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9. 1. 25. 00:12

부서진 벼루 먹기

창비주간논평. 2009-01-21 오전 9:40:24 Comments (0)


고은 / 시인


1


시조(始祖)새가 있다. 까마귀만한 크기에 대가리는 작고 대가리에 달린 눈은 어쩌자고 크다.


새의 가장 오래된 조상인 이 시조새란 녀석 ― 조상쯤의 생물을 이 녀석 저 녀석이라고 낮추는 것 실례이지만 ― 은 텃새로나 철새로 펄펄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화석으로 박혀 있다. 나는 그 화석 사진을 본 적이 있을 따름인데 그때 새의 조상인 시조새 화석이 있다면 시의 조상인 시조시(始祖詩)의 화석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유치한 노릇이다.


시란 이런 유치한 천지창조론 근처와는 아무 상관없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나의 소년적인 고고학 충동은 시의 어떤 생성 기점을 만들고 싶었던가?


상고시대 수메르의 점토판에 남겨진 카노슈 카드로라는 시인이 쓴 시 한편이 굳이 시조시 노릇을 할지 모른다. 아니면 5천 5백년 전의 그것보다 더 앞선 어떤 아득한 선사시대 그림글씨로 한편의 시가가 어느 암벽에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공상 끝에 한국 시문학사의 처음은 한반도 동남의 한 암각화에 있지 않고 훨씬 뒤의 고구려 유리왕의 '꾀꼬리 노래'라든가 고대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곳 한자로도 남겨진 '공후의 노래'라든가에 생각이 미치면 차라리 우리의 시조시는 숫제 아침이슬이거니 공중에서 노니는 티끌이거니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허나 시의 시작이 호젓이 나오는 노래이기도 하고 여럿이 더불어 누리는 노래이기도 한 것이 고대시가의 삶이라면 굳이 화석으로, 점토판이나 돌에 새기는 낙서로 남아 있지 않고 그 노래가 노래 뒤의 허공에 스러지는 것이 더 시다운 일이기도 하겠다. 김시습이 시를 쓰는 대로 개울물에 흘려보낸 일을 떠올려보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조시는 5천년 전이나 1만년 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지금 누군가가 쓰는 그 시의 지금이 바로 시의 조상이라는 근본시학의 비약에 이르는지 모른다.


모든 시는 지금의 시이므로!



2


어제 나는 우연찮게 김기림전집을 읽었다. 전집이라고 하지만 그이의 품격 그대로 시와 수필, 시론을 망라한 한권의 전집이다. 그것도 1988년 3월 당시 문공부장관이던 시인 정한모가 해금조치한 이후 10년쯤 지나서야 나온 것이었다.


6녀 1남의 막내 외동아들인 김기림의 막내누나 김선덕이 미국 이민생활의 노경에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로 서문을 삼았다. 김기림의 아들 세환의 고모 역시 지난날 동생 기림과 함께 일본 유학을 한 여성이라 그동안 접어둔 글솜씨가 퍽이나 높은 수준이다.


(…)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억울한 사형수가 재심에 지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했을 때의 그 기쁨보다는 비정했던 세대를 응시하면서 첫발을 디뎠을 적에 하늘도 땅도 울어주지 않겠는가?


이런 애끊는 한을 품고 동생의 문학 사면에 대한 처절한 감회를 담고 있다.

나는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등의 시편들을 소년의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 다음 〈시와 문화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도 읽었다. 이것은 신석정이 해방 연간 전국문학인대회에서 지은 즉흥시와도 얼핏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과 같다.


손을 벌리면 산 넘어서 바다 건너서

사방에서 붙잡히는 뜨거운 체온

초면이면서두 만나자마자 가슴이 열려

하는 얘기가 진리와 미의 근방만 싸고돎이 자랑일세


그대 모자 구멍이 뚫려 남루가 더욱 좋구려

거즛과 의롭지 못한 것 우에 서리는 눈초리

노염 속에 감추인 인정의 불도가니

나라나라마다 우리들 소리 외롭지 않어 미뿌이


나기 전부터도 시의 맥으로 이낀 어리석은 종족

피 아닌 계보가 보석처럼 빛나서 더욱 영롱타

도연명과 한용운과 노신과 타골

단테와 뽀들레르와 고리키와 오닐


포대와 국경을 비웃으며 마음마음의 고집은 뚜껑을 녹이며

강처럼 계절처럼 퍼져오는 거부할 수 없는 물리

메마른 사막을 축이는 샘 어둠 속에 차오는 빛

세계와 고금에 넘쳐흐르는 것 아― 시여 문화여


이런 시의 마음 순종(純種)이 한국시의 오늘을 낳았다는 생생한 감회 앞에서 시 1백년 그다음의 시대를 여는 오늘이 벌써 열렸다.



3


김기림의 절창 〈바다와 나비〉의 그 어눌한 진정을 읽다가 건너뛰니 어쩌면 그의 본령이기도 한 해박한 시론에 사로잡혀야 했다. 심지어 〈시론〉이라는 시까지 쓴 그이가 아니던가.


이 시가 1930년대에 씌어진 것과 함께 〈1933년 시단의 회고〉라는 시 총평은 이를테면 김안서 등을 비판한 나머지 정지용 등을 상찬함으로써 그의 풍부한 시학적 진폭을 내보이고 있다. 요컨대 쎈티멘털리즘과 과거에 대한 노예적 맹종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시의 지점에 그이가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더 나아가 현대 한국시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 30년대를 마감하는 시론에서도 한층 더 강렬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동양시의 오랜 관습대로 조선시대 양반시단 여항시단(閭巷詩壇)의 풍속이었던 시회(詩會)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당대의 주도적 모더니스트 김기림이 보기에 이런 시인행태는 시적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나는 일 따위와는 상관없이 오랜 정체 속의 되풀이로 단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행태로서의 시가 보여주는 장식성밖에 다른 여지가 없고 골동으로서의 언어유희밖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탄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그가 강조하는 바가 곧 시정신이다. 그것은 안이한 시인적 기질의 동의어가 아니라 '한 시대가 품고 있는 문화의욕을 자신 속에 나누어 가지고 그것을 시에 구현해가는 창조적 정신'이라는 것. 사실 전통시대의 시회는 고대 중국의 남북조시대와 당․송시대를 이어오는 시단의 풍류 아류이다. 고려시대 해좌파(海左波)나 죽림(竹林) 강변(江邊) 군상들이나 조선후기 여러 시회 시사(詩社)에 이르기까지 그 관행은 자못 뿌리가 깊다.


이규보의 시화(詩話) 〈백운소설〉에는 4, 5인이 각각 말을 타고 느적느적 가며 이른바 마상시회(馬上詩會)를 베푸는 광경이 나온다. 누가 맨 먼저 운을 달고 나오면 그 운에 따라 즉흥작품을 읊어가는 것이다. 그런 시의 한두편이 송나라에까지 건너가 그곳 시단에 탄상(歎賞)되는 경우도 있었다니 그 역량이 상당한 경지였을 것이다. 이런 행운의 다른 편에 이규보 등과 한 시기 동인이던 임춘(林椿)의 불운이 있다. 그의 시에서 보듯 임춘은 '갈아먹을 밭뙈기 없어 부서진 벼루를 갈아 먹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풍류가 기운생동의 작품을 자아내는 드문 경우 말고는 그 상투성에 떨어지고 마는 사례가 허다했다. 그런데 이 고질적이기까지 한 시놀이가 끝난 것은 근대시 1백년 단초일 것이다.



4


그간 식민지 시기의 근대시 분야의 인구는 서로 간담을 비출 만큼 형제적이고 동인적이었다. 그런 시기는 전근대의 시회 시사의 분위기와는 같지 않더라도 시인사회의 여러 관계들을 거의 혈연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런 우정이 한국시의 행로에 얼마나 기여하는 생산성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움트는 연민과 선린의 미덕은 오랜 농경사회의 인정과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닌 향토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사실 시는 일종의 농업이었다. 척박한 현실이나 곤궁한 일상을 견디어내는 그들의 시적 무능이 곧 시의 가능이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의 시인 증가율은 급수증가를 거듭하는 도시적 다중화로 치달았다. 시인 5천명 내지 1만 5천명 이상이라는 오늘의 시단 상황은 거의 대책 불능의 비농촌적인 한계상황이다. 가위 시단의 아파트대단지이다. 날마다 시집과 시지, 시동인지들이 간행 배포되고 있다. 이를테면 한해의 마감날짜인 12월 31일에도 새해의 시작인 1월 3일쯤에도 가장 먼저 오는 것은 연하장 못지않은 시집의 우편배달이다.


외국 시인들이 한국은 시집이 2백만부나 팔리는 나라라 부러워하고 이웃 나라에서는 시가 죽었는데 한국에서는 시가 살아 넘친다는 기적론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덕담의 안쪽인 한국시에서의 완강한 시적 절망이 자리잡고 있는 내상(內傷)은 그런 상황에서 정작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같은 시의 남획 남발과 시의 초과생산의 한쪽에서는 현세적 이기주의와 배타주의 출세주의로 얼룩져 있는 현실이 탐욕적으로 표상되는 것과 동행한다. 그러므로 이로부터의 한국시는 시적 탐구의 고향만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질적 품성을 배양하는 일과 자본사회에서의 궁핍한 심신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일이 어찌 나 자신의 몫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이전의 시회놀이와는 또다른 전우감(戰友感)의 시인사회를 개척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태어난 해인 1933년 새해에 김기림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너는 황금과 지위와 그리고 민중의 아첨의 달콤한 유혹을 돌보지 말고 나를 따를 수는 없느냐?" 이 말은 〈파랑새〉라는 시의 이상을 의인화(擬人化)해 그 '파랑새'가 화자인 나-김기림에게 하는 경종이다.


그로부터 76년 뒤의 나에게 오는 경종이다.


2009.1.21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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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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