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6. 9. 12. 21:31

창작의 기본 태도

-백현국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 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쓴 작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는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넷째는 자기만 감동시키는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 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 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공부하지 않는 습작 시인의 문제이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작품은 구조성이 중요하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 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 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끝으로 습작은 습작이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심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2005년 봄 계간 e문학 창간호>


출처 : 정자나무 그늘 아래 원문보기 글쓴이 : 바람숲
posted by 추월산
:
시 이야기 2006. 9. 12. 08:29

시인의 의무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번역: 박성창/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서구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전설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 신화에 따르면 시인(詩人)은 지옥의 괴물들을 순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시(詩)라는 것이 정말 그런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인들은 여러 민족간의 평화 증진을 위해 시인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기 위하여 세계시인대회의 깃발 아래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시인의 ‘의무’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의무’라 하는 것은 시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시가 갖추어야 할 것, 시의 도덕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 요소를 시인의 의무와 연결시켜 접근하는 것은 기존의 시인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임을 필자는 잘 인식하고 있다. 예로부터 시인은 신들이나 뮤즈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어 활동하는 존재라고 여겨져 왔다. 시인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렇듯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능력에 대한 책임을 논하기보다는 면책적 특성을 더 많이 부각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시인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또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결국 시가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되어 이러한 특수한 능력도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시인의 능력이나 빅토르 위고가 이야기했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논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시인의 책임에 대하여 논해야 할 때가 왔다. 시인에 대한 네오플라톤주의적 비유들, 예를 들어 ‘가벼움의 존재’‘날개를 가진’ 혹은 ‘성스러운 존재’ 등에서 벗어나 오늘날 시인들이 시를 쓰기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뼈를 깎는 행위’이며, 따라서 스스로에게서 오는 좌절감을 비롯한 다양한 방해요소로부터 끝없이 도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가며 지속해야 하는 행위인 만큼, 책무·짐·의무 등의 개념은 어떻게 보면 글쓰기라는 행위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첫 번째 의무는 언어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정성스럽고 섬세하고 특별한 시선으로 언어를 대하는 작가이다. 각 낱말의 의미를 치밀하게 되새겨 보는 사람, 그러나 각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잠재적 의미들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 스스로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언어에 스스로를 비춰 보며, 언어를 재배치하는 사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화려한 기억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언어의 적확성과 언어의 창조능력을 감지하는 사람이며 알파벳 스물네 자를 경건함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말라르메가 희망했던 것처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독트린,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시인의 첫 번째 의무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어를 안정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책임이며, 스스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책임이다. 이것은 또한 까다로운 글쓰기 작업의 소산물로서의 시가 ‘초자연적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 순간 그 시에 대해 가지는 책임이기도 하다.


시인의 두 번째 의무는 세상에 대한 의무로 깨달음과 관심의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세계 모두가 시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존재이다. 시인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대상에라도 눈길을 주어야 하며 침묵의 세계를 위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빵과 바구니, 무연탄을 위해서도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 우리만큼이나 여리고 찰나적인 이 대지를 대신하여 말한다. 시인은 연결하고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세계 속에서 실재를 만들어 낸다.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면, 포착한 관계가 진실된 것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시인이 아침과 저녁의 노을을 노래할 때, 먼 곳을 응시하거나 혹은 우리 가까이 있는 것들을 부각시킬 때, 혹은 실제로는 동떨어져 있는 현실들을 이미지를 통하여 연결시켜 표현할 때,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자취를 더듬으며 우리 존재의 자오선을 그려낸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 우리 존재의 경계를 긋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며,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기서 바로 시인의 경계선에 대한 의무가 생겨난다. 우리 삶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두 개의 심연 사이에서 이토록 소박하면서도 충만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말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것’에 시선을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경계선에 대한 의무, 그것은 기억과 제안의 의무이다.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시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존재하게 될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이중의 책임을 지게 된다. 현재를 구현하는 것, 즉 ‘우리는 어떤 시간 속에 존재하는가?’‘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시인의 소임이지만, 시인의 시선은 늘 보들레르가 표현한 대로 ‘심오한 시절’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과거의 사물들을 다루는 사람’(말라르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현재의 찰나적인 모습을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무’의 경계선 속에 위치시키고 그려내야 한다.


시인의 세상에 대한 의무는 타자에 대한, 동포에 대한, 혹은 후세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포들을 향해 말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언어들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에 끝없이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그들의 존재에 견고함을 부여한다. 즉자와 대자를 고찰하고, 동일한 것과 다른 것을 함께 바라보며, 모든 존재, 모든 사물들과 대면함으로써 ‘무엇이 본연의 것인가?’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 열정과 신중함과 고통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을 노래할 때, 우리 곁의 혹은 사라져버린 존재들을 노래할 때 그것은 사랑의 작업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진심으로 감동시키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의 의무가 된다. 시는 단순히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벌거벗은 마음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의무는 사고와 감성과 느낌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내적인 모든 것, 욕망과 생각과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옥타비오 파즈가 시인은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시인이 인류의 비인간적인 면까지, 우리의 내면을 충족시키는 것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공허함을 만드는 것까지 모두 포용하여 인류의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평과 찬사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요, 가치와 감성의 언어를 구가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숫자에 맞서 격조를, 억측에 맞서 운율을, 기계음과 장사치의 소음에 맞서 리듬을 살려내기 위해 저항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존재 안에서 혹은 존재를 통해서 일정한 품위를 구가하는 것, 고차원적 의미에서 존재와 환경이 일관성과 일체성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시인의 의무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인간정신을 성숙되게 하기보다는 분리시키고 멀어지게만 해온 사람들 사이에 연결점을 찾아주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관찰의 의무, 성찰의 의무, 깨달음의 의무, 관심의 의무, 특수한 시선의 의무 등 시인의 의무 중 상당부분은 결국 시인의 시선에 관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시선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자신의 시선을 펜으로 옮기는 것,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담아내는 것도 시인의 책임이다. 시인이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예언자이건 단순한 목격자이건, 시인은 자신의 시야 안에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트 뵈브 반박론(Contre Sainte-Beuve)에서 제안한 예술가의 정의를 상기해 보자.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가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추함과 무의미함의 베일을 우리 눈에서 걷어내는 사람,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무심해지게 만드는 그 베일을 걷어 내 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것을 보라, 이것을 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다.


1907년 ‘시인과 현시대’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위고 본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은 예술가를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모여드는, 그리고 모여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예술가는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초점이다. ‘예술가의 눈에는 눈꺼풀이 없는 셈이다.’


시인의 의무에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소 시대에 뒤진 듯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희망의 의무와 아름다움의 의무가 있다. 희망은 ‘절망의 에너지’에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쓰기라는 고된 작업을 힘겹게 지속해 가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희망을 끌어올릴 수 있다. 희망한다는 것은, 앙리 미쇼 식으로 정의한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는 신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글쓰기의 윤리에는 진실의 의무 외에도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작가란 심지어 그 자신의 저항과 반항마저도 지상의 조건을 더 잘 감내하기 위한 양분으로 쓰이게 하는 사람이다.

선(善)과 오랫동안 혼동되어 왔던 미(美),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감정과 윤리로부터 분리된 차갑고 냉혹한 여신으로 숭배했다. 랭보 역시 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조롱하였다. 모든 현대시는 상실과 전복, 수치와 살인 등 미와는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몇몇 현대 글쓰기에서는 추한 것,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것’을 의도적으로 모색하는 듯하다. 여기서 시는 출입금지(off-limits)와 혼동된다. 나는 독일 시인인 미셸 크루거의 말을 인용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


모든 시에 내재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애타게 갈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에 합류하고 싶어한다. …… 추한 것을 추구하는 자, 쓰레기를 추가하고자 하는 자들은 굳이 시라는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시인의 의무는 인간적인 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 그것을 보여 주고 가려내 주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려 주는 것이다. 시인의 임무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것보다 파괴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시는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혹은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의 존재 근거를 찾아 주고자 한다. 우리가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들을 고집스럽게 종이 위에 그려 가는 것이 바로 시이다.


우리의 삶을 조금 덜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들이 작위적으로 미화시키거나 사물의 진실을 속이는 대신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만큼의 꿈과 욕망이 존재하는지를 그대로 보여 주기를 원한다. 행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조건을 한 마디의 간결한 언어로 전달해 주기를 원한다. 삶과 죽음의 시간을 말해 주기를 원하고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삼켜 버리는 나락 속에 빠져 들지 않도록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벌거벗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진적이며 우리의 삶의 근거를 재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시가 그 궁극적 목표를 무엇이라고 천명하든, 시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짚어보게 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대면시키고, 시간의 축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비시킴으로써,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구분해 줌으로써, 시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드러내 준다. ■






출처 : 문학들 원문보기 글쓴이 : 김경윤 / 다음카페 [문학들]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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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2006. 9. 11. 14:54

시 쓸 때 알아둘 일 / 이상인 / ‘문학들 다음카페’에서 가져옴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 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을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노트> [시안] 2002년 봄 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 만하다.



<추기> 다음은 <시안)2003년 봄호에 실린 박남희의 신인상 예심평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심사과정에서 제외된 작품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결점을 안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1)알맹이는 없이 장식적인 어구를 구사하고 있는 경우

2)미처 객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감상성이나 관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경우

3)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빤한, 평면적인 상상력에 기대고 있는 경우

4)치기 어린 사랑시에서 못 벗어나 있는 경우

5)너무 낯익고 관습적인 묘사나 비유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

6)시와 산문의 차이점을 모르고 평면적인 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경우

7)<-하노라> <-구나> <-어라>등과 같이 의고체나 감탄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경우, 등인데

8)개중에는 앞부분의 몇 작품은 괜찮은데, 중 후반부의 작품들이 편차가 너무 심해서 제외된 경우도 있다.



<추기) <현대시> 2002년 5월호에 실린 오세영시인의 다음 말에도 귀를 기울이자


첫째는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시는 무의미다, 유희다, 그런 입장과 변별되지요. 시는 일단 진지하게 쓰는 거라는 것이 나의 첫째 원칙이예요. 둘째는 시의 원리는 건강성이라고 보는 거죠. 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기여해야지, 인간의 존재를 해체하고 감수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건강한 정서는 시의 아름다운 덕목 아닐까요? 셋째는 아름다운 것을 쓴다는 입장이예요. 아름다운 것만 가지고 써도 다 못 쓰잖아요. 굳이 혐오스럽고 추한 것까지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문제고요. 마지막으로 넷째 원칙이 있다면 쉽게 써야 한다고 봐요.


....독선적으로 문학이 아닌 하나의 이념을 고수한다든지, 시류에 속박되어 버린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가령 한바탕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지나갈 때도 그러했지만, 요즘도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앞선 시인의 아류적 모방이거나 시류적 타협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맹목적으로 시적인 기류에 섞여드는 것은, 창조적 상상력을 오히려 구속하고 억압하는 획일화의 한 예가 될 수 있지요.(... 획일화된 사유는 안됩니다.)



<추기>평론가 박재열은 <포에지>2001년 겨울호에서 멜로우 포에츄리의 예로서 다음 몇 가지를 들었다.


1)잠언이나 금언 경구 같은 것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

* 시인 황동규는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아포리즘으로서 유머와 슬픔의 반경 안에 들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정록의 "슬픔"의 전문인, '열매보다 꽃이 무거운 생이 있다'를 들어 보이면서 '그러나 이 멋진 아포리즘은 시의 근원인 노래에서 멀어지기 쉽다'고 지적한다.

2)대상 자체의 물질성이나 즉물성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 자신이 즐겨쓰는 시어에 의탁하여 통속적인 정서를 불러내는 것

3)이미 여러 시에서 도식화해 놓은 등장인물, 주제, 시적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

4)도식적으로 소재를 인식하는 것, (양식화한 자연관, 이분법적 사고와 고식적인 태도를 포함한다)



<추기>

.......그(윤동주)는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 하지를 않았다.....


위와 같이,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2년 후배인 정병욱씨가 1976년 <나라사랑> 23호에 발표했던 회고담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강인한 시인은 "시의 어법이 결국은 합리적, 보편적 상식과 바른 문장 표현으로부터 출발한다" 는 점을 강조했다.(현대시 2002년 7월호)



<추기> 시인 송수권은 자선시집 <여승>에 실은 배한봉 시인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시는 사유재산이고 비밀재산이에요. 그런데 대중을 상대로 유통언어를 얼마나 많이 뿌리는가요? 그런 시를 나는 '뽕짝조' 타령이라고 부르거든요. 그것이 카페정서지 민족정서라곤 볼 수 없어요. 대학 강단에선 언급도 안되는 시들이 바깥 세상을 얼마나 오염시키는가요. 베스트셀러 시집들의 속성이 그렇잖아요. 말초적 감각을 흔드는..., 그래서 잘 팔리는 시인들이 따로 있지요. 이런 현상은 저널리즘이 문제입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시를 보는 눈이 천박한 독자 수준을 넘지 못해요. 문창과 신입생들에게서 이 유통언어를 걷어내는 데 1년이 넘게 걸려요. 또 사회교육원 시 전문반만 해도 뽕짝조에 물들어 자기 사적인 비밀언어를 무덤 쓰고 살아요. 시가 기본수준도 안되는 원인이 이 때문인 줄 모르니 여고생 때 썼던 시를 평생 쓰고 있는 우스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추기> 시인 유용주의 다음 "고백"을 들어보자


.....참 부드럽고 아늑하고 겉보기에 풍성한 곳을 많이도 찾아 다녔다네. 사근사근 혓바닥에 구르는 당의정처럼 독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연애시의 마을, 자기가 쓰고도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른 해독 불가능한 난해시의 패거리, 요설과 장광설 하나로 포스트모던의 적자임을 강조하는 외국 입양을 못해 안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임, 엄살과 광기로 얼룩진 반장들 동네, 공식을 만들어 놓고 언어를 조립하는 조립식 건축업자들의 단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도사풍의 시, 끊임없이 남의 시를 조금씩 베끼는 쥐새끼들의 시, 주제만 너무 주장하다가 그 주장에 치어 저도 감당하지 못할 말을 주저리주저리 동어반복하는 사람들까지 수없는 마을과 동네를 기웃거렸다네.

한때는 그 사람들과 들고나면서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 배면에 깔려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 모시고 섬기는 일에 너무 인색해. 모두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지금 말한 내 말도 내가 그런 과정을 거쳐 오면서 부화뇌동했다는 고백을 하기 위함일세.

-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



<추기>오늘의 우리 시를 읽는 대중들은 김소월을 뛰어넘지 못하는 소박한 수준임에 비추어 정지용 이상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의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시들을 한두 편 예로 들면 대체로 이런 부류의 시들이다.


①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 뛰어든 / 나는 / 소금인형처럼 / 흔적도 없이 / 녹아 버렸네


② 그대를 만나던 날 /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 따뜻한 배려가 있어 /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 오래 사귄 친구처럼 /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①은 류시화의 '소금인형' ②는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시들이다. 그래도 류시화의 경우는 깊이 있는 명상을 동반하는 시이므로 나은 편이지만 용혜원의 경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을 겨냥한 얄팍한 감상주의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것을 한 꺼풀 벗기면 에로틱한 연애편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글에선가 이승하 시인이 지적했듯이 류시화의 시는 이 땅의 현실이 완전히 제거된 신비주의적 명상 내지는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고, 목사 시인인 용혜원의 시는 소녀적인 감상을 포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둘 다 상업적인 전략의 차원에서 쓰여진 시라 할 것이다


- 강인한 '시와 시인, 독자와 시의 거리'―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중에서


<추기> 시는 언어예술이기에 시인은 말을 잘 부릴줄 알아야 한다. 또한 시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이른바 진정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참신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시와는 다른 목소리와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런 것들이 또다른 시와의 변별성이며 개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의 모험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얻어지는 것이 시의 독창성이며, 시의 진실이며, 시의 감동이며, 시의 진정한 모습으로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다.

- 제13회 <시와 사람> 신인상 심사평 중에서



<추기>...딸의 신발이 작다고 신발을 벗기고 발가락을 자르는 아버지, 내 몸을 둘둘 말아 접시에 올려놓았더니 나를 집어 먹으려는 어머니, 몸이 기우뚱거리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자신을 쾅쾅 박아달라는 딸..., 그러나 여성시에 관한 한 이런 진술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조말선의 시에는 박서원의 자기 신체 훼손, 노혜경의 카니발리즘, 김언희의 도발적 상상력 등 선배 여성시인들의 언어가 큰 변주 없이 한 집에 모여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의 낡음이 사유의 낡음과 무관하지 않다면, 언어의 답습은 적지 않은 결함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한국시에 관한 한, 서정적 경향의 시라고 분류되는 것에는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한다. 대체로 자연친화적이고, 복고적이며, 전근대적 삶에 향수를 느끼고 있고, 세계의 불화나 갈등 보다 화해나 조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안이한 감상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단에서 여전히 주류를 점하고 있는 이러한 시들의 생산은, 정치적 현실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던 제도권 문학의 탓도 있지만, 최근 생태주의적 인식의 대두에 고무되어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다...안이한 서정시일수록 세계의 복잡다단함과 폭력성을 직시하기보다는 대상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사고에 기울어지는 추세가 있다. 그를 위해 순진무구한 자아를 설정하거나, 세계와의 합일이 가능한 시대나 지역이라고 생각되는 전근대 또는 문명화되지 않은 영역이 등장하는 경향이 한국 서정시에 빈번하다.

- 정문순 (다층 2002년 겨울호 '2002년 시를 점검한다' 중에서)



<추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도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 신경림, 시집<뿔>에 실은 '시인이라 무엇인가' 중에서



<추기> 다음은 시의 문장에 관한 이희중의 글이다.


시에 쓰이는 문장이 모두 통사적으로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까다롭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래야 한다도 대답할 수밖에 없다.일상의 말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명하게도 시가 요구하는 통사적 완성은 표현을 제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요청된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표현할 통사구조를 구하지 못했을 때, 또는 정확한 전달을 원하지 않을 때, 통사적 완성을 포기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은 이를테면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도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할 때도 생기므로.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3,4월호에 실린 평론가 이재복의 글이다.


요즘 젊은 신인들의 가증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시어의 요설과 사설이다. 언어를 응축하고 갈고 닦아 가려서 조금씩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생각들을 가감없이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린지 오래다. 시적 환경의 변화가 그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고 파편화 되어가는 시대에는 오히려 이런 식의 어법이 더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시어의 요설과 사설로 인해 고전적인 시의 양식이 가지는 응축과 균형의 묘미를 잃어감으로써 운문의 참맛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추기> 다음은 산문집 <멀리 보이는 마을>에 있는 최하림의 말이다.


명사나 동사, 형용사만을 중시하지 말아라. 현 편의 시에서는 토씨도 명사나 동사 이상으로 율조에 큰 역할을 하며 울림에 크게 기여한다.


<추기> 다음은 평론가 이형권이 쓴 김선태시 <동백숲에 길을 묻다>의 리뷰에서 발췌했다. 따라서 인용된 시는 모두 같은 책에 실린 김선태의 시이다.


1)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남도의 봄 연애사태여, 그리하여 나도 대지 위에 벌렁 누워 뒹굴고 싶은 아흐, 더는 참을 수 없는 봄의 오르가슴이여 ("봄의 오르가슴' 부분)


사실 감탄사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그 영향권 내에 있는 시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감탄사는 명징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거나 지적인 인식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발되는 수준이 아니라면 감탄사는 낭만적 감정이나 서정적 영감을 드러내는 데 여간 유요한 게 아니다. 이 시에서 사용된 감탄사 '오호라'와 '아흐'는 시상을 고양하여 여운은 길게 늘어뜨리는 데 긴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딱따구리 소리 또 한 번 딱따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울음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소리" 부분)


'딱'은 의성어이자 의태어이다. 새가 내는 소리의 한 부분으로 들을 때는 의성어이지만,아귀가 잘 드러맞는다는 뜻으로는 의태어 구실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상징어로서 '숲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인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물소리'등이 '하나'로 조화된 국면을 형상화하는 데 적잖은 효과를 발휘한다.


3)마음은, 지금, 어느, 남쪽, 섬, 기슭, / 한, 마리, 갯고동, 처럼, 엎으러져, 있어라("마음의 거처" 전문)


불과 12단어(혹은 어절)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쉼표가 11개나 사용되었다. 이 쉼표들은 시의 중심 매타포인 '갯고동'의 생리를 적실히 드러내는 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쉼표가 일반적인 용법에서 벗어나 시상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3년 5,6월호에 실린 정한용의 글 중 부분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힘차게 빨아들이던 희망/ 돌밭에 뿌리 드러내고 아침처럼 서 있는 나무/텅빈 허공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헛된 뿌리/ 날선 빛들로부터 얻은 굳은 상처/'

(시의) 각 시행이 거의 전편에 걸쳐 수식어구와 피수식어로 이루어져 있어 답답하다. 이런 수식은 시인이 대상을 묘사하면서 자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데에서 오는 오류이다. 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상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감상폭을 옥죄는 감옥이 된다.


<추기> 다음은 [시와 사람] 2003년 여름호에 실린 신인작품심사평의 일부이다.


이상하게도 비슷비슷한 시들이 많다. 곁보기에는 매끈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알멩이가 없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대학안팎의 각종 시창작강의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쓸것인가는 배워서 아는데 무엇을 쓸것인가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에 대들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요컨데 억지로 만든 시에 삶의 무게가 실릴 턱이 없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7,8월호에 실린 이승훈시인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시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관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심낱말을 반복하고 혹은 변주하는, 그러니까 결국은 동어반복의 세계이다. 최근의 우리의 시가 재미없는 것은 이런 미학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안하고 무슨 말들만 많이 하면 시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승훈 시인은 이 글에서 '낱말을 반복하라', '구와 절을 반복하라', '문장과 연을 반복하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추기> 다음 두 글은 [시안]2003년 가을호에 실린 신인상 심사평이다.


세련된 언어감각은 정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유나 감정이나 관찰이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지 않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는 허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는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시에서 인정되는 애매모호함이란 것도 실은 단순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의미나 느낌의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세공하고 조탁하려는 큰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는 곧 사유와 인식의 정확함을 높이는 노력이 될 것이다.(이남호)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창조행위다....따라서 시를 구성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한번은 써먹었음직한 상식적 언술의 사용은 피하는 것이 좋다.

작품중에는 산문체시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유행처럼 관례화되어 시의 긴장감과 응축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행 구분을 하지 않고 산문시 스타일로 이어가는 것은 병폐라 아니할 수 없다.

....형식의 절제가 필요하다. 긴 시행은 반으로 줄이고 시행의 수도 삼분의 이로 줄여보라. 시는 서정이지 서사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시상의 포인트를 중심으로 잔가지를 쳐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있었다>라든가 <-했네>등의 과거형 어사를 남발하는 것도 시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이숭원)



<추기> 다음은 월간 [현대시] 2003. 10월호에 실린 이은봉 시인의 말이다. 시인은 프로시인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지만, 구태여 프로시인에게만 한정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프로시인은 절제된 가운데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시를 쓰려면 무엇보다 시인이 저 자신의 고유한 언술방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읽어도 누구의 작품인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가령 신경림 시인이나 고은 시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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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2006. 9. 11. 10:38
털어내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김 성 중(광주제일고 교사)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시인, 1970> 전문


우리네 삶에서 털어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스스로들 위안하고 살지만,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고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얼마나 존경스럽습니까?

김준태(1948년 해남 대지리에서 태어남)의 [참깨를 털면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이 시는 그가 1970년에 조태일 시인(2000년 작고)이 펴내던 《시인》이라는 잡지에 발표했던 것인데, 그의 첫시집『참깨를 털면서』(창작과 비평사, 1977)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 시를 발표하고 얼마 뒤에 시인은 더러운 제국주의자의 전쟁인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전쟁의 비참함을 털어댑니다. 지금은 농촌에서도 참깨를 터는 일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수입산 참깨가 우리의 식탁을 점령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진짜참기름임'을 선전하는 참기름을 먹고 삽니다.

시인은 '희한하게도' 참깨를 털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사에서 느끼기 어려운 쾌감'을 참깨를 털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도시생활(대학생활)에서는 느끼지 못하고 시골에서만 느끼는 즐거움입니다. 시골은 시인에게 어머니의 품 같은 고향입니다. 도시의 삭막함이나 비정함이 아니라 푸근한 할머니의 인정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신바람이 나고, 참깨를 작신작신 두들겨패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할머니의 꾸중을 들으면서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 하지만, 시인은 참깨를 터는 것만으로도 세상사의 온갖 잡다한 번뇌를 잊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물론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을 두들겨 패고 고문하고 쥐어짜서' 정보를 얻어내려는 사악한 정권의 음모를 알레고리 수법을 써서 고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도시는 인간을 비정하게 만듭니다. 시골의 논과 밭에서 느끼는 따뜻함이나 정직함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효율성만을 지고의 가치인 양 우리들을 세뇌시키며 무한경쟁의 속도전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우리의 학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이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처럼 금방 성과가 드러나지 않으면 무능력한 교사나 뒤처진 학생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교실마다 들어왔거나 들어올 컴퓨터를 등에 업은 멀티시스템이 우리 교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7차교육과정이 우리 교사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수월성만을 추구하는 7차교육과정에는 인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학급공동체를 이야기하는 교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촌놈이 되어버립니다. 탐욕스런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정책만이 관류하는 7차교육과정을 인간의 체취가 풍겨나는 인간교육과정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김준태는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에서 우리에게 신바람 나는 참깨털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털어도 털어도 쏟아지는 참깨는 우리를 고소하게 합니다. 전영택의 소설「화수분」에 나오는 화수분, 아무리 끄집어내도 끝없이 재물이 나온다는 단지처럼, 우리 교사들이 털어내야 할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교육'이 아닐까요?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참깨처럼 쏟아지는' 정말로 우리 사회를 살맛나게 하는 그 무엇으로 가득찬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을 우리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꾸 물음표만 던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김준태의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이 시를 읽습니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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