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시 2007. 2. 27. 22:00

가을 온정리

이상국

70년도 넘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기 훨씬 전에

동해북부선 타고 금강산 원족(遠足) 갔던 아버지가 있었다.

왜놈의 당고바지에 지팡이로 멋을 내고

온정리에서 사진을 찍은 젊은 아버지가 있었다.

죄송하게도 당신보다 더 오래된 나이로

2006년 가을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주말에 어디 맛있는 집 찾아나서듯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

나는 역사를 너무 엄숙하게 생각했다.

10월의 북고성에서는

테두리가 높다란 모자를 쓴 군인들이

사회주의 가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저래도 어딘가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니...... 해놓고

나는 주먹으로 애 입을 틀어막는다.

내가 상상했던 온정리가 훨씬 따뜻했을지라도

오길 잘했다. 그러나 분하다.

우리는 늘 이밥을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 땅의 가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언젠가 내 아들도 이곳에 올 것이다.

누가 오든 온정리가 어디 가겠는가

저 붉은 단풍숲에서 아이들은 연애를 하고

무 밑이 다 들고 나면 또 눈이 내릴 뿐,

앓다 일어난 듯 핼쑥한 풍경을 배경으로

남녘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나도

김치 하고 사진을 찍는다.

온정리 가을이 따라 웃는다.

*[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통권 135호) 24-25쪽에서

*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東海別曲], [집은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이 있음. bawoo858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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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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