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8. 6. 12. 09:59

2008.6.11/시울/김성중

목련 전차 /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를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밤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動力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꽃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창비시선 264, 창비, 2006) 76-77쪽


[발문]

1. 목련 전차는 어떤 전차일까?-목련으로 만든 전차. 목련을 실은 전차. 목련이 줄지어 피어 있는 길. 목련이 전차처럼 힘이 있다는 말.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다.

2.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은 어떨까?-아무 생각도 없이 백지처럼 순수한 상태가 아닐까.

3. 그랬겠지는?-글쎄, 모호하다. 아마 뒤에 나오는 화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 같다.

4.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전기를 통하게 하는 코일처럼 햇살은 나무에게 에너지를 전달한다. 나무는 햇살을 받아서 광합성작용을 하는 것이다.

5.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지도 모른다-아마 그럴 것이다. 햇살을 에너지(전기) 삼아 나무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가 나무 속에 내장되어 있어서 나무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6. 바퀴를 굴리는 힘-목련 전차를 굴리는 힘은 나무의 원초적 생명력이리라.

7. 목련은 어디로 떠나가는가?-목련은 떠날 수 없다. 나무는 제 자리에 붙박혀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시인은 목련이 에너지를 받아 떠나는 환상에 빠진다. 그리고 꽃들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본다. 아니면 꽃들이 피어 있는 길을 전차를 타고 가면서 구경하는 것은 아닌지.

8. 신혼 첫밤을 보낸 동래온천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새 생명의 탄생을 예비하는 공간이다. 시인의 자신의 탄생과 목련꽃과 동래온천을 연결지으면서 목련전차를 타고 떠난다. ‘목마를 타고 떠난 여인’처럼.


[감상]

전차는 전동차다. 전기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기관차다. 그런데 꽃이 기관차가 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상상을 함으로써 시인은 독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시인은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에서 무리지어 피어있는 목련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전차기지터에 어울리게 목련을 전동기가 달린 전차라고 생각한다. 햇살을 원료로 전기를 얻어서 꽃을 피운 목련은 이제 꽃등을 켜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마친 셈이다.

봄이 와서 모든 생명들이 약동하는 때에 시인은 부모님이 신혼 첫밤을 보낸 동래온천을 떠올린다. 목련꽃이 피어 있는 길을 죽 따라가면 동래온천이다.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때에 신혼여행을 동래온천으로 왔던 시인의 부모는 아예 이곳에 눌러 산 모양이다. 부산 동래온천의 뜨거운 열기가 신혼부부를 붙잡았으리라. 아니면 부산에서 직업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부풀렸으리라.

목련 전차는 떠났다. 천지에 목련꽃은 모두 사라지고 목련 잎만 무성하다.

더 읽을 시

가새각시 이야기



사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고가메 북쪽으로 씨러들어가면 그날은 영락없이 비가 내린다, 한마을 한집에서 칠십년을 산 할머니의 말씀이다 볕이 저렇게 짱짱하기만 한데 말리던 고추를 거둬들이시고 논에 물꼬를 보러 간다, 바지런을 떠시던 할머니 진남포로 만주로 대령으로 똘똘 구르마 타고 떠돌던 할아버지 먼저 보내신 뒤, 가위점을 치던 날들이 있었다 가새각시 가새각시 영검하게 맞출라면 핑 돌아가고 영검하게 못 맞출라면 까딱도 말고 가만히 섰소 지어올린 밥상 앞에서 명주실에 매단 가새각시 빙글 춤을 출 때 나는 의심 어린 눈으로 할머니 손목을 시큰둥 노려보곤 하였지만 요즘은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가새각시 통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가새각시 작두날에는 녹이 슬기 시작했다고, 걸음걸음 벌렸다 오므린 발을 다시 떼기조차 힘겹다는 당신 설 앞날 서른다섯 손주를 마당에 업고 포대기처럼 빙 두른 흙담 곁 채마밭에서 들려주신다 아가,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 꼭 이런 날 늬 할아버지가 오셨구나 박가분 품고 이날치 판소리 한 대목맹키 굽이치는 추월산 가마골을 한달음에 넘어오곤 하셨구나 가위를 매달던 명주실 올을 흰 눈이 뿌리는 밤 가윗날에 흰 눈이 싹뚝싹뚝 베어지는 밤 할머니 이제 가위점은 치지 않고 무덤 이야기만 들려주신다 가세 가세 일찌감치 떠난 할아버지 곁에 지어둔 가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한마을 한집에서 일흔 해를 살고 한몸에 여든일곱 해를 머문 뒤의 일이다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창비시선 264, 창비, 2006) 28-29쪽

[감상]

내 고향 이야기가 나와서 기분이 좋다. 고가메가 그렇고 추월산과 가마골이 그렇다. 그래서 할머니 이야기는 더욱 정겹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땐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가 그립다.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여!

할머니는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농사꾼이자 자연인이다. 그러니까 바람이 부는 방향이나 세기를 통해서 비가 오거나 눈이 올지를 아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 기상대라고 할 수 있다.

가위점을 치면서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는 이제 무덤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구든지 무덤을 피할 수 없다. 인명은 재천인 것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일이다.


다른 시인의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

-가정 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장정일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 1/2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 1/2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작은술

후추가루 1/1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 소스 약간

브라운 소스 1/4컵


위의 재료들은 힘들이지 않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믿을 만한 슈퍼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슈퍼에 가면

모든 것이 위생비닐 속에 안전히 담겨 있다. 슈퍼를 이용하라―――


먼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진다

이때 잡념을 떨쳐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명상의 첫 단계

이 명상을 행하는 이로 하여금 좀더 훌륭한 명상이 되도록

매우 주의 깊게 순서가 만들어졌는데

이 첫 단계에서 잡념을 떨치지 못하면 손가락이 날카로운 칼에

잘려, 명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장치되어 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한 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놓는다

소리 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끝난 다음,

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 빵가루, 달걀, 볶은 양파,

소금, 후추가루를 넣어 골고루 반죽이 되도록 손으로 치댄다

얼마나 신나는 명상인가.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그곳을 만지는 일만큼

우리의 촉각을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순간은,

곧 이 순간,

음식물을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때가 아니던가


반죽이, 충분이 끈기가 날 정도로 되면

네 개로 나누어 둥글납작하게 빚어 속까지 익힌다

이때 명상도 따라 익는데,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반죽된 고기를 올려놓고 일분이 지나면 뒤집어서 다시 일분간을 지져

겉면만 살짝 익힌 다음 불을 약하게 하여―――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절대 가스렌지가 필요하다―――뚜껑을 덮고 은근한 불에서

중심에까지 완전히 익힌다. 이때

당신 머릿속에는 햄버거를 만들기 위한 명상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머리의 외피가 아니라 머리 중심에, 가득히!


그런 다음,

반쪽 남은 양파는 고리 모양으로

오이는 엇비슷하게 썰고

상치는 깨끗이 씻어놓는데

이런 잔손질마저도

이 명상이 머릿속에서만 이루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명상도 하나의 훌륭한 노동임을 보여준다


그 일이 끝나면,

빵을 반으로 칼집을 넣어 벌려 버터를 바르고

상치를 깔아 마요네즈 소스를 바른다. 이때 이 바른다는 행위는

혹시라도 다시 생길지 모르는 잡념이 내부로 틈입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버터와 마요네즈를 한꺼번에 처바르는 것이 아니라

약간씩, 스며들도록 바른다


그것이 끝나면,

고기를 넣고 브라운 소스를 알맞게 끼얹어 양파, 오이를 끼운다.

이렇게 해서 명상이 끝난다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 사항이 많은 명상 끝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오늘의 시인 총서 22/민음사/초판 1쇄 1987/개정판 4쇄 2005.4.15.) 142-147쪽


[감상]

별의별 명상이 있다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참 가관이다.



아빠

장정일



거짓 웃음이 거품을 치네

푼돈을 긁어모아 맥도널드를 사 먹는 어린 꼬마들이

그 작은 입술로 거무스레하게 그을은 빵

사이에 끼인 붉은 스테이크를 씹어 들려 할 때는. 거짓

웃음이 거품 치네. 맛있다고 브라운 소스 묻은

빈 손가락을 소리 내어 빨아야 할 때는


거짓 웃음이 거품 치네

맥도널드가 길게 째진 입으로

자신만만 외칠 때는 너무 우스워 눈물이 솟구치네. 세계인은 모두 맥도널드를 먹는다

구라를 칠 때. 혹은, 세계인의 4분의 1이

매일 맥도널드로 점심을 해결한다고

자랑스레 떠벌일 때는. 그리고 우리의 세금으로

방송되는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가 들리는 건 어떻고?

아가씨들은 맥도널드를 좋아해

언제 어디서나 맥도널드를 먹어대네


거짓 웃음이 거품 치네

저녁마다 우리의 싱크대 위에서

시어가는 김치 단지를 볼 때. 냉장고 속에서

곰팡이가 먹어대는 식은 밥덩이를 볼 때

어머니, 거짓 웃음이 거품 쳐요! 당신이

하얀 냅킨에 쌓인 맥도널드를

쟁반에 얹어 코카콜라와 함께 내

코 앞에 내어놓을 때, 이것이

너의 아침식사라고 명령할 때, 불현듯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고 항변하고 싶을 때


거짓 웃음이 거품 치네

한국 아가씨들의 모든 입에 하나씩의

맥도널드가 물려져 있고. 아무 말

못한 채 눈물만 글썽이며, 마요네즈 소스가 흐르는

느끼한 그것을 곱씹을 때는. 씹지도 넘기지도 못하고

맥도널드가 자꾸 내미는 말랑말랑한 소시지를

입에 넣고 가만가만 녹여야 할 때

당신의 방법이 최고라고 차렷 자세로

말해야 할 때


거짓 웃음이 거품 치네

노린내투성이인 너, 아메리칸

맥도널드가 잔뜩 팽창해지고 거대해진

다리를 들고 목구멍 깊숙이 쳐들어 올 때

웃으며 당신의 전신으로 내 식도와 내장과 항문까지

꽉 채울 때. 왼손으로 내 귓볼을 간지르며 자신에게

아빠, 라고 불러주렴 속삭일 때. 그래

불러주고 말고. 아빠 사랑하는 내 …… 에라잇

아빠 아빠 아무에게나 펠라티오를 시키는 버릇 없고 건방진 후레자식!

I′m sick of your insane demands!*


* 앨런 긴즈버그 Allen Ginsberg의 장시 「아메리카」중의 한 구절. 번역하면 <나는 너의 비정상적인 요구들에 구역질이 나!>(느낌표는 필자가 덧붙였음)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오늘의 시인 총서 22/민음사/초판 1쇄 1987/개정판 4쇄 2005.4.15.) 162-164쪽


[감상]

1955년 설립. 1967년부터 해외 진출. 2001년 현재 119개국에 28,000개의 매장 운영. 총자산은 2001년 현재 216억 달러, 매출액은 142억 달러.맥도널드 한국 1호점은 1988년 압구정동에 들어섰고 2001년 현재 점포수는 240여개.

맥도널드와 KFC가 변화시킨 세계인들의 체형을 보라. 비만이라는 질병을 선물하고 있지 않은가.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당신의 위장에게 퍽큐를 날린다.

posted by 추월산
:
시 이야기 2008. 5. 30. 08:18

문인수 / 2008.5.29. / 김성중

배꼽

외곽지 야산에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문인수 시집 『배꼽』(창비시선 286/창비/2008.4.10) 47쪽

[발문]

1. 버려진 집에 들어온 사내는 어떤 인물일까?-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실패한 사람. 파산자.

2. 길이 탯줄처럼 뽑혀나오는 이유는?-생명이 이어지는 탯줄처럼, 사내의 생명 또한 길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3.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는 이유는?-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니까.

4. 희망에게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많은 이유는?-희망을 찾을 수 없는 세월이었다.

5. 뱀허물은?-뱀의 새로운 탄생. 허물을 벗는 고통. 허물을 벗지 못하면 뱀은 죽는다.

6. 사내가 아직도 웅크린 폐가인 이유는?-사내의 삶은 폐가처럼 죽음과 맞닿아 있다. 사내는 뱀처럼 허물을 벗을 수도 없고 폐가처럼 사라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7.폐가가 사내를 품는 이유는?-폐가나 사내나 사라져야할 운명. 동병상련.

8. 조롱박이 열리는 아침이 비릿한 이유는?-새 생명의 탄생으로 활기차기 때문이다.


[감상] 희망과 절망으로 교직된 게 인생이 아니던가. 우주의 배꼽은 생명의 시원일 테고. 한 생명이 스러지는 와중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게 자연의 순환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조롱박이 열리는 아침, 이슬에 젖은 길이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간 집(폐가)에 둥지를 튼 사내에게 희망이란 없다. 절망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배꼽이 있으니, 우주에서 삶과 죽음은 통하는 것이다.

우주의 순환 앞에서 겸허해질 일이다. 죽음이 늘 무릎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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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가죽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 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 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 든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까마득한

계단 같은 것,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천천히 지우나니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몇몇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쫒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母法)이 있다.

*문인수 시집 『배꼽』(창비시선 286/창비/2008.4.10) 22-23쪽


[감상]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에게 법은 늘 두려운 법이다. 할머니는 이런 법을 가볍게 뛰어넘는 모성을 갖고 있다. 속도를 가로지르는 그 느림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속도는 우리를 질식시킨다. 느림의 미학과 모성.


다른 시인의 시

화개(花開) / 도종환

찬물로 얼굴 씻고 쪽문 열고 나가니

백매화가 엷은 새벽의 가지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오디주 한 주전자와 큰 대접에 찻물

가득 담아 건네주고 간 처자는 보이지 않았다

언어장애가 있는지 말을 잘 못하면서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알아듣게 하려고

애를 쓰는 처자에게서 산복숭아꽃 향이 풍겨나왔다

칠불사로 가는 이 골짝에 들어온 지 스무 해

혼자 사는지도 그 절반은 되었을 거라는 안주인은

동생이 죽어 어제 고향에 갔다고 했다

관향다원觀香茶園

관세음 아니라 향기를 통해 세상을 관하는 이

차 한 잔 하고 싶어 지었을

이름 예사롭지 않은 민박집 아래로

십리 이십 리 길 벚꽃이 피어 화개는 꽃으로 출렁거렸다

우리 속에도 출렁거리는 것이 많아

밤 깊도록 우리가 지닌 세속의 칼 그 양날에 대해

오랜만에 속맘을 털어놓던 도반도

일찍 깨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붓 들어 내 남은 일이

섬진강 모래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화심에 수백 만 개 향기의 촛불을 켜들고도

화려하기보다 은은한 벚꽃처럼 살 수 있기를

며칠째 비어 있는 방명록 여백에 적었다

백매도 산벚꽃도 가만가만 숨을 쉬는

사월 아침 화개 관향다원에서

*『시와 사람』 2008년 여름호 33-34쪽

[감상] 벚꽃이 만발한 화개 관향다원에서 산복숭아향이 나는 처자가 건네는 오디주를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리고 화개차를 마시며 이 시인의 소망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고 싶다. 인생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정리하고 싶다. 산다는 게 때로는 지랄 같을 때가 있다. 이럴 때 관향다원에 가고 싶다.

posted by 추월산
:
시 이야기 2008. 4. 17. 15:29

제2부 한국현대시사 교육의 방향과 실제 발제자 : 김성중 / 2008.4.16.


Ⅰ. 시교육과 한국현대시사


한국현대시사의 교육은 다양한 시의 형태와 감수성을 이해하고 감상함으로써 전인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구인환 외, 문학교수․학습 방법론, 삼지원, 1998, 187쪽.) 한국현대시사 교육은 한국현대시사에 대한 형해화된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계통을 갖춘 구조화된 지식을 통해 한국현대시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것이 목표다.


1. 한국현대시사 기술방법과 시교육의 방향


한국현대시의 기준으로 가장 많이 동의하고 있는 기점은 1920년대 주요한, 김억 등의 자유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외래적 요소를 수용하면서 시조의 정형성을 탈피함으로써 자유시로 이행하였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애국계몽기의 시가 관념을 앞세운 타설적 구조였다면, 1920년대 초기 시는 이념보다 감각, 관념보다 개성을 강조한 자설적 구조이므로, 1920년대 초를 현대시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한국현대시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기점이 다르다. 개성적 언어 구조에만 주목하느냐, 현대적 삶의 체험을 담아내는 것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한국현대시사의 구조가 달라진다. 김용직([한국근대시사])은 해외시와 시론의 전입과 수용을 현대시의 중요한 요소로 보아 <태서문예신보>를 중심으로 활동한 김억과 주요한의 시를 한국현대시의 기점으로 본다. 김재용 외 3인([한국근대민족문학사])은 민족의 현실과 자아에 대한 인식의 태도를 고려해 개성과 자아의 해방을 추구하는 시의 자율성을 중요한 요소로 보아 김억과 주요한의 자유시 모색을 거쳐 김소월, 한용운 등에 와서 확립된 것으로 본다. 김용직은 시의 형식적 측면인 정형성 탈피를 현대시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고, 김재용 외 3인은 내용적인 측면인 민족적 현실 인식을 포함해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시의 내재적 구조 변화냐, 시의 구조와 그 발생 원인인 사회적 활동과 사상을 함께 고려하느냐의 문제)

임화([개설 신문학사])는 양식 중심의 서술 방식으로 김용직과 김재용의 문제점을 돌파하려 한다. 각 시대는 하나의 완결된 양식을 지향하며, 모든 작품은 양식으로 수렴되고, 다음 시대에는 또 다른 양식으로 변화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시는 한시, 민요, 시조 등의 다양한 전통시와 교섭이 진행되었으며, 서구의 다양한 시형태와 의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수용되었기에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백철([신문학사조사])은 문예사조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시인과 작품을 유파별로 묶어서 체계화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시인과 작품의 독립성을 배제하므로 다양한 시인의 창작의식과 작품을 배제할 위험이 높다.

임화가 한국의 신문학을 서구문학의 이식문학사로 규정한 관점이 지속되고 있다. 낭만주의, 신경향파, 시문학파(순수서정시), 모더니즘, 토속적인 시, 모더니즘의 후예 등 유파분류 항목을 보라. 백철은 외국문학과 사상에 따라 한국현대시사의 체계를 기술하고 있다. 이식문학사관은 ‘전 시대 시와 후대 시의 내적 연관’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문제다.

한국현대시사의 역동성을 구조화하려면 구조의 체계를 변화시킨 작품이 집적되는 과정을 살펴야 한다. 특정한 시가 발아해서 완성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시가 특정한 감수성의 구조란 점에서 특정한 감수성을 탄생시킨 공시적․통시적 영향 관계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개인의 개성적인 감수성으로 시대를 표상하는 것이지 논리적 담론으로 시대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는 개인이 사회․역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이 독특할수록 그 가치를 지닌다.

현대시사교육은 시의 감수성을 통해 당대사회에 대응하는 여러 논리를 이해하거나 체득하는 학습이 가능하다. 동일한 사회․역사적 현실을 상이한 감수성을 통해 인식하는 시의 학습은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함으로써 반성적 사고를 이끌 수 있는 것이다.


2. 한국현대시사 기술방향과 현대시 교육


한국현대시사 교육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다양한 시의 형태와 감수성을 이해하고 감상함으로써 현대시의 미적 가치와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둘째, 개별작품의 이해를 넘어서 현대시 전체의 유기적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전 시대 시와의 내적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한국현대시사에 새로운 시가 첨가된다는 것은 그 시가 전시대의 언어를 갱신했거나 새로운 각도의 심리적 진실을 펼쳤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시가 외래적 충격을 소화하면서 전통적인 것을 개선하는 데서 확립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하자. 그러므로 한국현대시사는 문제의식 단위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그 문제의식이 발생한 지점에 따라 연대기적 서술을 할 수밖에 없다.

해방 이전의 한국현대시(1920년-1945년)를 단위중심으로 설정하면, 자유시의 확립, 시조의 현대화, 현실주의 시/역사적 응전시, 도시문명과 모더니즘, 인간과 전통가치 재발견 등이다.

각 단위를 설정한 근거와 각 단위의 교육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1920년대 전통시와 외래적인 시와 교섭․길항에서 발아한 현대시와 시조의 현대화.

전문적인 시인의 탄생기. 계몽성 탈피, 문학의 자율성 확보. 전 시대 시의 압력을 벗어나 시를 갱신하고 독자성을 확보하는 자체적인 전범을 마련하지 못함. 이때 유학생 중심으로 수용된 외래적인 시와 가치는 전통적인 시를 갱신하는데 거울이 됨.

이 단위의 시교육 목표는 ‘한국현대시의 확립과정 이해’다. 현대시가 확립되기 이전의 몽롱하고 모호한 감정과 무질서한 표현이나 기계적인 운율에서 분명하고 뚜렷한 언어와 정서로 정착하는 과정을 교육하는 것은 현대시의 기본적인 특성을 이해시킬 수 있고, 실패한 언어는 시창작 초기에 범하는 오류를 고스란히 보여주므로 시창작 교육에서도 우회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시조가 갖는 문학사적 의미를 찾는데 있다.


둘째, 1920년대 전통적인 시가 보여준 윤리적 가치를 당대적 현실에서 새롭게 정립하고 당대의 언어로 구조화하는 문제.

사대부의 이념이 현실적 설득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윤리적 가치를 미적 가치로 표현하는 일, 외래 가치를 통해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미적 가치로 상승시키는 일-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 1920년대 프로시에서 이념의 당위성과 언어의 심리적 진실 사이의 합치의 어려움, 성취되었을 때의 아름다움 교육. 1930년대 민중의 시선으로 발견한 역사의식의 심미성과 지식인의 시선으로 발견한 역사의식의 심미성-독자의 역사의식 반성적 고찰. 개별 시인의 사회역사적 고민이 심미적으로 형상화되는 면모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격을 체험할 수 있어 전인적 인격의 내면화를 교육할 수 있음.


셋째, 도시적 문명이 유입되면서 함께 유입된 서구적 가치와 질서는 전통적인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감수성을 형성시킴.

이 단위는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교섭과 길항에 따라 한국현대시의 독자성이 뚜렷이 확립되는 시기다. 1930년대는 서구 도시문명을 거울삼아 한국의 현실을 바꾸려는 세계 보편주의, 서구도시문명에 대한 회의와 시적 실험, 토착화된 이미지즘의 심미성, 동양적 정신의 감각적 표현, 농촌공동체의 감각적 심상화 등 한국현대시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모습을 갖춘다. 이 시기의 시인과 작품은 현대시 교육의 전범이 되어있다. 이 단위의 한국현대시는 한국어에 대한 깊은 인식과 실험이 진행되었던 시기로 한국현대시의 저수지와 같아 한국어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위의 한국현대시사의 교육은 한국현대시의 전범의 특징과 의의를 현대시 전체의 체계 속에서 살핌으로써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현대시를 체계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넷째, 이 단위는 한국현대시사에서 한국적인 정신과 정서를 깊게 탐구한 시인과 작품을 설정.

이 단위의 시는 사회역사적 현실과 단절된 내면에 집중, 원초적인 인간 탐구. 한국인의 육체와 정서 속에 내밀하게 작동하는 에너지를 언어화시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한국인의 정서를 한국어의 음상과 운율을 통해 직조함. 이 단위의 한국현대시사 교육은 민족적 언어와 정서의 정교한 조직화 방식을 이해하고 감상함으로써 언어생활을 도울 수 있으며, 한국적인 것에 너무 익숙해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할 수 있을 것.


한국현대시사를 문제의식 단위로 교육하는 것의 학습효과 : 첫째, 현대시사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는 한국 현대시의 여러 특질을 규정해왔기 때문에 한국현대시의 이해와 감상의 깊이를 더해 줄 수 있다. 둘째, 단위마다 개성적인 시의 형태와 감수성은 학습자가 다양한 시를 경험함으로써 현대시의 진폭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각 단위의 문제와 해결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다양한 실험시에 대한 이해와 비판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넷째, 현재 현대시의 문제를 스스로 파악하고 해결하는 진취적인 시도를 기대할 수 있다. 한국현대시사 교육은 한국현대시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전체 구조를 조망함으로써 오늘날 현대시의 문제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Ⅱ. 한국현대시사교육의 실제


1. 자유시의 확립과 시조의 현대화

1-1. 한국자유시의 모색 : 김억, 주요한, 박영희

한국현대시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것은 순문예지인데,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는 이러한 흐름의 출발임. 김억은 상징주의 시론과 번역시를 소개했는데, <프란스 시단>(1918.12)은 상징주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글. 계몽주의 시가 의미의 기술이라면 상징주의 시의 암시성은 의미를 넘어서는 정서를 중시함. 음악성은 유형적인 율격을 배제하고 감정의 진폭에 따른 운율을 강조한 시론임. 따라서 김억은 현대시의 특성을 인식한 최초의 시인임.

김억의 시. <학지광>5호(1915.5)-‘야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도시에 나리는 비’(베를레느), ‘봄은 간다’(<태서문예신보> 제9호-1918.11.30). 김억은 ‘야반’이란 시에서 ‘시가 시대의 변론이 아니라 개인의 정감’이란 인식을 보여주며 미묘한 정서와 호흡의 완급이 암시성과 음악성의 단초를 보여주는데, ‘봄은 간다’에서 서구시의 운율을 흉내내려다가 정형적인 율격을 나타내는데, 우리 언어와 서구어의 언어적 자질을 망각한 결과임. 그리고 번역시에서 느끼던 모호함과 애상적인 정서를 한국현대시의 좌표로 설정한 것은 비판받아야 함.

한국현대시의 자유시 시도와 실패의 또 하나의 전범은 주요한이다. <독립신문>(1920.6.1)에 ‘조국’이라는 줄글 시를 발표함. 감정의 흐름에 따라 운율과 어조가 변하고는 있지만, 애국심을 호소하는 연설 같은 느낌. ‘불놀이’와 ‘눈’을 살펴보면, ‘눈’은 눈이 오는 장안 거리의 풍경의 묘사를 통해 애상을 표현하고 있고, ‘불놀이’는 사월 초파일에 불놀이에 몰려드는 군중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표출. 시 전체의 호흡이 심리적 흐름에 따라 운율을 형성하고 있어 김억보다 자유시의 운율에 근접함. 그러나 아직도 시인의 감정이 뚜렷하지 못하고 시인의 의식과 정서에 따라 시행과 호흡 단위가 자유롭게 변화하는 자유시의 면모를 확립했다 하기에는 미흡함.

<백조>를 중심으로 활약한 박영희, 박종화, 노자영, 이상화 등이 초기 한국시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음.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은 몽롱하면서도 탐미적이지만 딱딱한 운율과 시어의 모호함에서 실패한 현대시의 한 예임. 운율은 심리적인 호흡과 동떨어진 채 의미 전달에 치우치고 있음.


1-2. 한국자유시의 확립 : 이상화

이상화는 <백조>에서 활동할 때는 몽롱하고 모호한 애상과 표현에 그쳤으나 점차 ‘불놀이’에 드러난 현대시의 면모를 진척시킴. 민족적 현실과 교섭하는 개인의 뚜렷한 정서를 보여주며, 주요한이 보여준 호흡률을 감각적 시어와 결합시키면서 현대시의 면모를 확립함.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시의 정서는 약동하는 봄을 맞는 기쁨과 삶의 터전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설움이 충돌되면서 발생함. 시 전체가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면서 민족적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이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음. 운율적인 측면에서 이 시는 각 연마다 어조와 호흡이 운율과 일치하면서 감정의 변화에 따라 심리적 드라마를 이루고 있음.

이 시는 운율과 어조의 일치, 운율과 이미지의 대조, 어조의 생생함을 통해 일상적인 회화 언어의 운율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음. 이 시는 주요한이 성취한 정서와 호흡의 일치를 넘어서 비로소 자유시의 면모를 확립하고 있는 것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운율과 어조를 통한 일상회화 구현, 이미지와 비유를 통한 정서의 형상화, 민족적 현실 인식 측면에서 ‘한국현대시를 확립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음.


1-3. 현대적 율조의 확립 : 김소월

1920년대 중반기 한국시는 자유시의 확립을 통해 그것이 발전되기보다는 오히려 정형시가 주류를 이루게 됨. 조선주의는 당대 현실과 유리된 복고주의적 경향을 띄고 있으며, 시조부흥운동이나 민요부흥운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남. 최남선, 주요한, 김억 등도 이러한 경향에 동참.

김소월의 시는 시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적 감성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이 감성이 의미, 운율과 조화를 통해 현대적 율조를 확립함. ‘가는 길’은 민요의 율격과 판이하게 다름. 이 시의 시행 배치는 심리적 흐름과 호흡에 따라 배치되고 있음.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는 통사적 구조에 따라 율격 단위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는 망설이는 심리적 주저가 휴지로 나타나면서 음보의 단위가 끊어지고 있다. 이러한 엇붙임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행의 배치로 서정성을 드높이고 있다. 이렇듯 심리적 흐름과 운율의 일치가 서정성을 증대하는 특성은 오늘날까지 한국현대시의 한 특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시어의 사용에서도 음상이나 문장 부호가 율조를 형성하면서도 심리적 흐름을 표상하고 있다. ‘다시 더 한번.......’에서 말줄임표는 자꾸 되돌아보는 행위와 심정을 암시하고 있으며, ‘ㅇ'음과 ’ㄹ'음을 연달아 사용한 것은 강물의 흐름과 정처없이 떠도는 심정을 표상하고 있다. 이 시의 비애는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나 유랑하는 자의 심정이며, 이 시의 정서적 기반은 식민지 현실에서 뿌리 뽑힌 민중이다.

‘산유화’. 3음보의 율격이 동요나 민요 같은 느낌을 준다.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연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3연의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라는 발언이 숨은 화자의 심정을 잠시 드러낸다. 새의 시각에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세계 속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새의 시각은 민중적인 정서마저 수세에 몰리고 몰려 이른 지점이다. 인간사로부터 후퇴하여 자연 속에서 외로운 새가 되어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는 고독한 인간의 심정이 율조로 나타나고 있다. 화자는 새로 치환되어 율조에 녹아버린 것이다. 결국 ‘산유화’는 주체적 화자마저 율조화하고, 율조와 화자의 미세한 틈을 통해 인간사로부터 후퇴한 자의 고독하고 쓰라린 심정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소월의 ‘산유화’는 한국현대시사에서 인간탐구와 더불어 현대적 율조를 확립한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1-4. 시조의 현대화 : 최남선, 이은상, 이병기, 조운

1920년대 중반에 시조부흥운동은 민족주의의인 조선주의에 힘입은 바 크다. 최남선은 시조집 <백팔번뇌>에서 관념적인 조선아(朝鮮我)를 노래했는데, 고시조를 흉내낸 복고적인 것에 머물렀을 뿐 조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은상은 누구나 알기 쉬운 상식적인 이야기와 정감의 표현에 집중했다. 그러나 조국애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명령문, 감탄문 등을 사용해 감정을 과도하게 나타내면서 시로서 진실성이 떨어지게 된다. 가람 이병기로부터 시조의 현대화가 시작된다. 대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언어의 결이 ‘오동꽃’이라는 시조에 나타나는데, 오동꽃이 지는 모습을 보고 느낀 아쉬움을 율격과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연시조를 창작했는데, 현대시의 연 구조를 시조에 도입해 자유로운 감정을 담아내려 했다. 이병기는 의미와 운율을 일치시킨 감각적 언어를 획득하였으며, 시조에 감정을 담아내는 양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시조는 짧은 길이 속에 사상과 감정을 직관적으로 담아냄으로써 감동을 주는 서정시 양식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조운은 ‘옥잠화’에서 시조가 갖는 특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현대적 언어 감각을 구현한다. “우두머니 등잔불을 보랐고 앉았다가//문득 일어선김에 밖으로 나아왔다//옥잠화(玉簪花)/너는 또 왜 입때/자지 않고 있느니”. 우리 시조는 조운에 와서 현대화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해방 이후 현대시조나 이후에 창작되는 현대시조는 조운의 시조 현대화 방향 속에 있다.

: 노철, 『시교육 방법과 실제』, 보고사, 2002.

posted by 추월산
:
시 이야기 2008. 4. 2. 14:20

2008.4.2(수)

[대표시]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시집 [낙타](창비시선284 / 창작과비평사 / 2008.2.22.) 10쪽에서


[감상] 낙타처럼 느리게 하염없이 사막을 걷고 싶다. 오아시스를 찾아서 신기루를 따라서 오늘도 터벅터벅 걷고 싶다. 시속 600킬로미터로 나는 비행기 말고, 그저 기어가는 달팽이의 속도로 세상을 횡단하고 싶다. 3월이 다 가는데 봄꽃을 마음껏 즐기지도 못한 시간들이 아쉽다. 누구나 무덤을 향해서 돌진하는 법. 자본이 지배하고 승자가 독식하는 세상에서 너나없이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런데, 시인은 낙타처럼 걷고자 한다. 아니 벌써 낙타가 되어버렸다.

3월이라 바빠서 시감상할 여유도, 하늘 한 번 쳐다볼 시간도 없는 요즘,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자문한다. 3월 증후군! 낙타처럼 느릿느릿 걷다보면 이한직의 '낙타를 닮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해대는 말도 3월이 가면 내년 봄에나 듣겠지. 세월이 흘러가면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뿌듯해지고 그래야 하는데, 이 봄이 싱숭생숭하다.

시인은 낙타를 타고 사막 같은 세상을 거쳐 저승길에 들어선다. 세상사 다 잊어버리고, 슬픔도 아픔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못 본 체 하면서 저승길을 걷는다. 저승에 들어섰을 때, 저승사자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해와 달과 별과 모래만 보면서 살 거란다. 낙타가 되어서 사막에서 살 거란 말이다. 사막은 생명활동이 지극히 위축된 곳이다. 사막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삶의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막은 생명의 시원이다. 생명이 존재하지 않을 듯 하지만 생명이 존재하는 곳이다. 시인은 사막 같은 세상에서 재미없이 사는 사람과 길동무가 되어서 다시 저승길을 걷겠노라고 한다.

그렇다. 인생을 재밌게 살아야 한다. 시인에게 잡혀서 저승길 가기 전에.



[다른시] 숨어 있는 것은 아름답다 / 신경림

숨어 있는 것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런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신경림 시집 [낙타](창비시선 284 / 창작과비평사 / 2008.2.22.) 34-35쪽


[감상]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숨어 있을 때만 아름답다. 사람들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숨어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드러날 때는 추하다. 뭐든지 그렇다. 사람도 그렇다. 단점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은 멋있다. 그러나 꼴불견이 드러나면서 그 사람에 대한 환상이나 좋은 감정은 깨지기 마련이다. 나는 숨어 있어서 아름다운 존재인가, 드러나서 추한 존재인가?



[추천시]

잡감 / 이은봉

-재무에게

서울 지리 참 복잡하고 복잡하데

나 시골 살 때 어쩌다 볼일이 생겨

기차로 올라와 역광장에 내던져지면

정신이 없데 꼼짝없이 어릿광대데

뭐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비싼 요금을 물며 볼일을 봤지

그러나 장가들어 제금나면서

성북 골짜기 한구석 자리하고 보니

서울길 그래도 대충 눈에 훤하데

무릇 길이란 본디

제 아무리 꼬불꼬불 지랄을 쳐도

죄 내 집 문간에서 나와

죄 내 집 문간으로 드는 법인 걸

그땐 몰랐지 아직은 그걸

세상 모든 이치 이와 같아서

너무 당황 말고 담담히 그냥

대궁 바로 세워 지켜보면은

눈 부드러이 지켜보면은

쉬 알게 되데 탁, 가슴 트이데

그 또한 내 집 문간에서 나와

내 집 문간으로 드는 법인 걸

하지만 지금도 거리에 나서고 보면

내 못난 성정 탓인가

서울 지리 복잡하긴 마찬가지데

어지럽고 시끄럽긴 마찬가지데.

* 이은봉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창비시선 78 / 창작과비평사 / 초판 1쇄 1989.9.10. / 초판 4쇄 2004.8.5.) 84-85쪽


길은 처음에는 낯설고 복잡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법이다.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낯설기도 하다. 어느날 문득 내가 걷는 길이 낯설어질 때 이 시를 읽어보라. 길은 내 집 문간에서 나갔다가 다시 문간으로 들어오는 법. 내가 중심을 잡고 산다면 세상사 무에 무섭고 두려우랴. 아무리 서울길이 복잡해도, 정신만 차린다면.

==별똥별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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