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기 2008. 10. 31. 13:42

나 하나쯤이야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임금이 백성들과 함께 축제를 갖기로 하고 이렇게 널리 알렸습니다.


“우리는 사흘 후에 큰 잔치를 갖는다. 단 마실 포도주는 각자 조그만 병에 준비해 와야 한다. 왕궁 앞에 큰 항아리 몇 개를 준비 할 테니 각자 가지고 온 포도주를 그 항아리에 쏟아 붓도록 하여라.”


사흘 후 사람들은 아침부터 모두 병을 들고 와 큰 항아리에 포도주를 쏟아 부었습니다. 오후에 항아리를 본 임금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물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나 하나쯤 물을 넣어도 괜찮을 거야" 생각하고 포도주 대신 물을 가져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나 하나쯤이야 괜찮을 거야, 아무도 모를 텐데 라는 생각을 하여 잘못된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항상 어디에서나 정직하여 칭찬을 받는 지도자가 됩시다.


출처 : 한국교원연수원 ‘인성교육 전문가과정’ 강의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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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8. 10. 16. 13:53

한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한다

길위에서 2008/10/15 16:56 돛과닻 (운영자) / 오마이뉴스 블로그 - 이 풍진 세상에 -



한글날 아침 식탁에서 나는 그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두 자녀를 기르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젊은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였다. 입안에 든 밥을 머금은 채 나는 잠깐 숨을 죽였다. 눈시울만큼이나 뜨겁게 가슴 한편이 서늘해져 왔다. 이게, 무슨……. 나는 간신히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먼저 가서 미안해. 신발이 작아 발이 아프다는데도 사주지 못해 미안해.”


그게 스물일곱 살, 젊은 엄마가 7살, 5살배기 철부지 아들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이는 8일 오전 자신의 원룸 창고의 가스배관에 목을 매었다. 그녀는 사업에 실패한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서 일하면서 원룸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이는 자신의 일기장에다 남긴 마지막 말을 통해 남편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했다. 세상을 마감하면서 그녀에게 가장 아프게 박힌 상처는 ‘못 사준 신발’이었을까. 신발이 작아서 ‘발이 아프다’고 투정한 녀석은 7살짜리 큰놈이었을까, 다섯 살배기 막내였을까.


문학 시간에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가르치다가 잠깐 그 이야길 했다. 그럴 뜻은 없었는데, 내 목소리가 좀 젖어 있었나 보다. 여자아이들은 예민하다. 어떡해…….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여자들의 감각이 이 세상의 무심을 새삼스럽게 환기해 주었다.


그 젊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 나는 불현듯 1990년에 일어난 한 사고를, 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오누이를 기억해 냈다. 맞벌이 영세민 부부가 문을 걸고 일을 나간 사이, 집에서 놀던 어린 남매가 불장난 끝에 방안에서 질식해 숨진 사고였다. 그 아이들의 죽음은 가수 정태춘의 노래 <우리들의 죽음>으로 숱한 이들을 분노와 슬픔으로 떨게 했다. 그 때 그 어린것들은 다섯 살, 세 살이었다.


그 사고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증명해 주었다. 일을 나가면서 방문을 걸었던 어버이는 아이를 잃은 아픔만큼이나 고통스럽게 문을 잠근 자신의 손을 저주하였으리라. ‘아, 대한민국’을 노래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가난한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그리고 18년, 세상은 얼마나 변했던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과 세계 십몇 위의 경제 규모로도, ‘경제 대통령’의 ‘선진화 원년’의 조국도 생활고에 지친 한 가정을 구하지 못했다. 다섯 살 혜영이와 세 살 영철이의 죽음으로도 이 나라의 ‘위민(爲民)의 그물’은 고단하게 살아가는 서민 가정의 단란한 행복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아이들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젊은 어머니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두 죽음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안전판의 현주소이면서 이 땅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한 징표처럼 보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저 혼자 돌아가고 그런 죽음 따위야 절로 잊히기 마련이라는 세상의 패배주의조차 닮았다.


굳이 이 땅의 육아 환경을, 한부모 가정 지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가정 복지 수준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아니 이것은 그보다 더 원초적인 문제다. 때로, 경우에 따라 아이들은 불의의 사고로, 어른은 자신의 결단에 따라, 얼마든지 목숨을 잃거나 버릴 수 있다.


그러나 18년이란 세월의 이쪽저쪽에 외롭게 자리한 이 두 죽음이 가진 함의는 남다르다. 90년이라면 마지막 군부정권이 이른바 ‘3당 합당’으로 공룡 민자당을 출범시킨 해다. 이 야합의 정국은 결국 국내 상황을 5공 시절로 퇴행시켰다.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다수의 횡포만 남은 시간이었다.


굳건히 땅을 딛고 선 음유시인 정태춘은 그 슬픈 죽음을 노래했다. 분노와 슬픔을 갈무리하면서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곤 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아주 익숙하던 시대였다. 그런 현실 속에 오누이의 죽음은 잊혀졌다. 요컨대 그것은 정치적 자유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권위주의 정부 시대의 슬픈 삽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오윤 판화 <봄의 소리>

그리고 18년, 시대가 변했다면 변했다. 현대사 초유의 정권교체가 있었고, 남북화해를 위한 잰 걸음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듯하였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목 놓아 부르짖어 온 보수세력이 재집권하면서 세상은 다시 변했다.


지난 세월 동안 모두가 힘겹게 싸워서 얻은 민주적 가치들은 ‘실용’과 ‘규제 완화’라는 경제주의의 위세에 눌려 묻히거나 폄하되고 있다.


국민들이 ‘잘살게 해 주리라’는 믿음 하나로 선택한 정권이지만 새 정부와 대통령이 그려 보이는 세상은 어쩐지 낯설기만 하다. ‘복지의 비효율’과 ‘정책 효율성’을 겨냥한 ‘복지-성장 균형 발전론'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여전히 복지는 ’성장‘과 짝을 이루어야 추진되는 비독립적 영역을 면치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부자를 위한 감세는 ‘선심 쓰듯’ 여론의 반발 따위와는 아랑곳없이 독야청청, 그 청사진도 화려하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된 내년 복지예산 가운데 기초생활 보장 및 장애인 수당 등 빈곤·취약계층을 위한 예산은 올해보다 축소되거나 동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영희 의원(보건복지가족위·민주당)의 지적대로 “감세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첫 복지예산은 서민과 빈곤층에 대한 지원의 실질적 감소로 이어”진 것이다.


두 아이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과 결별한 한 여인의 죽음이 환기하는 것은 그러한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사건을 단지 삶에 지친 한 여성의 죽음으로, 한 가정이 다다른 불행으로만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2008년의 한국과 한국 사회가 두 아이가 숨져 간 1990년과 다르다고 한다면, 아니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18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한 시간의 누적이 아니다. 그것을 역사와 문명의 발전이라 이름 붙인다면 그에 걸맞게 인간의 삶도 마땅히 진보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진보란 사회적 모순으로 말미암은 개인의 삶과 그 눈물을 닦아주는 국가의 역할이 포함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온 사회가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성찰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한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하게 한 고통스런 현실은 단지 그이가 감내해야 할 개인의 몫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이 넘치는 풍요와 과도한 낭비의 동시대가, 그리고 동시대인이 나누어 져야 할 짐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그렇게 말했다.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그것은 우리의 삶이 동시대인과 관계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윤리적 확인이다. 작가가 말하는 ‘저 깊고 수많은 안방들 속의 사생활 뒤에 음울하게 숨어 있는 우리’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어머니이고, 죽음을 건 단식을 감행하고 철탑에 올라갔던 기륭전자와 KTX의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혜영이와 영철이의 죽음이 잊힌 것과 마찬가지로 저 어머니의 죽음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다 지워질 것이다. 그렇다. 윤리적 무관심 앞에 모두들 둔감해지면서 우리는 마멸되어 간다.


이 애절한 죽음 앞에 말의 성찬도 넘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어린것들을 두고 죽을 생각을 다 하누……. 제 목을 매다는 독기로 보란 듯이 살아야지……. 맞다. 그러나 산 사람의 입은 깃털처럼 가볍지만 죽은 사람의 짐은 세계만큼이나 무겁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존적 삶의 무게다. 그것은 모든 도덕과 윤리, 관습과 법률 저 너머에 있다. 한갓진 동정과 연민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 죽음은 한 인간의 실존적 선택이다. 그 죽음에 동의할 수 없는 것과 그 ‘죽음의 절규’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머니는 가고 아이들은 남았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거두겠지만, 어쩌면 그 아이들은 이 사회의 몫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외롭게 남겨진 자신들을 이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거두었는지를 하나둘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나날이 자라나는 발을 옥죄고 있는 낡은 운동화가 주는 통증과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2008. 10. 15.>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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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8. 10. 10. 08:45

선생인 나를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하나 / 김성중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지금 네 태도가 뭐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계실까?


교사가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는 무엇일까?


선생님, 저, 나, 우리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사, 교수


나는 교사다.

교사인 나에게 어느 누구도 “나”를 호칭하는 용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교육학 교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얘기할 때는 ‘아버지, 아빠, 나’라고 한다.

목사가 신도들에게 설교할 때, 자신을 “목사님”이라고 한다면 우스울 것이다. 신부가 신도들에게 강론할 때, 자신을 “신부님”이라고 지칭하면 우스울 것이다.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신을 지칭하면서 “교수님,선생님”이라고 하면 우스울 것이다.


그런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지칭한다. 학부모와 통화하면서도 “담임선생님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럴 때는 “담임교사 아무개입니다.”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아니면 “담임선생, 아무개의 담임선생 아무개입니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말은 참 고약한 말이다. 스님도 마찬가지. 스님이라는 말 자체가 높임말이다. 스승님이 변해서 스님이다. 스승도 높임말인데, 스승님이라고 하면 얼마나 높이 높이는 말인가?


권위주의시대는 갔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나는 교사로서 자존심을 갖고 산다. 그래서 내가 나를 지칭하는 용어를 찾는 것이다. ‘나, 선생, 저, 우리, 함께, 멋쟁이, 희망, 꿈......’


교사가 교사를 지칭하는 ‘용어’를 찾아야 하는 오늘이다. 오늘은 562돌 한글날이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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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8. 10. 7. 17:51

처용과 기독교


송 재 소 (한문학자)

이명박 정부 출범이래 불교 교단은 정부에 대하여 줄곧 불만을 표시해왔다. 이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불교에 대하여 편향적이라는 것이 불교 측의 불만이었다. 사실 2004년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수도 서울을 하느님에게 봉헌한다”는 기도문으로부터 갈등은 시작되었다. 그 후, 주대준 청와대 경호처 차장이 “모든 정부 부처의 복음화가 나의 꿈”이라고 한 발언, 추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매도한 일 등이 겹치면서 불교계의 불만은 수위가 높아갔다.

급기야 조계종 총무원장이 탄 차량의 트렁크를 수색한 사건을 계기로 불만이 폭발했다. 불교계는 대대적인 집회를 열고 대통령 사과, 어청수 경찰청장 문책, 공직자 종교편향 금지 입법 등을 요구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드디어 대통령이 사과하고, 공무원의 직무상 종교차별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공무원 복무규정 제4조 2항’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이 ‘복무규정 4조 2항’을 기독교 측에서 역이용하고 나섰다. 41년 째 거행되고 있는 울산의 ‘처용문화제’를 문제 삼은 것이다. 울산시 기독교연합회와 울산시 교회협의회, 울산시 성시화(聖市化) 운동본부, 울산문화연대 등 4개 단체가 “울산시가 처용문화제에 세금을 지원함으로써 무당인 처용을 믿고 따르는 특정 종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며 지원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처용문화제 지원 관련 조례를 폐지하지 않거나 다른 명칭으로 변경하지 않으면 공무원 복무규정 위반으로 울산시 관계자를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불교인도 아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주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날 불교사찰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 승려도 있었다. 또 부처님오신 날 사찰을 방문하여 축하해준 가톨릭 신부도 있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왜 유독 개신교만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가?

시골 학교 교정에 세워둔 단군상(檀君像)을 훼손한 일이 있었고, 동네 입구에 서있는 천하대장군을 도끼로 찍는 일도 있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부 몰지각한 개인의 소행으로 보아 넘길 수 있지만 처용문화제의 경우는 다르다. 개인이 아니라 기독교 단체가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다.

처용문화제를 ‘특정종교활동’이라 할 수 있나?

처용문화제를 ‘특정 종교 활동’으로 보는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신라 향가인 「처용가」에서 유래된 처용희(處容戱)는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궁중과 민간에서 널리 행해져온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이다. 처용과 처용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지만, 아내를 빼앗긴 사내의 원한과 슬픔을 춤과 노래로 승화시켜 역신(疫神)을 감동시킨다는 내용의 처용희를 ‘특정 종교 활동’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41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처용문화제를 ‘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라 고발하겠다는 것은 얼핏 불교계로부터 받아온 그동안의 시달림을 엉뚱한 대상에게 앙갚음 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만난 곳이 지금의 울산시 남구 개운포이다. 그 후 그곳에 있는 바위를 처용암이라 이름하고 이를 울산의 상징으로 삼아 해마다 처용문화제를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처용설화의 발원지인 울산에서 처용문화제를 개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유산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측에서 이를 트집 잡고 나선 연유를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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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재소
· 한문학자
· 前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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