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어요'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1.09.29 :: 망제, 두견, 귀촉도 전설
  2. 2010.11.26 :: 샹송 가수 에디뜨 삐아쁘
  3. 2010.04.02 :: 존 레논의 이매진
  4. 2010.01.22 ::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2
알고 싶어요 2011. 9. 29. 10:15

먼 옛날. 중국대륙의

촉(蜀:지금의 四川省)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느 날.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밑을 흐르는 강가에 와 보니,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는 기이하게 생각되어

그를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물으니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자, 망제는

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별령에게 집과 전답을 주고,

그로 하여금 정승을 삼아, 나라의 모든

일을 맡기었다.

망제는 나이도

어릴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본 별령은

은연중 불충한 마음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 모두 매수하여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고 전권을 휘둘렀다.

그때에 별령에게는

얼굴이 천하의 절색인 딸 하나가 있었는데,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이에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모두 장인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앉아

나라에 관한 정사는 전연 관여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로

나날을 보내는 사이에

망제의 장인인 별령은

자기의 마음과 뜻대로 정사를 주무르다 못해 역모를 꾀하여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망제는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후일 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라고도 하고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는

귀촉도, 망제혼, 소쩍새, 불여귀,

자규 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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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알고 싶어요 2010. 11. 26. 16:17

에디뜨 삐아쁘(Edith Piaf)

1915년 12월19일에 비련(悲戀)의 여가수 에디뜨 삐아쁘가 태어났다.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의 3류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출생부터 비련으로 시작됐다.

무료 자선병원으로 달려가다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벨베이르 72번가 길복판에서 순찰경찰관이 받아 세상에 태어난 에디뜨 삐아쁘, 그녀는 철저히 거리의 아이였다.

두 달밖에 안된 딸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 딸을 키울 수 없는 아버지는 도망간 어머니의 친정에 딸을 보내고 말았다.

3살 때 눈병을 앓다가 시력마저 잃고 말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외할머니의 기도로 다시 시력을 회복했다는, 영화의 스토리 같은 사연을 간직한 채,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로 행인들에게 구걸하다가 자니스 캬바레를 경영하던 르이 르프레에 의해 발견되어 1933년 무대에 서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극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에디뜨라는 이름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태어나기 1주일 전, 에디뜨 카벨이란 프랑스의 한 간호원이 독일 병사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며칠을 두고 이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삐아쁘의 아버지는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하필이면 비극적으로 죽은 간호원의 이름을 따서 에디뜨 조반나 가시옹이라고 붙일 만큼 무성의한 사람이었다.

이런 하나하나가 모두 드라마 소재인 에디뜨 삐아쁘에게 교양과 시와 인생을 가르쳤던 사람은 샹송 가수 다이아를 위해서도 많은 시를 썼던 레이몽 아소(Raymond Asso)였다.

현실과 가수가 지녀야 할 모든 것이 바로 에디뜨 삐아쁘가 그 동안 살아왔던 길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이해한 레이몽 아소는 그녀의 인생을 잘 다듬고 예술적인 감각으로 승화시켰다. 몰론 장 콕토와 모리스 슈바리에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1949년 유럽의 미들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 미국으로 날아오다가 아조레스 섬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에디뜨 삐아프는 실신해 버리고 만다.

이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여류작곡가 마르그리드 모노를 보자 삐아쁘는 다소 의식을 회복하고 마르그리드에게 시 한편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시는 연하의 남성 이브 몽땅에게서 받은 사랑의 상처 때문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마르셀 세르당에게 바치려던, 그에게만 몰래 보이려고 했던 사랑의 고백이 담긴 ‘사랑의 찬가’였다.

삐아쁘의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마르그리드는 이 처절한 사랑의 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위로해 주었다.

1950년 세계를 감동시켰던 사랑의 찬가는 이런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사랑의 찬가로 대표되는 에디뜨 삐아쁘, 그녀는 이 노래처럼 사랑을 하기 위해 이 세상을 태어난 여인 같았다.

세르당의 충격이 가라앉을 때쯤인 52년에는 역시 샹송 가수인 뤼시엔느 보와이에의 남편이었던 자크 필스와 뉴욕에서 결혼했으나 4년 후에 이혼으로 파국을 맞았고 그 후 10년 뒤인 62년에는 그녀의 나이 47세로 20살 연하인 그리스 청년 데오 사라보와 결합했으나 이번에는 소화기 계통의 출혈로 1년 후인 63년에 그녀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1963년 10월13일,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녀의 죽음 앞에 오열했고 몇 사람이 실신하여 쓰러지기도 했다. 그녀가 죽은지 한 달 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장 꼭토는 그녀 없는 시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미아가 샹송의 여왕이라면 에디뜨 삐아쁘는 샹송의 여신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지금도 그녀의 묘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과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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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이룸) 청소년 평전 31

불멸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

김주희 (지은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0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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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하나의 음표가 되기까지(출판사 제공 책소개)

사랑, 이별, 교통사고, 술과 마약, 발작, 치료, 재기…….

서커스단 곡예사인 아버지와 거리의 무명 가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면서 빈민가 생활을 했던 에디트 피아프. 그녀의 삶은 차라리 인생의 애환이 담긴 하나의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구한 예술가의 생을 보냈다. 아버지의 거리 공연에서 노래와 구걸을 했지만 결국 아버지 밑에서 빠져나와 거리의 가수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한 카바레의 주인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삶을 살게 된다. 이때 147cm 작은 체구의 그녀에게 ‘작은 참새’라는 애칭이 붙는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운명은 가녀린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음악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한층 더 성숙해지며 국민 가수라는 명예를 얻게 되는 반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악운과 이별 등으로 슬픔에 못 이긴 채 약물에 의존하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약해진다. 그 나락에서도 그녀를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한줄기 구원의 빛과 같은 노래였다. 그녀를 둘러싼 불운과 고통은 겉으로는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무너뜨리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하나의 음(音)은 그런 시간을 통해 영글어지고 고귀해지는 법. 그녀에게 노래란 질곡의 세월을 견뎠을 때 비로소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나에게는 노래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노래도 존재하지 않아.”

사랑과 노래, 자신의 삶 가운데 둘 중 어느 하나에 편중하지 않고 그 둘을 등가로 여기며 삶을 마감한 에디트 피아프. 그녀의 노래는 한 인간이 타자와 세계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막론한 추모객들의 애도에서 우리는 고통 속에서 아름답게 단련된 ‘소리’가 어떻게 타인의 삶을 위로하였는지, 또한 그녀의 삶과 그녀가 남긴 노래를 통해 어떻게 사랑과 노래가 하나인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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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Piaf, le Livre D'edith

에디트 피아프

실뱅 레네 (지은이) | 신이현 (옮긴이) | 이마고 | 200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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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불태운 노래/우슬/2008-2-21/알라딘 리뷰

1959년 2월 뉴욕의 뮤직홀. 특별한 장식이 없는 단출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한 여가수가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짙게 화장한 얼굴은 삐에로를 연상 시켰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모습은 늙고 연약한 육체가 드레스 속에 감춰져 있음을 보여줬다. 이윽고 장중한 노래가 가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고 관객들은 숨죽여 가수를 바라보았다. 노래가 점차 공간을 메워 가던 도중 무대의 가수가 갑자기 쓰러졌다. 관객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영화 <라비앙 로즈>의 첫 장면이다. 무대에 쓰러진 가수는 1915년에 태어나 1963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였다.

평소에 샹송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다른 나라 가수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무료한 일요일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특별한 생각 없이 선택한 영화였지만 그 영화는 그날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에디트의 성공스토리는 사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대중들 앞에 나오는 순간부터 큰 성공을 이뤘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영화는 극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에디트의 화려했던 남성편력을 낭만적으로 그리지도 않았다. 사랑에 상처 받은 여자의 애잔함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영화가 주목한 것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에디트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에디트 역을 맡은 마리옹 꼬띠아르는 거칠고 독특한 에디트의 행동, 말투, 성격을 세심하게 연기해냈다. 전혀 극적일 것 같지 않던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이미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을 한참 보고 있어야 했다. 내가 화면 앞에서 떠나지 못한 이유는 <빠담>을 열창하다 쓰러지던 피아프의 모습, 그리고 화면과 함께 끝없이 흐르던 피아프의 감동적인 노래들 때문이었다. 영화는 올랭피아 극장에서 말년의 명곡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를 부르는 피아프의 모습과 함께 끝났다. 이 노래는 영화 전체와 피아프의 인생 전체를 정리하듯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앉았고 영화의 마지막을 강렬한 마침표로 마무리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는 1961년 피아프가 쇠약해진 몸으로 인해 무대에 설 의지를 상실했을 때 다시 한 번 더 그녀를 무대에 서게 했고 피아프는 그 노래가 자신의 인생과 닮은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 일화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노래의 가사는 격렬했던 피아프의 생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를 통해 만난 에디트와의 만남은 너무 짧았고 좀더 그 만남을 지속시키고 싶었다. 더 자세히 그녀를 알고 싶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에디트의 전기를 구매했다. 그 전기와 함께 다시 에디트 생을 향한 일주일간의 여행을 했다.

음악가의 삶은 다른 분야의 예술가 보다 더 자주 회자된다. 그 이유는 음악이 가지는 모호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나름 생각해 봤다. 형태 없음과 구체적이지 못한 음악의 특성은 그로 인해 더 쉽게 인생과 결합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음악이 그것과 연관된 예술가들의 삶과 결합되었을 때 결합된 내용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더 쉽게, 더 크게 우리를 감동시킨다. 에디트의 전기는 노래와 함께 그녀의 인생을 따라갔다.

떠돌이 곡예사 아버지와 거리의 가수로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아프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20대 이후의 삶은 성공과 함께했고 주위에는 항상 추종자들이 넘쳤다. 그 모든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외로워했고 끊임없이 쫓기는 삶을 살았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나치게 종교에 심취했고 미신에 의지했으며 남자에게 집착했다. 전기는 에디트의 곁을 스쳐간 남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은 수많은 남자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남자들은 에디트 앞에서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기록되었다. 전기작가가 그 남자들을 질투한다고 느낄 만큼 하나같이 속물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작가의 날 선 칼날을 비켜간 남자는 비행기 사고로 에디트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난 헤비급 세계챔피언 마르셀이 유일했다. 그 속물적 남자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 배우 이브 몽탕도 포함되어 있었다. 작가가 그 남자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이유는 그들 모두 에디트의 도움으로 성공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를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은 사실을 보았을 때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에디트를 버렸다고 보긴 힘든 점이 있다. 그와 정반대로 내침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트의 성격은 예측하기 힘들었다. 즐겁게 웃고 즐기다가도 갑작스레 신경질적으로 돌변했고 쉽게 지겨워했다. 옆에 남자들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끊임없이 그들을 의심했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정신병을 앓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당시는 정신의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기였기에 그녀의 정신건강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로부터 버림 받았고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누리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무대로 이끈 파파 루이는 살해당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큰 충격과 함께 영광스런 성공 뒤에 이어진 비참한 생활을 경험했다. 어릴 적 이런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항상 버려질 것이란 두려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에디트는 주위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베풀었고 그 관대함은 항상 지나쳤다. 모르핀을 맞고 무대에 서는 모습은 노래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지나침은 관객으로부터 버림 받을지 모른다는 정신병적 강박감에 기인한 행동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에디트가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목소리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작가는 그녀의 특별함이 그뿐만이 아니라 시와 음악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끝없는 노력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많은 작곡가와 작사가가 에디트를 찾아왔고 그녀는 그들이 가져온 노래 중에서 자신이 부를 노래를 직접 선곡했다. 스스로 작곡과 작사를 하는 능력도 보여 주었는데 <빠담>과 관련된 일화는 그녀의 창조적 능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빠담>은 작곡가 글랜버그가 연주곡으로 먼저 작곡했었고 이후에 여러 작사가가 곡에 가사를 붙였지만 만족스럽지 못했었다. 결국 에디트는 자신이 신조어 '빠담'을 만들어 그 곡의 가사를 붙였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지금도 이 노래는 에디트의 가장 훌륭한 명곡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나에게 '샹송'하면 달콤하고 낭만적인 음악이었다. 에디트의 노래는 이런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었다. 애잔하면서도 격정적인 음악. 심장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노래였다. 자신의 생명을 태울 것처럼 진한 목소리를 단지 타고난 재능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 하고 생명을 불태웠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에디트를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문란한 남성편력을 비난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스캔들로 인해 그녀가 명성을 쌓았다는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디트가 남긴 음반은 음악 앞에서 진실했고 열정적이었던 그 가수의 업적이 가식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해 준다.

에디트의 지인들은 음악 앞에서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를 증언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던 적당함과 거리가 멀었던 에디트는 남자와의 사랑에도 지나칠 정도로 몰입했고 호화로운 파티를 너무나 자주 열어 아무리 많이 벌어도 돈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에디트의 정열과 몰입은 그녀를 큰 가수로 우뚝 서게 하는데 주춧돌이 되었지만 이것은 또한 그녀의 삶을 갉아 먹었다. 불면, 약물, 술 그리고 과로는 그녀를 너무 빨리 늙게 했다. 에디트가 타계한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기댈 곳이 없었던 에디트의 삶은 안타깝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생을 소진하며 남긴 노래는 큰 어려움 없이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녀의 노래 속에 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있음을 이해한다. 무료한 일상 속에 다가온 에디트의 삶은 몇 일간 나를 들뜨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음반은 오랫동안 나를 감동 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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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알고 싶어요 2010. 4. 2. 15:18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x6hjVFezgBQ$

존 레논의 이매진을 들어보시죠. 위 주소를 클릭하세요.


담백한 피아노 반주에 낮으면서 몽상적인 음색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존 레논의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의 양민학살을 영화한 <킬링필드>의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관객들에게 진정한 인류애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바로 1971년 발표된(이매진)이다.

이매진(Imagine)-박홍규 역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라고 있어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상상해봐, 어떤 소유도 없다고

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탐욕도 굶주림도 없다고

모두가 형제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공유한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라고 있어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박홍규, 『예술,정치를 만나다』(이다미디어, 2007) 255-256쪽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다. 높은 음악적 완성도에 ‘사랑과 평화’라는 존 레논의 사상이 잘 표현된 불후의 명곡이다. 존 레논은 한참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1966년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우리는 전쟁을 혐오한다. 결코 동조할 수 없다"는 기자회견으로 첫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다. 비틀즈 해체의 기미가 보이던 196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평화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1980년 12월 8일 한 열성 팬의 흉탄에 쓰러지기까지 존 레논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고 실천한다.

1969년 영국이 비아프라와 나이지리아 내전에 참전하자 국가최고훈장(MBE)을 반납하는 한편, 부인 오노 요코와 ‘Bed in’이라는 행위예술과 ‘War is Over’라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 때 만든 노래 (평화에게 기회를)는 1969년 12월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의 베트남전쟁 반대시위에서 25만 명의 군중들이 합창함으로써, 세계적인 ‘운동가요’로 떠올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까지 애창된 노래다.

1972년에는 북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군이 주민을 학살한 이른바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하자 '일요일 피의 일요일(SUNDAY BLOODDY SUNDAY)'라는 노래를 만들어 노래와 공연의 수익금을 아일랜드공화군(IRA)에 기부하기도 하고, 43명의 재소자가 사망한 아티카교도소사건을 다룬 노래와 흑인여성운동가 안젤라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탄압을 비판한 노래 등을 만들어 인권탄압에 항의한다.

안젤라를 탄압한 인물은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존 레논은 전위예술가이며 열렬한 여성해방론자인 아내 오노 요코의 영향으로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여성해방운동을 다룬 <여성은 이 세상의 검둥이>를 만들었다. 오노 요코가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즐겨 부른 <자매들이여, 자매들이여>(Sisters, Oh Sisters!)와 <여인>(Woman) 등은 대표적 페미니즘 노래이다. 존 레논은 노래로서만이 아니라, 1975년 오노와의 재결합 이후 은퇴선언을 하고 아예 집에 들어앉아 전업주부로서 아들 숀의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는 등 행동으로 페니미즘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존 레논의 음악과 활동 때문에 존 레논은 죽을 때까지 미국 정부의 감시, 도청, 협박 등 집요한 탄압을 받는다.

1972년 비자 연장 신청이 기각 당하는 과정에서 극우보수정치인인 공화당 스트롬 더몬드 의원이 법무장관에게 보내는 비밀 문서가 ≪롤링스톤≫지에 폭로되었는데, 그 내용은 “평화운동단체와 존 레논이 계획한 대규모 록공연은 존 레논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하여 공화당 전당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며, 닉슨의 재선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비자가 만기되면 존 레논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의 죽음을 정치적 암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검찰과 살해범 채프먼이 주장하는 “유명해지기 위해 존 레논을 사살했다”는 석연치 않은 범행동기에 대해 ≪데일리메일≫지의 기자 펜튼 브레슬러는 8년 동안 존 레논의 죽음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CIA와 FBI의 공모로 채프먼을 마인드컨트롤로 훈련시켜 존 레논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존 레논은 지난 세기 인류의 평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대중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Imagine - John lennon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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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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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어요 2010. 1. 22. 10:17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 글쓴이-김슬옹(?)


우리가 남의 나라 글을 따라서 쓰고, 그렇게 쓰는 글을 따라서 말을 하게 된다면, 그 말이 다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 삶을 움직인다고 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러하다면 어떻게 그것을 가리켜 말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모두 걸린 정신병이 무엇인가? 이런 물음을 품은 이 오덕님은 유식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쉬운 말을 하면 무식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잘 안 하는 말, 어려운 말, 유식한 말을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 신문은 사건이 발발했다고 쓰지 일이 일어났다고 쓴다거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지 말을 한다고 쓰지 않는다. 쉬운 말로 글을 쓰면 무식한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이라고 말할까봐 그렇게 쓰는 것이다. 유식한 척하려고, 학문이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임을 내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말을 할 때도 만나서 들어서 봐서 라고 할 것을 접해서라 말하는 것이 모두 유식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놀이가 오락으로 레크리에이션으로 바뀌듯 우리말에서 중국글자말로, 중국글자말에서 서양말로-이것이 우리말이 변질한 과정이요, 이 과정이 우리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요, 또 이것이 우리들 정신이 변질한 역사다.

유식함을 내보이려 하는 것을 좋게 생각할 편도 있다고 할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투어 글을 배우고 책을 읽고, 그래서 이른바 학문이 나아간다고.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 보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학교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 유식병 때문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 학문을 하는 목표가 유식함을 내보이는 데 있어서야 어찌 그 학습이며 학문이 제대로 되겠는가?

유식함을 자랑삼고, 유식함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다른 쪽에서 보면 무식함을 부끄러워하고 멸시하는 것이 된다. 무식한 것과 무식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바른 우리 겨레의 것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것을 부끄러워하고 멸시하는 마음이 그대로 유식을 뽐내는 마음이 되어 있다.

유식한 말을 써야 권위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광고 한 줄, 표어 한 마디도 권위가 있어 보이는 말을 찾아 쓰게 된다. 이런 태도는 공공 기관이나 행정관청에서 더 잘 보여주고 있다. 무슨 표어든지 광고물이든지 어려운 말을 써놓으면 근사하게 여겨서 그 앞에 머리를 숙이는 기분이 되거나 순종하는 몸가짐이 되지만,아주 쉬운 말로 써놓으면 별 볼일 없는 사람,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하는 짓으로 얕보고 멸시하는 경향까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백성들의 종살이 본성이다. 글이 지배하는 역사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정신 상태를 행정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차리고 있어서, 몇 해 전부터는 관공서의 건물마다 나붙은 행정 구호를 우리 글에서 중국글자를 섞은 글로 모두 바꿔 놓았던 것이다.

말을 살리는 글을 어떻게 하면 쓸 수 있는가?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 같은,밖에서 들어온 말을 안 쓰고, 쉬운 말과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 쓰면 된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쓰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문제는 아주 쉬어 보인다. 그런데 쉬운 말을 쓴다는 것, 시골에 사는 노인들도 알 수 있는 말을 쓴다는 것이 잘 안 된다. 그게 더 어렵다. 우리 모두가 어려운 말을 쓰는 버릇이 아주 굳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글말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삶에 푹 빠져 있다. 우리가 겨레말을 도로 찾아가지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글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말의 세계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나?

우리겨레가 쓰는 배달말이 어째서 생겨나고 전해왔는가, 그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우리 배달말은 농사일에 쓰이는 말이 많고, 사람과 자연의 모습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우리 배달글은 세종대왕이 지었다기보다 풍성한 말을 가진 우리 온 겨레가 지어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오늘날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배우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 것으로 배우게 된 까닭은 글이 말을 앞질러 말을 억누르고 부리는 사회가 된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나 그 밖의 책들을 읽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읽는 모든 글을 신문기사든지,논설문이든지,소설이든지,수필이든지,그 모두가 주고받는 말의 형식이 아니고 한쪽에서 제멋대로 쏟아놓기만 하는 글로 되어 있다. -다, -다 하는 이 견딜 수 없는 문체 -모든 읽는이를 벙어리로 만들어놓고 글쓴이 그 자신도 비인간화의 수렁 속에 빠져 있게 하는 문체는 이렇게 해서 씌어졌다. 그리고 이런 글의 횡포가 글을 떠나 있는 듯한 말-연설, 강의, 웅변, 방송, 설교... 들에까지 절대한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을 잃었다는 것은 삶을 잃었다는 것이다. 어른도 아이도,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기 때부터 삶을 잃어버렸다. 삶이 없으니 말을 주고받을 수 없다. 삶을 빼앗긴 모든 사람은 그저 주는 말만 듣고, 이야기만 듣고, 노래만 듣고 기계같이 움직인다. 언제나 그렇게 하다 보니 그렇게 듣기만 하는 이야기나 노래가 마치 자기표현인 것처럼 착각하게도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고받는 말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우리들의 말,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삶을 찾아 가지는 것이다. 기계가 되지 말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을 서로 다투고 해치고 잡아먹게 하는 지옥에서 살려내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주고받는 말을 하고 살아 있는 말을 찾아내어 그것을 글로 써야 한다. 그래서 글을 살려낸 다음에는 다시 글이 횡포를 부리지 않도록, 글이 말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의 밑에 있도록, 말을 살리고 말에 봉사하는 글이 되도록 해야 한다.사람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가? 거의 모두가 삶에서 벗어나 있다. 더구나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방안에 갇혀 글만 쓰는 행위, 끊임없이 무슨 이야기를 머리속에서 만들어내어 남에게 주기만 하려고 애쓰고 있는 짓, 과연 이런 태도가 제대로 된 글쓰기라고 볼 수 있을까? 체험과 행동은 없고 책만 읽어서 이른바 ‘상상’이란 것으로 적어놓은 말들이 살아 있는 겨레말이 될 수 있는가? 절대로 없다.

나는 여기서 오늘날의 우리 문학에 깊은 의심을 품는다. 그 옛날에는 소설가고 시인이고 하는 부류의 사람이 따로 없었다. 농사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살았다. 그래서 삶과 문학은 온전히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모든 삶이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일하는 사람은 일만 하고,노는 사람은 놀기만 하고, 글쓰는 사람은 글만 쓰고, 노래만 부르는 사람, 춤만 추는 사람, 공만 차는 사람 ... 이렇게 모두 갈려 나갔다. 이것이 발달이라고 진보라고 말하는 모양인데, 어처구니가 없다. 이제 이렇게 된 세상을 어떻게 하나? 다른 것은 몰라도 글쓰는 짓만은 이래서 안 된다. 글쓰기는 사람의 모든 삶을 뚫어보고 갈 길을 비춰 주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이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간다는 나라들의 이론들을 부지런히 배우고 따라가야 하나? 우리 문학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서 읽히도록 해야 하나?시인작가들이 더욱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문인들을 우대하는 특별시책을 정부가 세우도록 해야 하나?

아니다. 그런 방법, 그런 시책으로는 결코 우리 문학을 살려낼 수 없다. 나는 우리 문학이 살아나려면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방안에 앉아 글만 쓰지 말고 밖에 나와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농사일이든 공장일이든, 하다못해 길가에서 장사하는 일이라도 좋으니 온몸으로 일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소설 같은 걸 쓰자면 힘도 시간도 많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한 해에 평균 한두 달은, 글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한두 달이 아니고 더 많이 일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 이렇게 일을 해야 글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작가나 시인뿐 아니라 우리 문학 전체가 살아나는 길도 이것밖에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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