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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1 :: 저 슬픈 망루를 보라 / 송경동
  2. 2009.12.07 :: 거대한 뿌리 / 김수영
  3. 2009.11.26 :: 대인동 부르스 / 곽재구
  4. 2009.09.01 :: 비만고양이 / 김기택 1
함께 읽는 시 2010. 1. 21. 12:14

저 슬픈 망루를 보라

송경동



저 남일당 4층 옥탑 위

파란집을 보아라

낱낱이 세들어 살던 집들 말고

2009년 1월 19일 새벽 2시 갈 곳 잃은 우리가

공동으로 지었던 마지막 희망의 집을 보아라

그러나 부서진 저 집을 보아라

불태워진 저 집을 보아라

끌려간 저 집을 보아라

우리 모두의 눈물이 1년째

아니 다시 수천, 수십년 얼어붙어 있을

저 파란눈의 집을 보아라


저 집을 보아라

저기서 우리 모두 불탔다

밀려나고 쫓겨나는 이 시대 모든

가난한 이들의 꿈이 불탔다

세상은 이만 살기 좋아졌는지도 모른다는

우리들의 기대가 순박함이 무지가 불탔다

이만하면 민주주의지 않냐는 헛소리들

헛소문들 헛담론들이 불탔다


저 집을 보아라

곧 무너져 내릴 저 역사의 파란집을 보아라

다시 저렇게 쫓겨날 피압박민중들의 집을 보아라

다시 저렇게 뭉개질 가난한 꿈들을

공장을 일터를 삶터를 보아라

똑바로 보아라

눈 부릅뜨고 생피 뚝뚝 떨어지도록 똑바로 보아라

혼자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해봐도

같이 살아보겠다고 합심해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물대포와 곤봉과

배제와 소외와 왜곡과 죽임뿐인

이 추악한 사회를 이 더러운 사회를

이 병든 사회를 똑바로 보아라


그러나 다시, 저 파란 집을 보아라

끊어진 다리를 세우고

꺾여진 관절을 다시 맞추고

어렵사리 다시 일어서는 우리 모두의

저 파란집 파란꿈을 보아라

새롭게 지어지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보아라

소유와 착취를 위한 건설이 아니라

삶을 위해, 평등을 위해, 평화를 위해

다시 우리 모두가 지어야 할, 올라야 할

저 저항의 망루 투쟁의 망루 연대의 망루

해방의 망루를 보아라


그리하여 오늘만큼은

저 하늘로 오르는 파란 꿈을 보아라

저 파란 하늘을 보아라

무너져야 할 것은 가난한 자들의 3자연대가 아니라

저 자본의 카르텔 저 권력의 담합

광화문 네거리 저 독재자의 파란집일 뿐

이 집은 우리 모두의 집이었다

우리가 다시 세울 내일의 집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잘가라 잘가라

눈물도 피멍울도 없이


-2010년 1월 9일(토) 오후 용산참사 현장 노제에서 낭송한 시임. 한겨레신문 2009.1.9(토) 1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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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함께 읽는 시 2009. 12. 7. 15:14

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앉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

나는 이사벨 버드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정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2.3>


-출전 : 김수영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창비시선68, 1990),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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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함께 읽는 시 2009. 11. 26. 10:22

대인동 부르스

곽재구


추석달이 밝은데

비인 거리에 너는 그림자를 띄웠느냐

콜타르 먹인 전신주 아래

다리 꼬고 턱 바치고 꼭 그렇게

눈물나는 모습으로 서서 너는 다시

거리의 슬픔으로 가을 달맞이꽃이 되려느냐

부평에서 반월에서 구로동에서

이름도 얼굴도 때묻은 젖 큰 가시내들은

고향이라고 명절이라고 다들 밀려오는데

전세버스의 차창마다 깨꽃 같은 그리움은 피었는데

네가 설 땅이 꼭 한 곳뿐이라고

너는 그 전주 아래 슬픔의 뿌리를 내리고 굳었느냐

그 무슨 한맺힌 기다림의 씨앗이라도 뿌렸느냐

어색하게 스타킹을 신고 원피스를 입고

사과광주리 설탕 한 포 입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겨울내복을 사들고

아버지의 소주와 동생의 운동화와 그림물감을 사들고

저렇듯 돌아오는 때절은

가시내의 웃음소리가 그리웁지 않느냐

추석 달빛은 찬데

대인동 골목마다 찬 달빛은 출렁이는데

굳어버린 너의 몸 위에 누가

창녀라고 낙인을 찍겠느냐

누가 한 오리 저주의 그림자를 드리우겠느냐

가까운 고향도 눈에 두고 갈 수 없어서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 식구들 생각이 뜨거워서

홀로 들이켠 수면제 가슴 젖어오는데

추석 달빛은 차고 어머니는 웃고

너는 뜬 두 눈으로 달맞이꽃으로

대인동 골목마다 죽어서 살아 있는 눈물이 되었구나.

-수록시집 「사평역에서」,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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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함께 읽는 시 2009. 9. 1. 15:06

비만고양이

김기택



쥐구멍이 없는 아파트.

쥐약과 덫이 없어도 쥐가 살 수 없는 아파트.

쥐 대신 바퀴벌레를 잡을 수도 없어

종일 누워 있는 고양이.


어두운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지 않는 먹이들.

눈과 귀가 달려 있지 않아 뛰어 도망다니지도 않는 먹이들.

발버둥칠 다리가 없는 먹이들.

한 번 갖다 놓으면 접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한 자리만 고집하며 얌전하게 담겨 있는 먹이들.

가르릉거리는 목과 등을 쓰다듬는 흰 손이

시계와 저울처럼 정확하게 갖다주는 먹이들.

피가 묻어있지 않는 먹이들.

비명과 비린내와 체온이 위생적으로 제거된 먹이들.

수저 같은 혀만 있으면 목만 움직여도 편히 먹을 수 있는 먹이들.


아파트에 최적화된 발소리 없는 밤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뛰어다녀도

아래층에서 씩씩거리며 올라올 목소리도 없지만

고기처럼 먹음직스럽고 뚱뚱한 소파 위에서

쿠션처럼 종일 누워 있는 고양이.

맨 처음 갖다 놓은 자리에 아직도 그대로 있는 가구처럼

한 번 심어놓으면 절대로 화분을 떠나지 않는 화초처럼

정해준 자리에만 가만히 누워 있는 고양이.


*김기택 시집 『껌』(창비, 2009.2.16 초판 1쇄 발행) 58-59쪽에서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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