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기 2008. 8. 4. 13:46

나의 레종데트르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김갑수의 책 ‘나의 레종데트르’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저자는 3만여 장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 음악의 전문가이며, 책을 가지고 방송을 진행하는 책벌레이다. 몇 년 전 ‘텔레만을 듣는 새벽’이라는 책을 보고 저자를 알았고, ‘티브이, 책을 읽다’는 프로그램의 진행위원으로서 티브이에서 자주 얼굴을 보았던 터라 반가운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이 책은 지은이의 책오딧세이다. 지은이가 읽은 책을 씨줄 삼고 지은이의 생각이나 느낌을 날줄 삼아 지어낸 다양한 빛깔의 베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저자 자신을 저자는 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어떨 때는 보수주의자보다 더 보수적이고, 진보주의자 앞에서는 진보주의자 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말이다.


레종데트르.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프랑스어 사전을 뒤적여보았다. 존재의 이유라는 말이었다. ‘리슨 오브 비잉’. 그러니까 저자 김갑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돈을 벌어서 마음껏 쓰겠다는 사람, 의사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겠다는 사람, 성직자가 되어 영혼을 구제하겠다는 사람, 정치가가 되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람, 예술가가 되어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겠다는 사람 등등. 사기꾼이 되겠다는 사람, 살인마가 되겠다는 사람, 매국노가 되겠다는 사람은 없다. 살다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계획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 존재가 문제다. 바로 존재의 이유가 중요한 것이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해서 150달러를 위협하기도 하다가 지금은 130달러 근처에서 왔다갔다 한다. 투기꾼들의 농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인류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원자재 값이 너무 올라서 기업운영이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니 신규채용이 있겠는가. 취업을 희망하는 대학생들은 공무원채용 시험(무려 26%다!)에 몰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는 빵 한 개에 천억 원이라고 한다. 지독한 인플레이션이다. 이러한 때에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늘 나의 존재의 이유를 묻곤 한다. 과연 나라는 사람은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다. 그러니까 국어를 가지고 밥을 벌어먹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늘 국어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한다. 늘 국어와 관련된 것에 더 많이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것에는 덜 신경을 쓰는 것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교육문제를 우선한다. 교사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사회문제 전반에 걸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래도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나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사서 본다’고. 책을 읽으면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알고 있다고. 책에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온갖 처방이 있으니까, 처방대로 하면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고.


나는 지금 배가 부른 돼지인가?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아내는 우리가 가난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13년 된 세피아를 타고 다니는 나는 여기 저기 고장이 나는 차를 수리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자동차가 없으면 사는데 약간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새 차를 사서 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우리 집 형편에 꿈도 꿀 수 없다. 빚을 내지 않으면 차를 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필요한 것들은 사서 산다. 우선 나는 필요한 책들은 사고야 만다. 물론 몇 번 망설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책은 내 손에 들려 있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수도 있겠지만, 늘 곁에 두고 읽고 싶고, 밑줄을 그으면서 읽고 싶어서 책을 산다. 이런 나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 책 다 읽어요?’라고 물어본다. 세상에 책을 읽으려고 사지 자랑하려고 사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나 또한 자랑하려고 책을 사서 읽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책을 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제대로 책을 읽은 것 같지 않다. 시골집에 읽을 만한 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면소재지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은 기억이 난다. 피노키오나 성냥팔이소녀 등. 그것도 어렴풋이. 읍내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와서도 그렇게 많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없다. 다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사람이 지은 번역본 삼국지(전5권)를 밥 먹는 것도 잊고 읽었다. 그때 밤 아홉시가 넘어서 라디오에서 ‘유기현의 삼국지’를 연속극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삼국지를 맹렬히 읽던 시절이 그립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것 같지 않다. 고전이나 소설책 몇 권을 읽은 게 고작이다. 중3때 고전읽기 경시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대회에서 교육장상을 받았다. 아마 ‘어네스트 톰슨 시튼의 동물기’ 독후감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이나 ‘오리엔트특급살인사건’,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을 읽었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나 보다. 누나가 사온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헤르만 헤세 전집도 읽었다. 고2때는 ‘노벨상문학전집’을 할부로 사서 읽었다. 부모님께는 된통 혼이 났지만, 그 뒤로 나의 월부 책 구입은 시작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스피노자에 관한 책을 빌려서 읽어보았는데, 그 책은 나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 스피노자가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당한 브루노를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공부에만 매달렸지만 이런 책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알알이’라는 독서써클에서 교양서적을 읽으며 토론을 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읽었다. 고향친구 네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회원은 여섯 명이었다. 그것도 잠시 군대에 가면서 중단되었다. 군대에서야 시간을 죽이는 것이 일이었다. 최전방부대에서 철책 근무를 서고 있을 때, 소대장을 대신해서 독후감을 200자 원고지로 50장을 썼던 기억이 난다. ‘한민족의 용틀임’이라는 책이었다. 복학하고 나서는 전공공부다 취업공부다 해서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교사로 사회에 발을 디뎠지만 시절은 엄혹했다. 몰래 몰래 말지를 읽던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5공청문회가 진행중이었고 빨치산 관련 책인 이태의 ‘남부군’도 읽었다. 그리고 교육민주화와 관련된 책들을 읽게 된다. 1989년 교육민주화를 외치며 전교조가 창립됐고 1,500명이나 되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쫒겨 났다. 나는 밥벌이를 위해 ‘하나족발’이라는 음식점을 해직동료 2명과 함께 개업했다. 내 이름으로 영업허가가 났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 살. 족발장사를 하면서 언제 책을 읽을 수 있겠는가. 전교조 지회사무실에 상근자로 나서면서도 책을 읽는 일은 드물었다. 그리고는 1994년에 하남에 있는 중학교로 복직 발령이 났다.


복직하고 나서 광주국어교사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었다. 특히 고전을. 그러던 중 1995년 2월 11일에 박경리의 토지(16권)를 완독했다. 동네 책방에서 빌려서. 그때의 감동은 잊지 못하겠다. 그 무렵에 ‘다산 정약용’(5권)이라는 소설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정약용이 해배되어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를 기다리는 큰형의 설렘과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나는 참았던 울음보를 터트렸다. 정약용의 글을 읽으면서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던 때라서 그랬을 것이다. 이때 나에게 크게 다가왔던 책은 ‘드레퓌스사건과 지식인’(니콜라스 할라즈 지음)이었다. 이 책은 나중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나오게 된다. 에밀 졸라의 목숨을 건 드레퓌스 변호, ‘나는 고발한다, 쟈큐스’, 대통령을 고발하는 졸라의 진실에 대한 열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악마도에서 창살에 갇혀 있는 드레퓌스가 나 인양 괴로웠다. 진실이 행진하고 있음을 믿게 한 이 책을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1997년 2월에 조선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학생회에서 ‘21세기 민족문학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부탁해왔다.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사랑방문고’에 가서 관련서적 20여 권을 샀다. 아마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대량으로 책을 샀던 첫 번째 사건일 것이다. 강연 내용은 장정일을 중심으로 나병철 교수의 책을 베껴서 했다. 하나족발 이야기도 양념으로 첨가했다. 아마 학생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강연이었을 것이다.


다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부터 나의 지식이 너무 얄팍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이 너무나 우스웠다. 그때부터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을 사서 읽었다. 그러다보니까 쌓이는 게 책이었다. 학교 교무실 책상에도 책, 집에도 책, 책에 치이었다. 아내의 잔소리가 늘어났다. 제발 책 좀 그만 사라고.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가. 작년에는 집을 수리하면서 집에 있는 책의 70%를 담양에 있는 죽림재(서고)로 옮겼다. 장모님 소유의 상가건물 이층 계단에 있는 창고를 서고로 쓰기로 했다.


2008년 8월 4일(월) 새벽 3시. 오늘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읽었다. 예순다섯이 넘어서 청소년을 위한 성장 소설을 써낸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김형경의 성장소설 ‘꽃피는 고래’의 끝장을 아침 6시에 덮었다. 오전 10시 30분 임철우의 ‘등대’를 읽는다. 김언수의 ‘캐비닛’도 읽는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과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도 읽는 중이다. 도대체 읽고 있는 책이 몇 권인가?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과 ‘세피아빛 초상’은 며칠 전에 읽었다. 피노체트에게 쫒겨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의 조카인 이사벨 아옌데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책을 잡으면 끝까지 놓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제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를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아, 미하엘 옌데의 ‘모모’도 읽는 중이다. 그리고 문태준의 시집 ‘그늘의 발달’은 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이라 꼼꼼히 읽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까 줄줄이 소설책이다. 당분간 소설책을 열심히 읽을 생각이다.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책을 읽으려고 태어난 책벌레일까. 나를 향해 손짓하는 책장에 꽂혀있는 저 책들의 요염한 몸짓에 나는 부르르 떤다. 이것은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내가 지고 가야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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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8. 8. 3. 19:06

이빨 브리지 공사를 하다



지난 7월 16일 학년모임 회식이 창평에 있는 오리전문식당에서 있었다. 오리전문 식당은 규모 있는 한옥이었다. 대지가 500평이나 된다 한다. 코스요리로 하나하나 요리가 나온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시울모임에 가야하는 부담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요리를 먹었다. 하얗게 덮인 연근(연뿌리)을 입에 넣고 씹는데 돌을 씹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얼른 입에 있는 음식을 물수건에 뱉어서 살펴보니까 왼쪽 의치가 떨어져 있었다. 즐거운 회식 자리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돌을 뱉어낸 척 했으나 기분은 무척 안 좋았다. 요리를 대충 먹고 나서 도망치듯 식당을 나와서 시울 모임장소인 터미널로 차를 몰았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막혔다. 7시까지는 가야 하는데 동운고가 쪽에 갔는데 박정인 선생 전화가 왔다. 모임 장소에 도착해보니 이미 모임이 시작됐다. 생일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마니또에게 선물을 주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빨이 깨져서 집에 가야한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차를 몰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의치 바깥쪽이 다 떨어져 나갔다. 보기가 흉했다. 이제는 치과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십년 전에 대대적인 이빨 보수공사를 했다. 그때 보철을 걷어내고 썩은 이를 뽑고 보철을 하고 브리지를 했다. 왼쪽 위 어금니 쪽은 어금니 두 개를 빼고 송곳니 두 개와 사랑니를 연결하는 공사를 했고, 아래쪽은 맨 안쪽 어금니를 덮어씌웠다. 오른쪽은 아래쪽 어금니 두 개를 빼고 송곳니와 맨 안쪽 어금니를 연결하는 브리지를 했다. 그때가 1998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충치가 많아서 자주 이가 아팠다. 어머니께서는 젖을 먹지 못하고 젖을 곯아서 그렇다고 했다. 사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치아가 좋지 않은 것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그랬을 것이다. 이빨이 아프면 치과에 가야했는데 그러질 못했고, 대학교 1학년일 때 이빨치료를 사치과에서 했었다. 무면허 사설치과에서 말이다. 그때 예비고사를 보는 친구들을 격려하러갔다가 엿을 먹었는데 왼쪽 어금니 쪽 보철에 구멍이 뚫렸다. 바로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미루다가 갑자기 군대에 가야했고 군대에서도 많이 아팠다. 최전방에 근무할 때 이빨이 너무 아파서 사단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때 오른쪽 위 사랑니를 뽑았다.


그리고는 이빨에 대해서 늘 부담을 가지고 살면서도 잊어버렸다. 치과에 가서 제대로 진찰을 받고 치료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10년 전에 운암동에 있는 이상열 치과에 갔다. 친구의 친구가 원장이라서 안심이 됐다. 치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진찰을 받았다. 처음으로 스켈링을 하고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불안했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제대로 된 이빨을 갖고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보수공사를 마치고 치료비로 180만원을 건넸다. 이빨치료를 끝내서 시원했지만 치료비로 들어간 돈이 너무 아까웠다. 치과에서는 6개월에 한 번씩 점검을 받으라고 했고 치아관리를 잘 하라고 당부했다.


2001년에 나는 예술고에 근무하고 있었다. 회식을 하는데 돌을 씹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왼쪽 의치가 떨어진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바로 다음날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해야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두었다. 아내는 자주 치과에 가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구취가 심하다는 아내의 말을 들었다. 왼쪽 이빨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분명이 그쪽에서 악취가 났다. 이제는 치과에 가야지 하고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학년 회식 때 확실하게 의치가 떨어진 것이다.


7월 17일에 오치에 있는 정치과를 찾아갔다. 이름난 치과라고 아내가 말했다. 꼼꼼하게 치료를 해준다고 말이다. 그날은 스켈링(치석제거)만 했다. 7월 23일(수)에 왼쪽어금니의 보철을 제거했다. 의치를 씌웠던 기둥이빨 두 개 중에서 신경을 죽였던 이빨 하나가 다 썩어서 문드러져 있었다. 다행이 뿌리는 건강했다. 그리고 사랑니 또한 건강한 치아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7월 24일(목) 썩은 이 뿌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임시치아를 만들었다. 7월 25일(금)에는 브리지를 할 이빨의 본을 떴다. 7월 31(목)일에 브리지를 하기 전 중간점검을 했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브리지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8월 7일(목) 오후에 브리지를 놓는다. 사랑니와 송곳니 두 개 사이를 연결하는 공사다. 멋진 다리가 될 것이다. 임시치아를 빼버리고 튼튼한 의치를 끼워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의사에게 이빨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던 지난날이 오히려 부끄럽다. 이빨이 나쁜 것이야 숨길 일이 아니다. 아프면 곧바로 치과로 달려가야 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치료해 달라고 해야 한다. 입을 벌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늦으면 늦을수록 돈이 많이 든다. 치과에서는 치료비로 150만원을 요구했다. 아내가 3개월 할부로 결제했다. 시간을 뺏기고 돈을 들이고 치료할 때 고통스럽고, 이게 다 치아관리를 잘 하지 않은 자에 혹독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라는데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는 놈이다. 내가 젖먹이 때 내 동생이 엄마 뱃속에 들어와 버렸다. 나는 사촌누나의 젖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조카의 젖을 얻어먹은 셈이다. 이런 내가 불쌍하다고 어렸을 때 어른들이 물려준 사탕이 나에게 좋지 않은 습관을 길러줬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치아관리를 꼼꼼하게 하지 않은 나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치아관리를 꼼꼼하게 해야 한다. 칫솔질을 꼼꼼하게 한다. 칫솔로 잇몸을 충분히 맛사지한다. 밥을 먹 뒤에 곧바로 양치질을 한다. 주기적으로 치과에 간다. 늘 거울을 들여다본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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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8. 5. 17. 15:19

소인배 등급론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내가 참여하는 작은 공부 모임을 마치고 단골집에서 평소 무간하게 지내는 K대학 P교수와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일전에 내가 쓴 「소인배 승승장구론」을 보았다면서, 어찌 소인배가 그것뿐이겠냐며 나를 나무랐다. 게다가 한문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허균의 「소인론」과 박지원의 「마장전」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 같다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약이 올라 “그럼 자네는 소인에 대해 별다른 설이라도 있는가?”라고 했더니, 그가 맥주잔을 들이킨 뒤 소인배에도 등급이 있다면서 자못 장황하게 「소인배 등급론」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나머지 아래와 같이 정리해 독자 여러분께 보여드린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사과는 다 같은 사과지만 꼭 같은 사과는 없는 법이다. 너와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또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동일한 이치로 소인배 역시 같은 소인배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종류와 등급이 있다.


향원형 소인배, 과시와 이익을 위해 약간의 비판적 언사도


소인배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여 쉽게 찾을 수 있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안다. 불의한 것을 보면 저것은 아닌데 하고 비판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울분이 치솟지만, 말을 꺼내거나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타고난 성품이 워낙 소심한 탓이다. 한 마디 내지르고 직장(혹은 그에 상응하는 것)을 때려치우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나이 드신 부모님, 아내(혹은 남편), 어린 자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래, 세상이 원래 다 그렇지 뭐, 내가 참자, 이렇게 스스로 위안하면서 입을 다물고 만다. 이 부류의 소인들은 대개 인정스럽고 눈물이 많다. TV를 보다가 불쌍한 사람이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지하철에서 동전 한 푼의 적선이라도 하는 사람은 대개 이 사람들이다. 이런 소인들은 조선시대에는 ‘백성’이라 불렀고, 요즘은 ‘서민’이라 부른다. 주위에서 어렵사리 찾을 수 있으니, 좀스럽기는 하지만 실로 다정한 우리의 이웃들이다. 이들을 굳이 분류하자면 ‘생계형 소인’이라고 할 것이다.


생계형 소인과는 달리 무언가 부당한 일을 보면 비판적인 언사를 내뱉는 분들도 계신다. 그런데 이 분들은 자신에게 무해한 경우에만 비판에 과감하고, 정작 과감해야 할 경우에는 발언을 삼가는 습성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비판적 언사 역시 비판하는 것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비판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비판했을 뿐이다. 그는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 바란다. “이봐, 아무개 양반, 내가 이번에 따져서 당신이 속한 부서가 불이익을 받지 않게 했어, 당신은 내게 고마워해야 해, 그러니 내게 술을 한 번 사야 해” 이런 식이다. 그는 옳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약간의 비판적인 말을 한 것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대학도 물론 있다. 공부와 연구의 중요성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진지하게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해 본 적이 없다. 겉으로는 늘 민주적 도덕적 언사를 늘어놓지만 속으로는 실상은 전혀 민주적 도덕적이지는 않다. 늘 생각하는 바는 자신의 안위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골프를 한 번 더 칠까, 외국에 한 번 더 나가서 놀아볼까 하는 생각뿐이다. 굳이 명칭을 달자면 ‘향원형(鄕愿型) 소인배’다.


창귀형 소인배, 권력을 추종해 착한 사람을 핍박하기도


향원형 소인배는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남을 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을 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인배도 있다. 이들은 특징은 언제나 섬길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다만 그 섬길 사람은 고매한 인격을 갖춘 도덕적 인물이 아니라, 더러운 것일지라도 큼지막한 권력을 쥔 사람이다. 헤맨 끝에 그 사람을 발견하면 신명을 바쳐 섬긴다. 이들은 많은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자신만의 생각은 없다. 섬기는 윗분의 의견이 곧 자신의 의견이 되고, 윗분이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 된다. 윗분이 내뱉은 한 마디에, 이들은 피를 바르고 살을 더한다. 윗분의 한 마디는 기가 막히게 똑똑한 법과 규칙으로 탄생한다. 그들은 민족과 나라, 또는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또 일의 합리성이나 조직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로 말하지만, 사실 목적은 딴 데 있다. 윗분에게 충성심을 과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윗분의 권력을 나눠 받고 즐겁게 그 권력을 누리고 행사한다. 그 결과는 오직 선량한 사람을 옭죄고 해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소인배는 ‘창귀형( 鬼型) 소인배’라 할 것이다.



P교수는 넋이 나간 채 듣고 있는 나에게 “자네는 더럽다고 소리치며 학교를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골프도 못치고, 외국에 나가 산 경험도 없고, 권력 있는 사람 곁에는 가본 적도 없고, TV를 보다가 마누라와 눈물이나 흘리는 것을 보아 오갈 데 없는 생계형 소인배일세.” “그럼 자네는?” 반문하는 나에게 그는 “나도 그렇지 뭐.” 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두 생계형 소인배는 대취하여 어깨를 겯고 비틀거리며 주점을 나섰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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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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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8. 5. 14. 08:52

학부모통신

학부모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2학년 7반 담임교사 김성중입니다.

학부모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는 학교에서 즐겁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담임인 저는 사춘기인 아이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학교생활에 문제점이 있으면 곧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학부모님,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촌지나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첫째,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둘째, 제가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편애를 할까 두렵습니다.

셋째, 학부모님께서 학교에 찾아오시는데 부담을 드릴까 두렵습니다.

넷째, 제가 지향하는 참교육을 하고자 하는데 걸림돌이 될까 걱정이 됩니다.

다섯째,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은 저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 불신을 받는 교사가 아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덟째, 제가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아홉째, 우리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학부모님, 저의 편지를 읽어보시고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항상 정의가 가득 차기를 바라는 저의 소박한 충정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2학년 7반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학부모님의 가정에 항상 기쁨이 넘쳐나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2008년 5월 13일


담임교사 김성중 올림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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