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시 2007. 2. 23. 21:12

엉덩이의 추락사

하정임

밤이면 별에 매달린 내 엉덩이에서 코끼리 아저씨 길고도 아름다운 거미줄을 뽑아낸다, 하늘에 걸어둔 길고도 아름다운 거미줄, 랩소디를 흥얼거리며 거미줄을 타는 코끼리 아저씨는 서커스의 스타, 비극을 만들 듯 웃음을 만들 듯 우리들의 기묘한 서커스*, 나는 엉덩이를 벌리고 별의 가장 깊은 호흡에 매달려 있는데

유성이 떨어지고 코끼리 아저씨는 모자를 씌워서 서커스단과 함께 보낸다 열정이 식어가듯 밤새 빨아도 내 엉덩이에선 거미줄이 나오지 않는데, 떠나는 코끼리 엉덩이에서 나팔소리가 울린다 이별은 늘 시끄러운 법이지 서커스단의 볼이 빨간 소녀, 코끼리 엉덩이를 찰싹 때리자 아아, 거침없이 떠나간다, 아니 떠나가는 코끼리 엉덩이에서 여자들이 슝슝슝 터져나오면서 웃는데, 즐겁다는 건지 비참하다는 건지 그 웃음소리, 나는 귀를 막고 코끼리 아저씨에게 윙크를 날리고 과거를 후회하기 위하여 묵념

얘야, 그동안 얼마나 뜨거웠니, 화상을 입어 입술이 그렇게 붉어졌구나, 아니요 나는 항문도 빨간걸요, 얘야, 그건 이제 너희가 항문을 핥아주는 사이가 아니라서 그렇단다, 아니요 난 이제 지겨운 항문 따윈 막아버리겠어요

비극의 계절, 엉덩이의 여자들 밤에는 모여서 울고 낮에는 거미줄을 치고 더 높이 더 가볍게 아슬, 아슬 걸어간다, 거미줄이나뽑아가던 코끼리 따윈 떠나보내길 잘 했지 오늘밤엔 울지 말고 거미줄 위에서 아슬, 아슬, 제발 좀 내려와요, 이제 여자들 줄 위에서 좌우의 엉덩이에 균형을 맞추고 기쁨인지 고통인지 터져나오는웃음으로 음악을 만들어낼 지경인데, 그러다 한순간 엉덩이의 추락사

나는 그대로 누워 꼬박삼백일을 앓고 거미줄을 빙글빙글 돌려 먹고 일어났다** 침대가 불쓱 날아올라 플라타너스 가지 위에 내 팬티가 걸렸다 지나가는 새들이 입술을 한번씩 문지르고 붉은 입술로 씨익 웃으며 날아가고, 지나가는 구름이 오줌을 한번씩 누고 더 검어진 지퍼를 올리며 흘러간다

* 영화 제목

** 영화 [거미숲]에서 차용.

*[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통권 135호) 45-46쪽에서

*하정임 : 1977년 경남 하동 출생.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rhymist1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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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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