수능감독관 추천에서 2학년실 선생님들이 원하는 감독관을 선점했다고 했을 때 내가 한 말

 

-오늘 분회모임에 1학년실 선생님들이 참석하지 않았을 때 내가 한 말

 

-인생은 얍삽할 때가 있다

 

-나 중심으로 세상을 산다. 정말 그래야 한다. 내가 살아야 너를 보살필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야 한다. 너와 더불어.

 

*얍삽하다:사람이 얕은 꾀를 쓰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려는 태도가 있다-국어사전

 

 

 

18. 몬네 몬네

 

 

이 걸 할까

저 걸 할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확 저질러 버릴까

살짝 해 버릴까

 

 

 


첨부파일2

댓글알림 설정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쓰기댓글쓰기

댓글 새로고침

이전아버지를 만나다 외 1편(1)다음[김성중 10월 토론작품] : 염포 외 11편

[김성중 12월 토론 작품]:종로에서 낙짓집 찾기 외 17편



단오작성시간2017.12.07  조회수4

0


 김성중-금시-2017-송년회.hwp



1. 종로에서 낙짓집 찾기

 

어제 저녁에 종로1가 르메이에르 스포츠센터

건물 2층에 있는 낙짓집을 찾아서 헤맸다.

교보문고 배움에서 열린 북콘서트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무리 여기저기 찾아봐도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안 보인다.

엘리베이터는 5층부터 서고

외부 계단은 막혀 있다.

서울 여자들과 함께 가는데

그녀들도 2층으로 가는 길을 못 찾는다.

다시 처음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곳으로

돌아가서 눈을 부릅뜨고 보니까

계단으로 올라가는 문이 보인다.

숨을 헐떡이며 낙짓집을 찾아갔더니

일행은 벌써 좌정해 있다.

매운 낙지에 밥을 비벼먹으며

소주 말고 물만 마시다가

화장실에 가면서 보니까

대로변에 에스컬레이터가 떡 하니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2. 병뚜껑 돌리기

 

유리병에 담겨 있는 죽염을

작은 플라스틱병에 덜고 나서

유리병 뚜껑을 돌려서 닫는데,

아무리 돌려도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뚜껑을 돌리고 돌려도 닫히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플라스틱병 뚜껑을 돌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 짝이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

너와 나도 그렇다.

 

3. 신림역 회군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출판기념 토크쇼가 끝난 뒤에

매운 낙지에 찬물만 들이켜다가

신림동 애들 집으로 가려고

종각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탔다.

신도림역에서 환승하여 신림역으로 가다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있다가

급히 내리려고 보니 봉천역이다.

음악을 듣다가 신림역을 놓쳐버린 것이다.

다시 신림역으로 돌아가서

신림역 4번 출구를 나와 관악5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인 신림현대아파트 입구에서 내렸다.

조금 걸어서 내려오니 애들이 사는 골목길이다.

아는 얼굴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제 안심이다.



4. 한가한 살구나무

 

늦가을 비바람에

살구나무 이파리가 모두 떨어졌다.

이제 살구나무는 겨울잠을 자리라.

 

살구나무는 지금 한가하다.

근심 걱정 다 털어버리고

교무실을 올려다보며 하품을 하고 있다.

 

지금 학생들은 전국연합학력평가

탐구영역 시험지를 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교무실에서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를 읽고 있다.

기말고사 출제도 해야 한다.

 

살구나무는 한가하다.



5. 월계동 골목길

 

 

임방울대로 아래쪽 월계동엔 다세대 주택이 많다.

5층짜리 아파트가 월계동 장고분 근처에 있고

대부분의 집들이 다세대주택이다.

규모가 큰 건물은 학교다.

월계초등학교,숭덕고등학교,천곡중학교,

산월초등학교,첨단중학교,첨단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교,남부대학교,광주전자공업고등학교

무양서원도 있다.

 

주택이 많으니 골목길도 많다.

골목길을 다 둘러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학교 주변이야 늘 보아서 익숙하지만

약간만 벗어나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학교 주변을 익힐 때쯤이면

어김없이 바람이 분다.

동남풍이 분다.



6. 복판과 가장자리

 

 

가운데, 한가운데, 복판, 한복판, 가, 변두리,

가장자리, 중심, 중앙, 핵심, 변방, 지방, 변경

처음, 중간, 끝, 시작, 종말, 마무리, 시초, 태초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처음과 끝이 똑 같아야 한다.

시종여일.

용두사미는 사절한다.

끝이 좋아야 한다.

 

냄비에 물을 담아 끓이면 어디부터 끓는가?

복판인가, 가장자리인가?

 

나무의 뿌리는 시작인가?

우듬지는 끝인가?

나뭇껍질은 가장자리인가?

 

나의 피부가 가장자리라면 나의 중심은 어디인가?

심장, 간, 뇌인가?

아니면 피인가?

나의 한복판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지구, 우주, 은하

중심은 어디이고, 무엇인가?

 

내 사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내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7. 선생님, 처음 봅니다

 

 

오늘 3교시에 수업을 끝낼 무렵 한 학생이 나를 보며

"선생님, 처음 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내가 2학기에 수업을 하는 학급이 매우 많다.

그래서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얼굴을 처음 보다니...

 

이 학생은 수업시간마다 잠을 잔 모양이다.

그렇게 잠을 자고도 또 잠을 자는

학생을 보면 기이하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는 참 기이한 곳이다.



8. 2차 후원금 중단

 

 

은행에 가서 여름에 이어서, 늦가을에,

2차로 후원금 자동이체(CMS) 여러 건을 해지하였다.

융자받은 학자금을 갚아야 한다.

이제는 마음밖에 없다.

세월이 빨리 흘러가기를 바란다.

 

내가 해직교사였을 때

나에게 후원금을 전해준

금호고 해직동료들에게 늦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1989년부터 1994년 2월까지

후원금을 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9. 전공체험학습과 자판기

 

 

첨단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 40명이 광주보건대학교 응급구조학과와 물리치료학과에서 전공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캠퍼스를 이리저리 걷다가 다윗관에서 커피를 한 잔 뽑으려고 1,000원짜리 지폐를 투입하고 버튼을 눌렀습니다. 700원이 남아서 반환 손잡이를 돌렸지만 동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무차를 눌렀습니다. 그래도 400원이 남길래 코코아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100원짜리 동전이 튀어나왔습니다. 갑자기 커피, 코코아, 율무차를 연달아 마시게 되었습니다.

 

10. 만남과 떠남

 

만나면 떠나야 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물은 썩는다.

바람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저녁에 만난 친구는 밤에 헤어져야 한다.

아침에 학교에 온 학생들은 방과후에 하교해야 한다.

나무나 풀은 뿌리를 내리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식물은 씨앗을 바람에 날리거나 물에 띄우거나

동물의 먹이가 되어 이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바람처럼 떠도는 존재다.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다.

 

11. 슬픈 쪽지

 

학생들이 써낸 쪽지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 모두 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쪽지는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어떤 쪽지는 나를 슬프게 한다.

 

오늘 어떤 쪽지가 나를 슬프게 했다.

수업시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내용의 쪽지는 나를 슬프게 한다.

수업 내용이 없다는 얘기다.

아니 이럴 수가!

 

수업이 재미가 없다는 쪽지도

나를 슬프게 한다.

어떻게 해야 수업이 재밌을까?

 

그래도 나는 쪽지를 사랑한다.

 

 

12. 교장선생님


오늘 아침에 교정을 산책하다가 교문 쪽으로 가니까 이름을 모르는 여학생들이 "교장선생님!"하고 부른다. 나를 부르는 소리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농구장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여학생들이 나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날마다 만보걷기를 하는 내가 학교 여기저기를 점검하고 다니는 교장선생님처럼 보였나 보다. 아니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피우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리하여 나를 놀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처럼 걷고 걸을 뿐이다. 걷다가 담배꽁초를 보면 줍고 그럴 뿐이다. 나는 걷자 선생이다. 교정 선생이다.



13. 옷에 몸 맞추기

 

아침에 패딩을 입는데 팔이 답답했다. 나는 못 입겠다고 했다. 아내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작년에도 입은 옷이었다. 작년에도 답답했었다. 팔이 꽉 끼어서 답답한 옷을 판 의류업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홈쇼핑에서 구매했다고 한다.

 

내가 옷에 몸을 맞추어 입을 수는 없다. 옷을 입는 순간 숨이 가빠오는데 날렵하게 보인다고 그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패딩을 맞출 수도 없고.

 

소양강변 12사단 훈련소에서 288밀리미터 훈련화를 신고 훈련을 받다가 발뒤꿈치가 홀라당 까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1981년) 훈련화 하나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던 부패한 군대가 수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를 분노하게 한다.

 

나는 옷에 내 몸을 맞출 수 없다.



14. 서울대 앞 큰 길에서

 

나는 그냥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떤 여인이 강아지를 끌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강아지 인형이었다.

그 여인은 하이힐을 손에 들고 있었고

신발을 신지 않았다.

마침 근처 화원의 개는 인형개를 따라가려 하고

화원 주인은 개를 단속하느라 정신이 없고

나도 긴장하면서 흥미롭게 지켜보는데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난 자리에

금발 가발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여자였을까?

 

15. 안갯길

 

가을이 한창인데

진한 안개가

세상을 다 덮고 있었다.

안개 낀 출근길

앞 차 꽁무니를 따라 가면서

앞차가 서버린다면 어쩌나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용두동 사거리에서 승용차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서 있고

경찰관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영산강 첨단대교를 건너서

임방울대로를 힘겹게 달리면서

월계초 가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2017년 10월 26일이었다.

 


16. 내 몸

 

 

몸은 쇳덩이가 아니다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용불용설을 믿었다

건강검진결과는 경고등

핏속에 기름기가 많고

혈압이 약간 높고

음주 적색경고 발령

금주는 필수

유근피차가 내 생명수

마늘죽염환은

장의 노폐물 가스를 빼주고

 

내 코는 비염을 달고

잠을 잘 때 숨쉬기도 곤란한데

내 몸은 쇳덩이가 아니야

혹사시켜서 미안해

내 몸

 

 

17. 얍삽하다

 

 

얄밉게도 재빠르게 이익을 챙기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얍삽한 사람이라고 한다. 좋은 말은 아니지만 경쟁사회에서는 비난만 할 것도 아니다.

 

-수능감독관 추천에서 2학년실 선생님들이 원하는 감독관을 선점했다고 했을 때 내가 한 말

 

-오늘 분회모임에 1학년실 선생님들이 참석하지 않았을 때 내가 한 말

 

-인생은 얍삽할 때가 있다

 

-나 중심으로 세상을 산다. 정말 그래야 한다. 내가 살아야 너를 보살필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야 한다. 너와 더불어.

 

*얍삽하다:사람이 얕은 꾀를 쓰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려는 태도가 있다-국어사전

 

 

 

18. 몬네 몬네

 

 

이 걸 할까

저 걸 할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확 저질러 버릴까

살짝 해 버릴까

 

 

 


첨부파일2

댓글알림 설정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쓰기댓글쓰기

댓글 새로고침

이전아버지를 만나다 외 1편(1)다음[김성중 10월 토론작품] : 염포 외 11편

'추월산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한 장남 외 21편  (0) 2018.10.06
2018 금시 겨울연수  (0) 2018.01.12
9월의 시  (0) 2017.10.22
10월의 시  (0) 2017.10.22
7월의 시  (0) 2017.08.01
posted by 추월산
:
추월산의 시 2017. 10. 22. 22:40
통합 게시판

[김성중 9월 토론작품] : 사드 외 12편



단오작성시간2017.09.22  조회수2

0

사드(THAAD) 외 12편

김성중

 


소성리 사드는

누구를 위한 사드인가?

중국은 왜 사드를 반대하는가?

미국은 왜 사드에 집착하는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어리석고 어리석구나

한반도는 기어이 불바다가 되고야 마는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

슬프다, 한반도여.

남과 북 코리아여.

대양으로 뻗어나갈 한반도여,

대륙으로 달려나갈 한반도여,

남도 북도 섬에 갇혔구나.

 

수수만년 이어온 금수강산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치면

불꽃이 튄다.

빌어먹을 핵이여,

인류 절멸을 불러올 불덩이여.

 

아,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어젯밤 꿈

 

교장실에서 나를 부른다.

어떤 학생이 내 수업을 녹음해서

나를 고발했다고 한다.

학부모가 학교로 오고 있다고 한다.

나는 녹음내용을 들어본다.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답답했다.

 

30년 전에 친일문학이 논란이 되었을 때

서정주의 시를 읽기만 하고 넘어갔었다.

그때 수업내용 때문에

학부모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교감선생의 얘기를 들었는데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결점


언제부터인가 결점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무결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완벽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비루한가요.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모멸스런 삶인가요.

그러나 현실에 단단히 붙들려 있더라도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펼쳐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하겠지요.

나의 비루함을 떨치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완벽한 인간을 꿈꿉니다.

허허실실에 달뜬 사람으로...

 

 

시를 쓴다는 것

 

언제부턴가 시를 쓰고 싶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가르치면서 나는 왜 시를 못 쓰는가를 고민했다. 나는 시를 쓰려고 몸부림쳤고 최고의 시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 시를 본 어느 시인은 내 시의 감정의 과잉을 질타했다. 쓸데없이 울고 있다고 했다. ‘얼어버린 파초’에 대해서 쓴 시였다.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시를 쓰는 게 두려워졌다. 그러나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기운을 차리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합평회에서 깨져도 또 시를 발표했다. 결국 나는 내 나름의 시를 쓰게 되었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

 

시는 내 삶의 전부는 아니어도

내 삶의 중심

 

빛나는 한 구절을 얻으려고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생기다만 알을 꺼내기도 하고

의욕만 앞세워 균형을 잃기도 하지만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내 존재를 증명하는 일

 


셀카놀이


담양 관방제림 푸조나무 아래에서

셀카를 찍고 또 찍는다.

멋진 셀카사진을 얻을 때까지

나의 셀카놀이는 계속 될 것이다.

나는 호모 루덴스다.

 

수업시간에 셀카놀이를 하면서 몸을 느낀다.

지루한 수업에 돌연 활기가 넘친다.

학생들을 배경으로 넣지 않아도 좋다.

얼굴을 가리는 학생들은 셀카에서 빠져라.

나는 호모 루덴스다.

 

“몸이 철학을 말한다”는 함께하는 인문학

강의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나는 셀카를 찍는다.

몸을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다시 호모 루덴스다.

 

 

포체리카


쇠비름과

쇠비름속

포체리카를

또 본다.

학교 정문 바로 지나서

두 번째 가로수 밑둥에서

딱 한 송이가 피었다.

예쁘다.

외롭다.

황홀하다.

 

 

격포 가는 길

 

곰소 발효젓갈 축제 휙 둘러보고

곰소 다리 건너기 전 휴게소에서

전어회 몇 점 된장에 찍어 먹고

곰소 바다 구비구비 돌고 돌아서

모항에 잠시 들렀다가

닭이봉 격포로 달려간다.

채석강에 가서

예전에 읽다 만 책이나 읽으며

난세를 건널 묘안을 찿으렸더니

눈부신 햇살에 눈이 부셔라.

책은 다음에 읽기로 하고

격포 바다만 실컷 보는구나.

 

 

길은 길을 따라 이어지고


말바우 시장에서 동지죽을 먹고는 담양에 볼 일을 보러 갔다가 추월산으로 가는 국도 29호선 확장공사 현장이 궁금해서 죽녹원 지나 덕구재를 넘어서 삼만리쪽으로 달렸다. 올해 안에는 길이 말끔하게 정리가 될 것 같아 보인다. 삼만리 농공단지를 지나서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시암골길을 타고 추월산을 바라보며 용면 쪽으로 달렸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낯설었다. 내 고향이 용면인데 처음 가는 길이라니 쑥스러웠다. 고개를 넘고 논길을 지나자 두장리가 나온다. 마을 중심지에 당산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내 동창 허씨들을 생각하다가 조금 진행하니 내가 4학년까지 다녔던 용면초등학교가 보인다. 학교 옆을 지나서 와산마을을 들러서 면소재지인 추성리를 지나서 박실과 매월과 통천 마을을 지나서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나서 담양읍 운교리로 달린다. 양각리를 지나서 담양대나무박물관 옆길을 달려 강쟁리 황금들판에서 차를 세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강쟁리 마을에 들러서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집을 잠시 둘러보고 일곡동으로 돌아왔다. 길은 길로 통한다.

 

 

거미집


날마다 만나는 거미줄이 사라졌다.

내가 드나드는 아파트 출입구 쪽

감시카메라봉과 철쭉에 걸려 있던

거미줄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걷어냈을 것이다.

거미는 졸지에 삶터를 잃어버렸다.


오늘 아침 거미가 카메라 감시봉에

새로 거미집을 짓고 있었다.

거미는 내 눈치를 보지도 않고

건축노동에 여념이 없었다.

 

주목나무에도 느티나무에도

배롱나무에도 철쭉나무에도

거미의 왕국이 열려 있다.

 

 

우주


우주에 대해서 생각하는 밤이다.

우주는 도대체 얼마나 클까?

나의 상상력은 한없이 빈곤하다.

한반도를 종단한 적이 없는 내 몸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가늠하지 못 한다.

나의 세계는 한반도 남쪽섬에 갇혀 있다.

은하에 대하여, 성단에 대하여,

블랙홀과 웜홀에 대하여 생각은 하지만

그것들에 대하여 감을 잡지는 못 한다.

예전에 내가 몰던 차번호가 9990번,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는 밤이다.

 

 

 조용하다

 

사드가 배치되어도

미사일이 날아다녀도

내 일이 아니라는 듯

학교는 조용하다.

공부하고 축구하고 간식 먹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고

불금을 맞이하는 즐거움만 가득하다.

 

세상이 그렇게 굴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인지

아니면 나그네인지

그냥 흔들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인지.

 

 

 김성줏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라

별명을 불러도 좋고

호칭을 불러도 좋고

그냥 불러만 주어도 좋아라.

내 이름은 김성중

별 성(星)자에 인변에 가운데 중(仲)

이름만 보면 별 가운데 별

아주 훌륭한 이름 같은데

내 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

영화 <공범자들> 엔딩크레딧이 김성줏으로 바꾸었네.

종영자막에 나오는 김성줏은 누구 이름일까

김성줏이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이 있을까

내 이름은 김성중

뉴스타파 후원회원

 

 

 예천 공설운동장

 

 1981년 11월 17일

전라도 병력 중에서 나 혼자만

경상북도 청춘들과

여기에서 집결했다가

군용열차를 타고 청량리를 지나서

한밤중에 춘천 103보충대로 갔었지.

 

 2학기 소설 발표를 앞두고

소설가를 꿈꾸며 들떠있었는데

반제반파쇼데모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어처구니없이 강제휴학당하고

늦가을에 쓸쓸히

 

여름 시인학교 하굣길에

36년 만에 우연히 여기에 왔다.

머리를 빡빡 밀었던 시절의 기억이

아슴푸레 떠오르면서

가슴 한 편이 서늘해진다.

 

 

 


댓글알림 설정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쓰기댓글쓰기

댓글 새로고침

이전시 동상이몽(1)다음최승권 2017 9월 토론작품 : 추일서정

[김성중 9월 토론작품] : 사드 외 12편



단오작성시간2017.09.22  조회수2

0

사드(THAAD) 외 12편

김성중

 


소성리 사드는

누구를 위한 사드인가?

중국은 왜 사드를 반대하는가?

미국은 왜 사드에 집착하는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어리석고 어리석구나

한반도는 기어이 불바다가 되고야 마는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

슬프다, 한반도여.

남과 북 코리아여.

대양으로 뻗어나갈 한반도여,

대륙으로 달려나갈 한반도여,

남도 북도 섬에 갇혔구나.

 

수수만년 이어온 금수강산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치면

불꽃이 튄다.

빌어먹을 핵이여,

인류 절멸을 불러올 불덩이여.

 

아,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어젯밤 꿈

 

교장실에서 나를 부른다.

어떤 학생이 내 수업을 녹음해서

나를 고발했다고 한다.

학부모가 학교로 오고 있다고 한다.

나는 녹음내용을 들어본다.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답답했다.

 

30년 전에 친일문학이 논란이 되었을 때

서정주의 시를 읽기만 하고 넘어갔었다.

그때 수업내용 때문에

학부모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교감선생의 얘기를 들었는데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결점


언제부터인가 결점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무결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완벽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비루한가요.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모멸스런 삶인가요.

그러나 현실에 단단히 붙들려 있더라도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펼쳐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하겠지요.

나의 비루함을 떨치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완벽한 인간을 꿈꿉니다.

허허실실에 달뜬 사람으로...

 

 

시를 쓴다는 것

 

언제부턴가 시를 쓰고 싶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가르치면서 나는 왜 시를 못 쓰는가를 고민했다. 나는 시를 쓰려고 몸부림쳤고 최고의 시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 시를 본 어느 시인은 내 시의 감정의 과잉을 질타했다. 쓸데없이 울고 있다고 했다. ‘얼어버린 파초’에 대해서 쓴 시였다.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시를 쓰는 게 두려워졌다. 그러나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기운을 차리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합평회에서 깨져도 또 시를 발표했다. 결국 나는 내 나름의 시를 쓰게 되었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

 

시는 내 삶의 전부는 아니어도

내 삶의 중심

 

빛나는 한 구절을 얻으려고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생기다만 알을 꺼내기도 하고

의욕만 앞세워 균형을 잃기도 하지만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내 존재를 증명하는 일

 


셀카놀이


담양 관방제림 푸조나무 아래에서

셀카를 찍고 또 찍는다.

멋진 셀카사진을 얻을 때까지

나의 셀카놀이는 계속 될 것이다.

나는 호모 루덴스다.

 

수업시간에 셀카놀이를 하면서 몸을 느낀다.

지루한 수업에 돌연 활기가 넘친다.

학생들을 배경으로 넣지 않아도 좋다.

얼굴을 가리는 학생들은 셀카에서 빠져라.

나는 호모 루덴스다.

 

“몸이 철학을 말한다”는 함께하는 인문학

강의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나는 셀카를 찍는다.

몸을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다시 호모 루덴스다.

 

 

포체리카


쇠비름과

쇠비름속

포체리카를

또 본다.

학교 정문 바로 지나서

두 번째 가로수 밑둥에서

딱 한 송이가 피었다.

예쁘다.

외롭다.

황홀하다.

 

 

격포 가는 길

 

곰소 발효젓갈 축제 휙 둘러보고

곰소 다리 건너기 전 휴게소에서

전어회 몇 점 된장에 찍어 먹고

곰소 바다 구비구비 돌고 돌아서

모항에 잠시 들렀다가

닭이봉 격포로 달려간다.

채석강에 가서

예전에 읽다 만 책이나 읽으며

난세를 건널 묘안을 찿으렸더니

눈부신 햇살에 눈이 부셔라.

책은 다음에 읽기로 하고

격포 바다만 실컷 보는구나.

 

 

길은 길을 따라 이어지고


말바우 시장에서 동지죽을 먹고는 담양에 볼 일을 보러 갔다가 추월산으로 가는 국도 29호선 확장공사 현장이 궁금해서 죽녹원 지나 덕구재를 넘어서 삼만리쪽으로 달렸다. 올해 안에는 길이 말끔하게 정리가 될 것 같아 보인다. 삼만리 농공단지를 지나서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시암골길을 타고 추월산을 바라보며 용면 쪽으로 달렸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낯설었다. 내 고향이 용면인데 처음 가는 길이라니 쑥스러웠다. 고개를 넘고 논길을 지나자 두장리가 나온다. 마을 중심지에 당산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내 동창 허씨들을 생각하다가 조금 진행하니 내가 4학년까지 다녔던 용면초등학교가 보인다. 학교 옆을 지나서 와산마을을 들러서 면소재지인 추성리를 지나서 박실과 매월과 통천 마을을 지나서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나서 담양읍 운교리로 달린다. 양각리를 지나서 담양대나무박물관 옆길을 달려 강쟁리 황금들판에서 차를 세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강쟁리 마을에 들러서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집을 잠시 둘러보고 일곡동으로 돌아왔다. 길은 길로 통한다.

 

 

거미집


날마다 만나는 거미줄이 사라졌다.

내가 드나드는 아파트 출입구 쪽

감시카메라봉과 철쭉에 걸려 있던

거미줄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걷어냈을 것이다.

거미는 졸지에 삶터를 잃어버렸다.


오늘 아침 거미가 카메라 감시봉에

새로 거미집을 짓고 있었다.

거미는 내 눈치를 보지도 않고

건축노동에 여념이 없었다.

 

주목나무에도 느티나무에도

배롱나무에도 철쭉나무에도

거미의 왕국이 열려 있다.

 

 

우주


우주에 대해서 생각하는 밤이다.

우주는 도대체 얼마나 클까?

나의 상상력은 한없이 빈곤하다.

한반도를 종단한 적이 없는 내 몸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가늠하지 못 한다.

나의 세계는 한반도 남쪽섬에 갇혀 있다.

은하에 대하여, 성단에 대하여,

블랙홀과 웜홀에 대하여 생각은 하지만

그것들에 대하여 감을 잡지는 못 한다.

예전에 내가 몰던 차번호가 9990번,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는 밤이다.

 

 

 조용하다

 

사드가 배치되어도

미사일이 날아다녀도

내 일이 아니라는 듯

학교는 조용하다.

공부하고 축구하고 간식 먹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고

불금을 맞이하는 즐거움만 가득하다.

 

세상이 그렇게 굴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인지

아니면 나그네인지

그냥 흔들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인지.

 

 

 김성줏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라

별명을 불러도 좋고

호칭을 불러도 좋고

그냥 불러만 주어도 좋아라.

내 이름은 김성중

별 성(星)자에 인변에 가운데 중(仲)

이름만 보면 별 가운데 별

아주 훌륭한 이름 같은데

내 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

영화 <공범자들> 엔딩크레딧이 김성줏으로 바꾸었네.

종영자막에 나오는 김성줏은 누구 이름일까

김성줏이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이 있을까

내 이름은 김성중

뉴스타파 후원회원

 

 

 예천 공설운동장

 

 1981년 11월 17일

전라도 병력 중에서 나 혼자만

경상북도 청춘들과

여기에서 집결했다가

군용열차를 타고 청량리를 지나서

한밤중에 춘천 103보충대로 갔었지.

 

 2학기 소설 발표를 앞두고

소설가를 꿈꾸며 들떠있었는데

반제반파쇼데모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어처구니없이 강제휴학당하고

늦가을에 쓸쓸히

 

여름 시인학교 하굣길에

36년 만에 우연히 여기에 왔다.

머리를 빡빡 밀었던 시절의 기억이

아슴푸레 떠오르면서

가슴 한 편이 서늘해진다.

 

 

 


댓글알림 설정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쓰기댓글쓰기

댓글 새로고침

이전시 동상이몽(1)다음최승권 2017 9월 토론작품 : 추일서정

'추월산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금시 겨울연수  (0) 2018.01.12
2017 금시 송년시  (0) 2017.12.09
10월의 시  (0) 2017.10.22
7월의 시  (0) 2017.08.01
우리 동네에서  (0) 2014.10.29
posted by 추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