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2007. 10. 18. 12:11

마지막 주막, 바람벽에 새겨진 술어미 피울음

내륙의 섬마을 예천 회룡포와 삼강주막

'물돌이동'은 하회(河回)의 다른 이름이다. 낙동강이 그 유장한 흐름으로 마을을 휘감고 흘러가는 형국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모두 그만그만한 우리 하천들의 규모와 배산임수의 땅에다 터를 잡아온 선인들의 지혜를 헤아려 보면, 그런 모양새의 마을은 쌔고 쌨어야 한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회룡포(回龍浦) 마을도 그런 마을 중 하나다. 하회마을보다 덜 알려졌지만,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는 지방자치단체의 이해와 저마다 승용차를 부리는 시대에 힘입어 주변에 알려졌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V 드라마 '가을동화' 덕분에 온 나라에 알려졌다.


<가을동화> 덕에 널리 알려진 회룡포 하회와 다른 점이라면 그 물이 낙동강 상류의 지류 내성천이라는 점과 그것이 휘감고 있는 마을이 명문거족 하회 류(柳)씨의 양반 마을이 아닌 소박한 농촌동네라는 것뿐이다.


물이 휘감고 도는 각도는 오히려 하회보다 더 크고 둥글다. 이 각도가 350°라는데 마지막 10°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웃 개포면과 이어지니 '육지 속의 섬마을'이라는 표현은 사실이 아닌 셈이다.


이 마을을 소개하는 글에는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라 하지만, 원래 이름은 의성포였다. 이웃 의성군과 혼동된다 하여 '회룡포'로 불리게 되었는데, '용틀임' 따위의 과장도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 땅에 흔하디흔한 명명법일 터이나 이곳 지명이 '용궁(龍宮)'이니 용이 있어도 무방하겠다.


마을 건너편의 산이 높이 190m의 비룡산인데 회룡포에서 용틀임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언덕이라 보면 얼추 격이 맞아 떨어진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다. 차를 타고 들어가려면 인근 개포에서 비포장길로 가야 하고, 용궁에서 들어가려면 부득이 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구멍 숭숭 뚫린 철판(비계용 발판) 두 개의 폭으로 이어진 이른바 '뿅뿅다리'를 건너 걸어가야 한다.


이태 전만 해도 속이 훤히 비치는 얕지만 맑은 물 위에 뜬 듯하기도 하고, 더러는 물에 살풋 잠기기도 하는 나지막한 다리였는데 지금은 두어 자쯤 높여 놓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다리를 천천히 건너가 보는 것도 쓸 만하다. 10여 가구밖에 남지 않은 호젓한 마을을 가로질러 저 끝자락부터 강둑을 따라 한 바퀴 돌아나오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값싼 사진기로 찍어도 감동은 다르지 않다


산은 산을 나와야 보인다. 마을을 보려면 뿅뿅다리를 건너와 물을 따라 완만하게 누운 비룡산을 올라야 한다.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회룡대'란 이름의 전망대가 있다. 요즘 이름난 경승(景勝)에서 흔히 보듯, 거기엔 시커멓고 커다란 수백만 원짜리 사진기를 든 사진가들이 삼각대를 세워놓고 오래 뜸을 들여 풍경을 담고 있는데, 무어 그리 기죽을 일은 없다.


우리가 가진 손바닥 안에 드는 보급형 디카로도 회룡포 마을의 아름다운 모습쯤은 담아내고도 남으니까. 이태 전에 찍은 400만 화소짜리 똑딱이 디카로 찍은 사진이나 100만 화소의 DSLR 카메라로 찍은 것이나 그것이 주는 감동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거리가 마땅치 않아 마을을 안고 도는 강물을 담을 수 없었다는 점뿐이다.




10월 초순의 회룡포 마을은 고즈넉했다. 이태 전보다 벼논의 면적이 줄어든 게 뚜렷하다.


정갈하게 갈아놓은 밭에 10여 동이 넘는 비닐하우스가 이마를 맞대고 서 있는데, 빼곡히 들어찬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민 빨갛고 파란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이 정겹게 다가온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는 무관하게.


갈수기로 가까워져 내성천의 수량이 줄고 있는지 마을을 휘감고 펼쳐진 백사장이 허옇게 그 켜를 드러내고 있는데, 멀리 뿅뿅다리는 마치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곽처럼 마을 가장자리를 삥 둘러싼 둑길이 외롭다.


전망대에서 마을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장안사(長安寺)가 있다. 천년고찰이라지만 지금의 절집은 1984년부터 '불자들의 간절한 원력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 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으니, 금강산과 양산(지금은 부산 기장), 그리고 이곳 국토의 중간인 용궁 비룡산에 깃든 장안사가 그것이다.


몇 해 전, 동종(銅鐘)이 땀을 흘린다 하여 한 지상파 방송이 화제로 보도하기도 했던 이 절집의 초창주는 신라 경덕왕때(759) 의상대사의 제자인 운명조사. 중창주로 고려 명종 때의 지도림(支道林) 화상이 있는데, 그와 교유한 고려 문인 이규보가 이 절집에 머물다 가며 남긴 시편이 회룡대에 걸려 있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하물며 고승 지도림을 만났음이랴.

긴칼 차고 멀리 날 때에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한 잔 차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절 북쪽 시내엔 구름이 흩어지고

달 지는 성 서쪽 대숲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 동산 소나무와 국화는 꿈속에서 잦아드네.

'가족 건강'에서 '로또 1등 당첨'까지


절집 뜰에 차곡차곡 쟁여 놓은 기와는 기와불사의 흔적인데, 기왓장마다 쓰인 갖가지 기원은 산문(山門) 도량에 들어도 떨치지 못하는 번뇌의 한끝일지도 모른다. 대박의 꿈은 절집에 와서도 쉽사리 사위지 않는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로또 2등 이상 당첨'이나 '로또 1등 당첨'으로 원망(願望)의 조건도 다양하다.


반면에'아토피 퇴치', '스케이트를 잘 타게 해주소'라거나 '이사 가서 페럿(유럽긴털족제비 품종의 하나)을 기르게 해 주세요'는 소박하고 간절한 기원들도 있다.


어쩌면 앞과 뒤 두 기원 사이는 진흙과 연꽃, 번뇌와 해탈 사이만큼이나 멀지 모른다.


다시 비룡산의 산책로 따라 길을 재촉하면 낙동강·내성천·금천(錦川)의 세 물줄기가 합쳐지는 삼강(三江)을 만나게 되지만 거기 남았던 '마지막 주막집'이었다는 '삼강주막(경북 민속자료 304호)'을 찾으려면 다시 차에 올라야 한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몸을 섞는다 해서 '삼강'이란 이름을 얻은 곳은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다. 삼강은 한때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어서 내륙의 미곡과 소금을 교환하던 상인과 부보상(보부상)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그 나루터 곁, 200살이 넘은 회화나무 그늘에 삼강주막이 있다.




이 주막이 들어선 것은 1900년께. 소발에 짚신 신겨 서울로 몰고가던 소몰이꾼이 소를 싣고 강을 건너기도 해 삼강나루가 붐볐을 때는 소 여섯 마리를 실을 수 있는 큰 배와 작은 배, 두 척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까지는 소금배 상인과 부보상이, 소금배가 끊긴 후에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대구 등지로 가려는 주민과 나그네들이 이 주막의 길손이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주막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나루에 인적이 끊어졌으니 주막을 지나는 길손도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2004년 봄에 삼강교가 개통되면서 호젓했던 삼강의 풍광마저 사라졌다.


마지막 주모의 한이 서린 삼강주막


철근 콘크리트를 지은 우람한 다리 삼강교 밑에 폐가가 된 주막은 초라하고 쓸쓸했다. 퇴락한 팔작 형태의 슬레이트 지붕은 그나마 새마을운동의 은전을 입은 걸까. 우리 시대의 '마지막 주모(酒母)'였던 옛 주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이가 아흔 살이던 2005년이다. 열여섯 살에 네 살 위 남편과 혼인한 그이가 이 주막의 주인이 된 것은 3년 뒤, 꽃다운 열아홉 살 때였다던가.


그이는 이 주막에서 5남매를 길렀고, 반세기 전에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드센 나루터 주막을 꾸려가는 고단한 세월에 아로새겨진 상처는 또 얼마일까. 그이가 흙벽에다 그어 놓은 가로 세로의 금이 외상장부였다는 것은 호사가들에겐 전설이 되었지만 그 바람벽에 새기지 못한 '술어미'의 한과 슬픔은 또 얼마였을지.


6년 전 처음 이 주막을 찾았을 때와 다르지 않게 삼강주막은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낡고 헌 흙벽의 속살을 드러내고 온 방문을 열어젖힌 채. 사람들은 왜 이 낡은 주막집을 잊지 못해 잊을 만하면 다시 찾는 걸까. 우리가 주모에게 청해 소주를 마셨던 방의 문은 문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채 간신히 돌쩌귀에 걸려 있었다.


임자를 잃은 지 어언 이태. 주인이 세상을 떴던 그 해 연말에 이 낡은 주막집은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크고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가 커서'다. 경상북도는 낙동강 1300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조선시대 주막의 복원 사업을 올해 안에 시작한다고 한다.


주막이 복원되면 사람들은 한갓지게 승용차와 관광버스를 타고 와 이 '전근대'의 풍경에 머물다 저 '낡은 시절'의 향수에 젖다 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는 것은 다만 한 시대의 모사(模寫)와 재현일 뿐, 그 시절 사람들의 땀내와 피울음으로 얼룩진 한 시대의 고단한 삶은 아니리라.




삼강리를 떠나는데 누렇게 익어가는 벼논과 주변 무성한 코스모스 더미 너머 웅크린 주막의 모습이 아련히 멀어 보였다. 열린 방문으로 사람 좋은 넉넉한 미소로 나그네를 맞던 여섯 해 전 주모의 모습이 얼핏 스쳐간 것 같기도 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삼강교 위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세 물줄기가 하나로 섞여 흘러가는 강물을 잠깐 동안 굽어보았다. 뒤척이며 흐르는 강물 저편에서 지난 세기의 시간과 역사도 흘러갔을 터였다. 그렇다. 삼강의 나루터와 주막에 모이는, 사람들의 '오래된 그리움'은 이 밀레니엄 시대에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넘지 못하고 있는 19세기, 그 '전근대의 실루엣'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007.10.16 14:29 ⓒ 2007 OhmyNews


posted by 추월산
:
그리움 2007. 10. 12. 10:56

길임이 고모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길임이의 담임교사 김성중입니다.

길임이에 대해서 듣고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길임이에게 제가 힘이 되어야 되겠더군요.

특히 사춘기인 길임이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학교를 찾아오셔서 저에게 전해주신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저는 고모님의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과 학교와 저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아주 정중하게 되돌려 드릴 수밖에 없음을 사죄드립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첫째, 길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둘째, 제가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편애를 할까 두렵습니다.

셋째, 학부모님께서 학교를 오시는데 부담을 드릴까 두렵습니다.

넷째, 제가 지향하는 참교육을 하고자 하는데 걸림돌이 될까 걱정이 됩니다.

다섯째,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은 저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 불신을 받는 교사가 아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덟째, 제가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길임이 고모님, 저의 편지를 읽어보시고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항상 정의가 가득차기를 바라는 저의 소박한 충정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3학년 4반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정에 항상 기쁨이 넘치시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1996년 3월 15일


담임김성중 올림

posted by 추월산
:
그리움 2007. 4. 24. 11:50

봄이 오는 길목에서 / 김성중


겨울의 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봄은 파란 새싹과 함께 오고야 만다. 겨우내 움츠려졌던 우리의 가슴도 봄이 오면 활짝 펴질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봄을 기다린다.

봄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봄을 싫어하는 사람은 땅위에 발을 붙일 자격이 없다. 봄은 청춘에 비유되며 인간의 영원한 추억의 샘터이다. 얼음장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은 봄의 신선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짓궂은 장난꾸러기이지만 봄을 봄답게 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다. 그리하여 동백이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면 봄의 축제는 시작되는 것이다.

봄이 되면 농부의 손길이 바빠진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한다. 갑자기 대지는 활개를 치고 모든 물상들은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묵었던 찌꺼기를 털어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란한 자연의 품으로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우리의 가슴 속에서 요동친다. 봄은 계절의 여왕이며 또한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인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해마다 새로운 봄을 맞는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우리는 더욱 성숙해진다. 지난해의 봄과 올해의 봄을 비교해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에 입학했던 사람은 이제는 어엿한 선배로서 후배를 맞을 것이며 대학의 황금시절을 보낸 사람은 아쉬운 졸업반이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변화가 이럴진대 안으로 삭인 고통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했을까 하는 것은 불은 보듯 훤하다. 삶의 길목에서 서성이다가 몇 번이나 돌아서서 아픔을 되씹었던가? 대로는 자신의 존재마저도 잊어버리고 허둥대던 불면의 밤은 또한 몇 날이던가?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목표 없이 방황하던 날들의 기억은 이 봄을 맞으면서 잊어버려야 한다.

캠퍼스의 봄은 또 다시 최루탄 가스에 질식해야 할 것인가? 맑게 갠 봄날에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우리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유스러운 캠퍼스를 원한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다’는 우울한 이야기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우리의 봄은 우리가 지켜야 하며 캠퍼스의 봄 동산에서는 우리가 주인이며 정원사인 것이다. 시시껄렁한 신문의 사설은 안 읽더라도 우리의 젊은 피는 식어서는 안 된다. 봄은 우리의 가슴에 불을 댕기고 행동하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시골길엔 질경이라는 풀이 있다. 숱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 끝내 일어서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풀로서 우리 민족의 혼이 들어 있는 잡풀이다. 봄의 길목에서 새삼스레 떠오르는 이 풀은 내게 삶의 의미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가야만 하는 아픈 마음들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이 봄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두들기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다. 결국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며 소수의 집단이나 엘리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가슴에 아프게 새겨 두자.

세월은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들도 변해간다. 처음에 품었던 뜻은 언제인가 사라지고 온갖 잡생각만이 머리를 혼란하게 하는 지금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겠다. 우리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이 분명한 이상 “우리”라는 커다란 배가 항해해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리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감춰진 더러운 이기심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아름다운 전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이 봄엔 타는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려는 서툰 몸짓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가슴을 활짝 열고 자신의 결점을 내보이는 그리하여 더욱 끈끈한 끈으로 우리의 마음이 맺어지면 더욱 좋겠다. 누구를 욕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자신의 행동을 뒤돌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무정한 세월은 흘러만 간다. 무등산에 올라가서 힘껏 악이라도 쓰면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싶다. 이 봄이 유난히 화려하고 멋진 계절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국어국문학회보 제4호, 전남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국어국문학회, 1986년 3월]에서


posted by 추월산
:
그리움 2006. 9. 23. 07:38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눈코뜨지 못하는 자네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네. 가을을 느낄 사이도 없이 찬바람이 불어올지 몰라. 심심한위로의 말씀을 보내며, 힘!

하루이틀도 아니고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해왔는데 앞으로 이렇게 이어진들 어떠하리요, 이런 푸념을 듣는 것도 넌더리가 나고, 아니아니 우리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근본적인 회의, 그래 코기토 에르고숨, 데카르트 아저씨를 불러내 대화를 진지하게 해야하지 않을까?

정윤이, 우리의 삶이 언제 거짓말을 하던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목을 졸라대더라도 우리 삶의 본모습을 잃지는 마세.

자네의 말대로 막걸리 한 사발 걸쭉하게 들이킬 그날이 오면, 오기만 할 양이면, 나 기다리고 있겠네.

우리학교 홈페이지는 [광주시교육청-각급학교-고등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라네. 그냥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검색해도 들어올 수가 있다네. 광주일고에 들어오면 [사이버교실]이 있다네. 거기에서 [김성중과 함께 가는 길]을 찾아 들어오게. 아직 별로 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김성중의 체취는 느낄걸세.

만날 때까지 건강허소.
광주제일고등학교 국어과연구실에서 김별.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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