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08.10.15 :: 정희성-언덕 위의 집 외
  2. 2008.10.01 :: 유하 시 읽기
  3. 2008.09.05 :: 시인의 의무
  4. 2008.06.26 :: 고재종의 쪽빛 문장 외
시 이야기 2008. 10. 15. 19:47

대표시

언덕 위의 집

정희성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문을 낮게 낸 것일까

무심코 열고 들어서다

이마받이하고 눈물이 핑 돌다

낮게 더 낮게

키를 낮춰 변기에 앉으니

수평선이 눈썹에 와 걸린다

한때 김명수 시인이 내려와 산 적이 있다는

포항 바닷가 해돋이 마을

물이 들면 언제고 떠나갈

한 척의 배 같은

하얀 집

내가 처음 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썹에 걸린 수평선

출렁거릴 따름이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을 낸 것일까

머물다 기약 없이 가야 할 자들

엉덩이 까고 몸 낮춰 앉아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함일까



*민박집 명함에 쓰인 이 글귀는 누구의 시구일까.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시선 291/창비/2008.8.30.초판 1쇄) 58-59쪽


[발문]

1.주인은 왜 이마받이할 정도로 문을 낮게 냈을까?

2.변기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은?

3.해돋이 마을의 배 같은 하얀 집은 어떤 집일까?

4.화자가 바닷가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5.주인은 화장실에 왜 바다를 향해 창을 냈을까?

6.화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엉덩이를 까고 똥을 누고 있다. 배설하면서 원초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원시의 바닷가에서.



[감상]

바닷가 언덕 위의 집 화장실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배설을 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면서 문을 낮게 낸 주인의 생각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수평선을 내다보겐 창을 낸 주인의 마음을 도 헤아려보면서 ‘잠시 머물다가 기약없이 가야할 자들이 몸 낮춰 앉아 똥을 누면서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한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시원을 생각할까. 하늘과 맞닿은 곳을 바라보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질까.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곳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아마 수평선은 평등한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수평선처럼 평등하게 자연처럼 살아갔으면 좋겠다. 하얀 집 배를 타고 저 망망대해 평등의 바다로 갔으면 좋겠다. 권력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그런 무욕의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태춘의 노래가 생각난다.

똥을 누면서 원초적인 자연인 바다를 바라보게 창을 낸 주인의 혜안이 존경스럽다.



더 읽을 시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시선 291/창비/2008.8.30.초판 1쇄) 44쪽


[감상] 얼굴이 저절로 붉어진다. 신부님도 그렇고 화자도 그렇다. 시를 읽는나도 그렇다. ‘젓’과 ‘젖’은 다 [젇]으로 발음한다. 그런데 이어서 읽으면 [저시]와 [저지]로 다르다. 그런데도 묘하게 자매님의 ‘젓’이 ‘젖’으로 읽히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이것이 언어의 유희가 아닐랑가. ‘젓’을‘과 ’젖을‘ 다 [저슬]로 읽고 싶은 마음을......



다른 시집의 시 1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정희성 시집 [詩를 찾아서](창비시선 207/ 2001.6.5 초판 1쇄/2008.8.14 초판 6쇄) 41쪽


[감상] 세상은 고요해졌다.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외치던 시절도 지나갔고, 최루탄이며 지랄탄을 쏘아대던 시절도 아니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진 자들이 저항하고 있고, 저항은 그들의 밥과 권력이 되었지만, 화자와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도 하지 못한다. 이제 벗들은 말수가 적어졌고 세상은 뜨거운 한여름의 한낮처럼 고요해졌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가?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 이후 무너져버린 중산층의 신화는 언제나 회복할 수 있을까? 자본에 묶여버린 우리 얼간이들의 무력한 모습을 본다. 2008년 오늘은 더 험하지 않을까?

다른 시집의 시 2

시를 찾아서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화암사엔

절 없이 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시집 [詩를 찾아서](창비시선 207/ 2001.6.5 초판 1쇄/2008.8.14 초판 6쇄) 12-13쪽


[감상]이파리와 꽃대궁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처럼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곱디 고운 신심이 곧은 우바이처럼 시 또한 고운 자태로 시장바닥을 걷고 있다.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진흙탕에서도 연꽃은 하얗게 피어나듯이. 시는 이렇게 곱고도 순수한 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참고 : 우바새[優婆塞, upasaka](산스크리트 upāsaka는 '받드는 사람'이라는 뜻) - 석가모니를 신봉하는 재가 신자. 여성 재가 신자는 우바이(優婆夷 upāsikā)라고 한다. 원래 출가 교단의 성원이 아닌 불교 신자를 통칭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는 재가 신자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서원을 세우고 매주 휴일마다 절에 다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된 이래 사람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남녀, 종족, 사회적 계급·신분 등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누구든 오로지 삼보(三寶) 곧 부처(佛), 부처의 가르침(法), 부처를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僧) 등을 인정하기만 하면 불교 신자가 된다. 불교의 재가 신자는 살생하지 말 것, 훔치지 말 것, 음행을 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 등의 5가지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함으로써 출가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것이 기본 역할이다. 동남아시아의 상좌부불교 전통에서는 종교적인 길에 있어 재가자와 출가자를 구분하여 대개 정신적인 해탈, 곧 열반의 성취는 오로지 세속적 생활을 포기하고 출가해야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티베트와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그와는 달리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면서도 훌륭한 정신적 지도자가 다소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출전 - 다음 백과]



추천시

황제 펭귄

박형준



얼음이 단단해지는 남극의 겨울이 오면 황제 펭귄바다에서 내륙으로 이동한다. 포식자를 피해 짧은 다리로 빙산을 타고 얼음길을 걸어 바람막이의 안전한 평지를 찾아 100㎞를 이동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의처럼 짝짓기를 끝내고 암컷은 알 낳기에만 몰두하여 몇 주 후에 주먹 크기만 한 알을 낳는다. 암컷은 힘을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어 수컷에게 넘긴다.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기기 위해 수컷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신속하게 알을 건네준다. 수컷의 짧은 두 다리 사이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이 속에서 알은 안전하게 부화의 과정을 거친다. 암컷들은 다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때부터 수컷들의 순례의 행진이 시작된다. 눈보라와 영하 60℃의 강추위 속에서 수백만 마리의 수컷 펭귄들이 다리 사이에 알을 끼우고 암컷들이 떠난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을 지키기 위해 둥그렇게 뭉쳐 서로를 보호한다. 온몸이 눈보라에 뒤덮인 채로 어둠 속에서 백야의 무덤이 되어간다.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펭귄들은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들은 그렇게 2개월 이상을 보낸다. 드디어 순례의 정점에서 새끼들이 부화하고 수컷들은 되새김질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여주지만 그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한계에 도달한다. 바로 이때 저 멀리 바다에 가 있던 암컷들이 입안에 가득 먹이를 지닌 채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암컷들의 실루엣에 커다랗게 원을 이루면서 뭉쳐 있던 수컷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짝을 부른다. 2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암컷들은 자신의 짝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입에 가득 문 먹이를 품은 채 뒤똥거리는 다리로 수컷과 제 새끼에게 안겨든다.


보도승들에겐 흔히 Emperor라는 칭호가 붙는다.

피안의 황제들은 자신을 침묵 속에 열어놓고

자신의 고독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봄은 의지로 온다.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 2008.5.10 초판 발행) 184-185쪽


[감상]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다. 봄은 ‘의지’로 온다. 살려는 자들의 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독한 세월을 버팅기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극한의 세계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황제 펭귄의 부성애와 모성애를 단지 본능만으로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짧은 다리로 뒤똥거리며 100㎞를 걸어서 바람을 막아주는 평지를 찾아서는 알을 낳고 암컷은 원기를 회복하려고 100㎞를 되돌아서 바다로 가고, 수컷은 2개월 이상을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하 60℃의 강추위 속에서 알을 품고서는 부화시키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 어디 있는가. 수백만 마리의 수컷 황제펭귄들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서는 알을 품는 장면은 백야의 무덤이면서도 엄숙하고 장엄하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우리 인간이 절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먹이를 입에 가득 문 채 암컷이 돌아오고서야 수컷들의 순례행진은 끝이 난다. 이제 펭귄 가족은 살맛이 나는 것이다.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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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
시 이야기 2008. 10. 1. 21:34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

-어떤 배나무숲에 관한 기억


압구정동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카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그 옆은 뭐, 매춘의 나영희가 경영한대나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 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며 펜트하우스를 팔고 다니던,

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

교환하던 녀석, 배나무숲 너머 산등성이 그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

피식, 벌거벗은 금발 미녀의 꿀배 같은 유방 그 움푹 파인 배꼽 배……

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

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

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

유령처럼 축구를…… 해골바가지…… 난, 자식아, 여기 최후의 원주민이야

그럼 난…… 정복자인가? 안개 속 한남동으로 배추 리어카를 끌고 가던

외팔의 그애 아버지…… 중학교 등록금…… 와르르 무너진 녀석의

펜트하우스, 바람부는 날이면 녀석 생각이 배맛처럼 떠올라 압구정동

그 넓은 배나무숲에 가야 했다 그의 십팔번 김인순의 여고 졸업반

휘파람이 흐드러진 곳에 재건대원 복장을 한 배시시 녀석의 모습

그 후로부터 후다닥 梨田碧海된 지금까지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디서

배꽃 가득한 또 다른 압구정동을 재건하고 있는지…… 바람부는 날이면

배맛처럼 떠오르는 그애 생각에 배나무숲 있던 자리 서성이면……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수많은 배들이…… 지금

이곳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배로 한꺼번에 쏟아져들어가 배나무보다

단단한 배포가 되었을까…… 배의 색깔처럼…… 달콤한 불빛, 불빛

이 더부룩한…… 싸늘한 배앓이…… 바람부는 날이면……



*유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 시인선 104/초판 1쇄 1991.4.14/재판 11쇄 2005.3.11) 60-62쪽


[발문]

1. 압구정동은 어디에 있는가?

2.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카페의 역할은?

3.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은 어떤 가게일까?

4. 펜트하우스는 무엇인가? -포르노잡지, 원래는 전망이 좋은 방이나 집.

5. 배밭은 왜 사라졌는가? -

6. 최후의 원주민은 무슨 뜻인가? -

7. 시의 화자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는 이유는 ?

8.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 인간의 욕망, 자본, 부동산

9. 시의 화자의 배앓이의 원인은?


[감상]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배밭이나 과수원이 사라진 곳에 생긴 압구정동! 한명회가 놀던 압구정(鴨鷗亭)은 흔적도 없어지고 정자 이름만 남아있는 동네, 압구정동(狎鷗亭洞). 지금은 아파트촌.

중학교 때 양아치란 별명의 그 애는 ‘펜트하우스’라는 포르노 잡지를 팔아서 학비를 마련했고, 그 애의 외팔이 아버지는 배추를 팔러 한남동으로 리어카를 끌고 갔다. 그 애의 펜트하우스(전망 좋은 집, 언덕 위의 달동네 집)는 도시개발로 무너져 없어지고 현대아파트 대림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조성됐구나.

나는 지금도 그 친구가 생각나지만 만날 수 없다. 최후의 원주민이 정복자의 불도저에 정복되던 날 이후, 그는 배꽃 가득 핀 또 다른 압구정동을 재건하고 있는지 모른다. 배꽃이 피던 그 시절은 그래도 시인에게는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인간미가 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어버리고’, 배포만 커진 사람들이 피우는 달콤한 유혹의 불빛에, 시인은 소화불량이 되어 싸늘한 배앓이를 하는 것이다. 압구정동은 시인에게 양가적이다. 욕망의 통조림이기도 하지만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애와 더불어.

더 읽을 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

유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논 빨간 책, 육체와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 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짓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청춘의 레지스탕스, 지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生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

별빛의 찬란함으로 팔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애꾸눈으로 사랑하리


*유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 시인선 172/초판 1쇄 1995.10.27/초판 5쇄 1996.12.5) 92-93쪽


[감상]

세운상가(世運商街)는 서울 종로 3,4가에 있는 종합상가로서 1968년에 김수근이 디자인하고 김현욱 시장이 건립한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이후 세운상가는 서울의 유일무일한 종합 가전제품 상가였다. 특히 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987년 저작권법이 도입되기 전 한동안 소프트웨어를 카피하는 카피점이 성행했다. 세운상가 사람들이 모이면 잠수함이나 핵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서울시는 1987년 용산전자상가를 조성하여 상가를 이전하기로 했고 90년대 이후 대부분이 이동하여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아직도 전자 상가들을 비롯하여 전자 부품, 중고 가전제품 등 18,000여개의 가게들이 있으나 세운상가는 2008년 하반기부터 철거하여 새로운 상가를 건축하기로 되어 있다.

키치문화와 하위문화가 꿈틀대는 세운상가에서 청춘의 열병에 몸부림치는 하이틴이 떠오른다. 온갖 것들이 복제되는 세운상가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넋을 본다. 절망하며 욕정에 시달리며 학교를 저주하던 반항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진리가 발가벗어버린 곳에서 ‘나’는 허무의 블랙홀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을 유희하는 사유의 야바위꾼이 되어버렸다. 1970년대 후반의 유신치하에서 박제된 지식만을 외우게 하던 학교와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런 뒤틀린 청춘을 생산해낸 것은 아닌지.

시인은 지금도(1995년) 해적판으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세운상가 아이들은 애꾸눈으로 세상을 본다. 온전히 눈을 뜨고서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세상.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금지된 것이 많으므로, 십대의 고등학생보다 더 나으리라고 말하지 못하리.



추천시

천일馬화-변마의 독백

유하


내 이름은 돈벼락. 통산 전적 68전 2착 세 번. 그나마 그 중 하나는 수년 전 단거리 경주 때 도주 후 버티기 작전으로 겨우 따낸 것.

혈통? 나의 父馬는 뉴질랜드 변두리 경마장에서 바닥을 쓸다 사라진 부진마였다

주행 습성은 추입. 각종 예상지의 경주 평가란엔 후미 탐색이라 적혀 있다. 말이 좋아 후미 탐색이지 실상은 해찰하며 동료들의 꽁무니를 좇았을 뿐이다.

데뷔 시절. 나의 脚質은 도주였다. 땅! 소리와 함께 단독 선행으로 질풍노도처럼 튀어나가지만, 직선 주로에 접어들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나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 후 나는 거세마가 되었다

요즘 나는 질주가 싫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이 돌고 도는 말의 원형 트랙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자는 불행하다. 세인들은 그를 똥말이라 부른다.

나는 주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내가 말이기를 멈추는 순간, 나는 불용 처리되어 단돈 몇 푼에 식용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그런 나에게 꾸준히 돈을 거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그는 최근 한국 사회의 便馬性을 풍자한 「천일馬화」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다. 경마장 안팎으로 쉬지 않고 질주하는, 똥말 똥시인 똥감독 똥교수 똥기자 똥정치……

하긴 대한민국 경마장 말치고 똥말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사내는 3년 전부터 나를 추적해왔다. 그가 나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나 같은 똥말만이 그에게 999배당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사내는 마권을 산 후 전광판을 바라보며 깊게 담배를 빤다. 밀린 세금이, 마권처럼 구겨진 청춘이, 떠나간 애인이 빠르게 배당판을 스쳐간다.

나를 사랑한 자들은 모두 그랬다. 어디 한 군데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채 표표히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세속의 온갖 말들의 후미에서 해찰하는, 불용 처리 직전의 부진한 말들만을 사랑하는 게 그의 업이기에.

그는 말의 고배당만을 노리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경주는 새로이 시작되고, 욕망은 지연된다. 나의 질주는 반복되고 누군가는 또다시 나를 기다린다. 결승선 전방 어디쯤 후미 그룹을 형성하다 벼락처럼 치고 나오는 짜릿한 나의 모습을.

두두두두두 똥말은 달려간다. 천일마화여, 두두두두 마각을 감춘 채 세상의 똥말들은 쉬지 않는다

나의 왕인 고객이시여, 아직은 칼을 거두소서.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나는 여전히 후미 탐색 중이니까요. 기다림을 멈추지 마세요. 언젠가는 대박을 안겨드릴 거예요

그럼요, 멋지게 인생을 역전시켜드리겠어요



*유하 시집 『천일馬화』(문학과지성 시인선 250/초판 1쇄 2000.11.17./초판 2쇄 2002.5.10.) 37-39쪽


[감상]

경마장에서 생긴 일. 경마장에 가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지만, 경마장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을 탕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시인은 똥말에게 배팅하며 3년째 경마장에 드나들고 있다. 이시의 화자는 경주마다. 경주마의 애환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생에 대한 은유다. 경주마가 트랙을 돌듯이 우리네 인생도 직장을 중심으로 불용처리가 될 때까지 돌아야 하는 경주마와 무엇이 다르랴. 인생역전을 꿈꾸며 로또복권을 사보아도 늘 비켜가는 것.

아무리 폼을 잡아도 언제나 똥폼인 것을.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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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2008. 9. 5. 10:41

시인의 의무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번역: 박성창/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서구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전설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 신화에 따르면 시인(詩人)은 지옥의 괴물들을 순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시(詩)라는 것이 정말 그런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인들은 여러 민족간의 평화 증진을 위해 시인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기 위하여 세계시인대회의 깃발 아래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시인의 ‘의무’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의무’라 하는 것은 시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시가 갖추어야 할 것, 시의 도덕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 요소를 시인의 의무와 연결시켜 접근하는 것은 기존의 시인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임을 필자는 잘 인식하고 있다. 예로부터 시인은 신들이나 뮤즈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어 활동하는 존재라고 여겨져 왔다. 시인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렇듯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능력에 대한 책임을 논하기보다는 면책적 특성을 더 많이 부각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시인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또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결국 시가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되어 이러한 특수한 능력도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시인의 능력이나 빅토르 위고가 이야기했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논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시인의 책임에 대하여 논해야 할 때가 왔다. 시인에 대한 네오플라톤주의적 비유들, 예를 들어 ‘가벼움의 존재’‘날개를 가진’ 혹은 ‘성스러운 존재’ 등에서 벗어나 오늘날 시인들이 시를 쓰기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뼈를 깎는 행위’이며, 따라서 스스로에게서 오는 좌절감을 비롯한 다양한 방해요소로부터 끝없이 도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가며 지속해야 하는 행위인 만큼, 책무·짐·의무 등의 개념은 어떻게 보면 글쓰기라는 행위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첫 번째 의무는 언어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정성스럽고 섬세하고 특별한 시선으로 언어를 대하는 작가이다. 각 낱말의 의미를 치밀하게 되새겨 보는 사람, 그러나 각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잠재적 의미들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 스스로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언어에 스스로를 비춰 보며, 언어를 재배치하는 사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화려한 기억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언어의 적확성과 언어의 창조능력을 감지하는 사람이며 알파벳 스물네 자를 경건함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말라르메가 희망했던 것처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독트린,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시인의 첫 번째 의무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어를 안정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책임이며, 스스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책임이다. 이것은 또한 까다로운 글쓰기 작업의 소산물로서의 시가 ‘초자연적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 순간 그 시에 대해 가지는 책임이기도 하다.


시인의 두 번째 의무는 세상에 대한 의무로 깨달음과 관심의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세계 모두가 시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존재이다. 시인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대상에라도 눈길을 주어야 하며 침묵의 세계를 위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빵과 바구니, 무연탄을 위해서도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 우리만큼이나 여리고 찰나적인 이 대지를 대신하여 말한다. 시인은 연결하고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세계 속에서 실재를 만들어 낸다.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면, 포착한 관계가 진실된 것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시인이 아침과 저녁의 노을을 노래할 때, 먼 곳을 응시하거나 혹은 우리 가까이 있는 것들을 부각시킬 때, 혹은 실제로는 동떨어져 있는 현실들을 이미지를 통하여 연결시켜 표현할 때,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자취를 더듬으며 우리 존재의 자오선을 그려낸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 우리 존재의 경계를 긋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며,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기서 바로 시인의 경계선에 대한 의무가 생겨난다. 우리 삶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두 개의 심연 사이에서 이토록 소박하면서도 충만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말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것’에 시선을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경계선에 대한 의무, 그것은 기억과 제안의 의무이다.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시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존재하게 될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이중의 책임을 지게 된다. 현재를 구현하는 것, 즉 ‘우리는 어떤 시간 속에 존재하는가?’‘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시인의 소임이지만, 시인의 시선은 늘 보들레르가 표현한 대로 ‘심오한 시절’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과거의 사물들을 다루는 사람’(말라르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현재의 찰나적인 모습을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무’의 경계선 속에 위치시키고 그려내야 한다.


시인의 세상에 대한 의무는 타자에 대한, 동포에 대한, 혹은 후세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포들을 향해 말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언어들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에 끝없이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그들의 존재에 견고함을 부여한다. 즉자와 대자를 고찰하고, 동일한 것과 다른 것을 함께 바라보며, 모든 존재, 모든 사물들과 대면함으로써 ‘무엇이 본연의 것인가?’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 열정과 신중함과 고통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을 노래할 때, 우리 곁의 혹은 사라져버린 존재들을 노래할 때 그것은 사랑의 작업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진심으로 감동시키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의 의무가 된다. 시는 단순히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벌거벗은 마음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의무는 사고와 감성과 느낌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내적인 모든 것, 욕망과 생각과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옥타비오 파즈가 시인은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시인이 인류의 비인간적인 면까지, 우리의 내면을 충족시키는 것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공허함을 만드는 것까지 모두 포용하여 인류의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평과 찬사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요, 가치와 감성의 언어를 구가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숫자에 맞서 격조를, 억측에 맞서 운율을, 기계음과 장사치의 소음에 맞서 리듬을 살려내기 위해 저항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존재 안에서 혹은 존재를 통해서 일정한 품위를 구가하는 것, 고차원적 의미에서 존재와 환경이 일관성과 일체성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시인의 의무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인간정신을 성숙되게 하기보다는 분리시키고 멀어지게만 해온 사람들 사이에 연결점을 찾아주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관찰의 의무, 성찰의 의무, 깨달음의 의무, 관심의 의무, 특수한 시선의 의무 등 시인의 의무 중 상당부분은 결국 시인의 시선에 관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시선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자신의 시선을 펜으로 옮기는 것,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담아내는 것도 시인의 책임이다. 시인이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예언자이건 단순한 목격자이건, 시인은 자신의 시야 안에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트 뵈브 반박론(Contre Sainte-Beuve)에서 제안한 예술가의 정의를 상기해 보자.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가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추함과 무의미함의 베일을 우리 눈에서 걷어내는 사람,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무심해지게 만드는 그 베일을 걷어 내 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것을 보라, 이것을 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다.


1907년 ‘시인과 현시대’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위고 본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은 예술가를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모여드는, 그리고 모여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예술가는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초점이다. ‘예술가의 눈에는 눈꺼풀이 없는 셈이다.’


시인의 의무에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소 시대에 뒤진 듯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희망의 의무와 아름다움의 의무가 있다. 희망은 ‘절망의 에너지’에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쓰기라는 고된 작업을 힘겹게 지속해 가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희망을 끌어올릴 수 있다. 희망한다는 것은, 앙리 미쇼 식으로 정의한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는 신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글쓰기의 윤리에는 진실의 의무 외에도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작가란 심지어 그 자신의 저항과 반항마저도 지상의 조건을 더 잘 감내하기 위한 양분으로 쓰이게 하는 사람이다.

선(善)과 오랫동안 혼동되어 왔던 미(美),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감정과 윤리로부터 분리된 차갑고 냉혹한 여신으로 숭배했다. 랭보 역시 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조롱하였다. 모든 현대시는 상실과 전복, 수치와 살인 등 미와는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몇몇 현대 글쓰기에서는 추한 것,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것’을 의도적으로 모색하는 듯하다. 여기서 시는 출입금지(off-limits)와 혼동된다. 나는 독일 시인인 미셸 크루거의 말을 인용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


모든 시에 내재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애타게 갈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에 합류하고 싶어한다. …… 추한 것을 추구하는 자, 쓰레기를 추가하고자 하는 자들은 굳이 시라는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시인의 의무는 인간적인 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 그것을 보여 주고 가려내 주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려 주는 것이다. 시인의 임무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것보다 파괴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시는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혹은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의 존재 근거를 찾아 주고자 한다. 우리가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들을 고집스럽게 종이 위에 그려 가는 것이 바로 시이다.


우리의 삶을 조금 덜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들이 작위적으로 미화시키거나 사물의 진실을 속이는 대신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만큼의 꿈과 욕망이 존재하는지를 그대로 보여 주기를 원한다. 행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조건을 한 마디의 간결한 언어로 전달해 주기를 원한다. 삶과 죽음의 시간을 말해 주기를 원하고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삼켜 버리는 나락 속에 빠져 들지 않도록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벌거벗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진적이며 우리의 삶의 근거를 재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시가 그 궁극적 목표를 무엇이라고 천명하든, 시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짚어보게 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대면시키고, 시간의 축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비시킴으로써,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구분해 줌으로써, 시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드러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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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2008. 6. 26. 21:55

2008.6.25./시울/김성중

쪽빛 문장

――오솔길의 몽상 10


고재종



연두 초록 눈 시린 산에 오르다

봄볕에 몸을 데우는 너덜겅의 꽃뱀을 보네.

온몸으로 기며 온몸으로 대지를 읽는

꽃뱀만이 짤 수 있는 그 화려찬란한 등무늬.


사방에서 무어라 무어라고 속삭이는

연두 초록의 전언은 무엇이랴.

새 중에서 가장 청량한 소리의 휘파람새야.

꽃 중에서 가장 앙증맞은 담자색 구슬붕이야.


나의 문장이 초록 바람의 향기를 맡고

골짝물의 쪽빛을 얻기까지는 언제랴 싶어


감았던 눈을 뜨니 철쭉밭으로 드는, 저 꽃뱀!



*고재종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2004.10.30.) 58쪽




[감상]

시인은 시방 오솔길에서 몽상을 하고 있다. 연두빛과 초록빛으로 빛나는 초여름의 산길은, 오솔길은 얼마나 눈이 시린가. 그 숲길에서 모을 데우는 꽃뱀을 만난다. 꽃뱀은 비늘다리로 기어가면서 온몸으로 대지를 읽는 존재다. 그 꽃뱀은 얼마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가. 꽃뱀을 몸에 두르고 싶은 충동을 시인은 억제하고 있으리라.

시인은 휘파람새와 구슬붕이를 불러 연두와 초록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물어본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오솔길에서.

시인은 초록의 향기를 맡고 골짝물의 쪽빛을 얻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몽상을 한다. 몽상에서 깨어나 바라보니 꽃뱀이 붉은 철쭉밭으로 들어가고 있다. 꽃뱀과 철쭉꽃의 그 붉은 색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원시적 건강함이 아닐까.

쪽빛 문장을 얻고 싶어 하는 시인의 소망은 이루어질 것인가. 그냥 몽상으로 끝날 것인가. 자연에 파묻혀 지내는 삶은 얼마나 호젓한가.

나도 오솔길에서 몽상을 하고 싶다.


거대한 고독


오늘도 슬픈 지상에선 무차별한 폭격

한 청년의 외로운 참수가 있었다. 나는

좀이 슬어 엽맥만 남은 잎새 같아서

저렇게는 반짝이며 뒤설레는 바다를 본다.

휴대폰 벨소리며 손목시계의 맥박들을

쪼아버리는 갈매기 울음 부리는 때마침 다행.

죄다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것들,

죄다 썩거나 치유할 수 없는 것들의 생이

거대한 고독 속으로 몰려들어선

쩍쩍 아가리를 벌리며 아우성치는 노도라 할까.

저만큼 수평선의 까치놀만은 요요하게

삶을 미학으로 번역하기 바쁜 것이어서

나는 하마터면 탄성을 발할 뻔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 아득하면 될 뿐인 생이 있으리라.

이 소금기로도 못 씻는 생어물 썩는 내며

한껏 핀 해당화가 감춘 독가시들조차

다만 출렁거리면 되리라, 믿은 적도 있지만

나는 다시 어쩌려고 바다를 본다, 누군들

검은 심연이자 매끈한 매혹을 모르랴만,

익명의, 익명의 떼거리로 몰려 죽거나

수많은 응시 속에 홀로 참수될 생들의

거대한 고독, 그 속에 내가 잠겨서

영정(零丁)의 폐선 한 척으로 깜빡이는 시방은

저렇게는 파랑주의보 하나 없는 금결 은결.

우리 모두 태어나기 전에는 죽어 있었다*.


*프레데릭 파작의 《거대한 고독》에서

----------------

*고재종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2004.10.30.) 20-21쪽


[감상]

프레데릭 파작의 《거대한 고독》21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파베세는 그의 일기 『삶이란 직업』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체험 앞에서 초보자, 죽음은 난데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모두 태어나기 전에는 죽어 있었다.”

파베세는 42세이던 1950년에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16알의 수면제와 독약을 먹고는 자살한 작가다.

시인은 거대한 고독 속에 잠겨 있고 바다는 금물결과 은물결로 반짝이는데......

죽음은 늘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거늘....



더 읽을 시


까치집

반칠환


망치도 없고 설계도도 없다

접착제 하나 붙이지 않고, 못 하나 박지 않았다

생가지 하나 쓰지 않고, 삭정이만 재활용했다

구들장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지만

성근 지붕 새로 별이 보이는 밤이 길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따뜻한 심장 같다

주머니난로 같은 까치 식구들이 드나든다

까치집을 품은 나무는 태풍에도 끄떡없다고 한다

까치들이 영악해서 튼튼한 나무만 고른다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까치들이 둥지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은 노래도 들려주고, 벌레도 잡아주는

까치가 고마워서 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무들은 여름엔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겨울엔 낙엽을 떨구어 햇살이 들게 해준다

나무와 까치는 임대차 계약도 없이 행복하다



*『시와상상』 2008년 봄호 : 『문예연구』 57호(2008년 여름) 248-249쪽에서 재인용



빙하기가 멀지 않았다

이기윤


겨울잠을 설친 지리산 반달곰들이 동굴 밖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마른 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광경이

그대로 집집마다 전송되던 한겨울 저녁

기후온난화 증거라는 앵커의 굵은 목소리가 끝날 때쯤

김이 나는 시루떡을 들고

맞은편 403호의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파트 문을 열지 않은 채, 누구세요?

한 손에 떡을 받쳐 든 채 나는, 오늘 앞집에 이사온 사람인데요

그러자 금방, 아! 그 이사떡은 먹은 걸로 할게요

용케도 손에 들린 것까지 보았는지 더 이상 대꾸도,

얼굴도 듣도보도할 수 없었다

동면굴보다 더 찾기 힘든 같은 통로 12층

집집마다 문 두드리며 오르내리다 집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시루떡이 저 혼자 몸을 움츠린 채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서울 겨울 저녁에



*『시와반시』 2008년 봄호 : 『문예연구』 57호(2008년 여름) 24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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