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고 싶은 책 2009. 10. 14. 09:20

『말테의 수기』: 릴케 전집 12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용민 옮김, 책세상, 초판 3쇄 2005년 3월 10일

9월 11일 툴리에 거리.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밖에 나갔다 왔다. 많은 병원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그 후의 일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임신한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따사로운 높은 담을 따라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담이 거기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그녀는 여러 번 담을 만져보고는 했다. 물론 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도를 찾아보았다. 산부인과병원. 그래 그녀는 곧 해산을 하겠지――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좀더 가니 생 자크 거리가 나오고, 둥근 지붕의 커다란 건물이 나왔다. 지도에는 발 드 그라스 육군병원이라 나와 있었다. 사실 이런 것을 알 필요는 없었지만 안다고 나쁠 것도 없다. 골목길 사방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요오드포름, 감자튀김 기름 그리고 불안의 냄새를 분간할 수 있었다. 여름이면 모든 도시에서 냄새가 난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그 집 현관문 위에는 아직은 제법 두렷하게 ‘간이 숙박소’라 씌어 있었다. 문 옆에 요금이 붙어 있었다. 읽어 보았다. 별로 비싸지 않았다.

그리고 또 무엇을 보았던가? 세워놓은 유모차 안에 있는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통통했고 피부는 푸르스름했으며, 이마에는 오롯하게 종기가 나 있었다. 종기는 거의 다 나아서 이제 아프지 않아 보였다. 아이는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요오드포름과 감자튀김, 그리고 불안의 냄새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나는 보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9-10쪽)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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