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시 2009. 8. 6. 13:05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채호기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지성 시인선 361/문학과지성사/2009) 143쪽

posted by 추월산
:
함께 읽는 시 2009. 7. 25. 19:48
휴대전화 기록으로 머릿속을 뒤지는 사회

- 詩 <혜화경찰서에서>

송경동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나는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이었다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톰앤톰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시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엄포 놓는다
함께 잡혔던 촛불시민은 가택수색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이메일을 압수수색하겠다고는 않는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하모니카나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1년치 통화기록으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나의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고비사막 모래무지에 새겨져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의 몇천미터는 채증해 와 대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줘야지, 이게 뭐냐고.


2009.7.8 ⓒ송경동


* 송경동 시인은 그동안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왔으며 특히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더불어 농성장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 용산참사가 발생하자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꿀잠》이 있다. -- 편집자

posted by 추월산
:
함께 읽는 시 2009. 5. 1. 10:52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난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그들은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가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Gwangju, Cross of Our Nation)'는 1980년 5월, 한반도의 남녘 도시 광주에서 공수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맞서 일어난 ‘5․18광주항쟁/Gwang Uprising'을 최초로 형상화한 시로 동년 6월 2일자(전남매일 : 2개월 후 군사파쇼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됨) 신문 1면에 일부 게재되었으나 이날 바로 삭제되지 않은 시 원문 전체가 외신을 타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지로 흘러나가 발표되었다.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실천문학사, 1988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2007)에 실려 있음


posted by 추월산
:
함께 읽는 시 2009. 4. 16. 18:13

보이지 않으면 더럽지 않다

서자원



똥 싸고 밑을 보다

아차, 보지 말 걸

고약한 냄새

냄새가 더러워서 더럽다

더러운 것을 먹은 일이 없는데

내 몸에서 나온 더러운 똥


아름답고 높고 웅장한 저 건물들

고결한 사람들의 고상한 바벨탑

수없는 사람이 수없이 싸고 싸도

세상은 깨끗하다

머리 위에서도 싸고

발밑에서도 싸고

밤낮 없이 싸고 싼다

똥은 포장 되고

냄새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더럽지 않다

세상은 깨끗하다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는 이 있다

간혹 있다, 어쩔 때는 더 있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이

위험한 인물이다

다 못 보는 냄새까지 보다니

필시 탯줄을 지구에 박은 외계인이다

확실해졌다,

깨끗한 세상을 위해

외계인을 색출해 탯줄을 끊어야 한다

나는 그들을 보면 밀고하겠다


깨끗한 세상을 위하여



-서자원 시집 『아버지의 쇠똥냄새』(2008.2/도서출판 코리아기획) 20-21쪽

posted by 추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