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등정기
김성중
2009년 4월 어느 날, 전남여자고등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지리산 이야기가 나왔고, 천왕봉에 아직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나는 아직 천왕봉을 올라가 보지 못했으므로 창피했다. 전남여고 해직동지 7명은 마음을 합하여 천왕봉에 오르기로 결의했다.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하여 협의한 결과, 5월 9일 쉬는 토요일에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지리산에 가려면 준비가 필요해
나는 등산을 별로 해보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리산 등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5월 3일(일)에는 병풍산 투구봉 근처까지 마누라와 함께 갔다 왔고,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무등산 새인봉을 거쳐 중머리재를 지나서 토끼등을 지나서 문빈정사 뒷길로 내려오는 4시간 정도의 산행을 하면서 지리산 천왕봉 등정을 준비했다. 이제는 지리산에 가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5월 6일(수)에 수업이 끝나고 등산용품 판매점(블랙야크 일곡점)에서 아내를 만나기로 했다. 그 가게에서 스틱, 등산화, 장갑, 바람막이 자켓 따위를 샀다. 비용이 50여만 원이나 들었다. 완전하게 등산장비를 갖추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지리산 등반준비는 어느 정도 된 셈이다. 5월 7일(목)에는 밤 11시 40분까지 심야자율학습지도를 했다. 어서 날이 밝아서 새 등산화를 신고 싶었다. 8일(금)은 중간고사 첫날이고 분회모임이 있는 날이다. 굴뚝집에서 돌솥비빔밥을 급히 먹고 버스에 올랐다. 작년에 가봤던 청보리밭을 향해 버스는 거침없이 달린다. 새 등산화를 신고 고창 청보리밭과 무장관아를 둘러보면서 캔 맥주와 막걸리 몇 잔을 마셨다.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오줌이 너무 마려웠다. 막걸리와 맥주는 이래서 문제다. 버스를 광주 요금소에 세우고 여러 명이 지하통로를 건너서 오줌을 시원하게 누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보니까 해도 기울지 않았고, 아쉬움을 달래려고 윤원중, 조영윤, 김성중 세 사람은 월가로 갔고, 거기에서 맥주 몇 병을 비우면서 회포를 풀었다.
5월 9일(토). 핸드폰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는 도시락을 준비하고 배낭을 꾸리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있으니 내 자신이 한심했다. 급히 택시를 타고 전남여고로 달렸다. 약속 시간보다 10여분 늦었는데 김병한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서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학교 주차장에는 최대호 선생님과 배남 선생님이 와 있었다. 나는 배남 선생님의 차를 탔고 우리는 곧바로 지리산으로 출발했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 다음에 인월을 지나서 마천 백무동 계곡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지리산댐 건설을 반대하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이곳에 댐을 막으면 백무동이 다 물에 잠길 텐데, 걱정을 하는 사이에 우리 일행을 실은 승용차는 저녁밥을 먹기로 예약한 느티나무 산장에 닿았다.
산속으로 더 들어가다
느티나무 산장에서 신발끈을 조이고 출발한 시각이 10시 5분이었다. 백무동 등반 안내소에 등반인원을 신고한 다음에 우리는 곧바로 장터목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천천히 오르는 등반길은 순조로운 듯 했으나 이내 숨이 차기 시작했다. 어제 마신 술이 효과를 내는 모양이다. 나는 어떻게 7.5킬로미터를 올라갈 지 눈앞이 캄캄했다. 하동바위를 지나고 철제 다리를 건넜고 참샘에서 목을 축이고 초콜렛도 나누어 먹었다. 마침 등산로 주변에는 꽃들이 피어 있는데 이름을 알지 못해서 꽃들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어떤 꽃이 계속 등산로를 따라서 피어 있는데 야생화 전문가인 조영윤 선생님이 얼레지라고 한다. 얼레지는 장터목을 지나서 제석단 오르는 곳까지 쭉 우리를 따라왔다. 그리고 등산로 주변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따 먹으며 어린 시절을 추억했고 등산길을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소지봉을 지나면서부터는 그래도 걸을 만한 능선길이 이어졌고 망바위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꿀맛 같은 점심을 먹다가 예전 노동자대회에 다녀오다 버스가 전복되어 온 몸에 큰 부상을 입은 진주의 이기순 선생님을 만났다. 윤춘식 선생님의 대학 후배라고 한다. 그때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듯 피부를 이식한 얼굴의 색깔이 푸르스름하다. 부인과 아들을 동행하고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단다. 건강하기를 기원하면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길을 힘차게 올랐다.
드디어 장터목대피소다. 오른쪽으로 가면 세석평전이다. 우리는 왼쪽으로 꺾어들어 천왕봉 가는 길을 오른다. 제석단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 고사목이 널려 있다. 6.25의 비극을 알려주는 흔적이라고 한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불을 질러버렸고 그때 불에 타다 남은 나무가 고사목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고사목이 곧 사라질 지경이다. 제석단 쉼터에서 천왕봉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다. 한 명 한 명 독사진을 찍어주는 조영윤 선생님의 팔이 아플 것 같다. 성능이 좋은 카메라를 갖고 있는 것이 자랑이면서도 이럴 때는 사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맘에 맞는 동지들끼리 산행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공덕을 쌓는 일 아니겠는가?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허리를 구부리고 통과하니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새로 장만한 스틱이 한 몫을 했다. 스틱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다. 이를 악물었다. 생전 처음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데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날씨가 좋아서 주변 능선을 두루두루 둘러보면서 정상에 오르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정말 지리산 산신령이 우리들의 산행을 보우하시는 것 아닌가?
천왕봉에 오르다
드디어 해발 1915미터인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2009년 5월 9일 오후 네 시였다. 이 감격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늘 구름에 가려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천왕봉에 직접 오르고 나니 이제 나는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대학 2학년 때 한라산 정상에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오늘은 그날과는 너무 다르다. 인생의 쓴맛을 겪은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감격을 전했다. 그리고 자습을 하고 있는 전남여고 3학년 12반 아이들에게도 문자를 날렸다.
정상에서는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1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산에 쇠말뚝을 박지 말라’는 절규가 쓰인 알림판을 목에 걸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자연훼손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파렴치한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국립공원 지리산 곳곳에 케이블카를 놓으려는 지자체의 욕망이 지리산을 훼손할 것은 너무나 뻔하지 않는가? 지리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용기를 찬양하면서, 우리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가 새겨진 빗돌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다. 다섯 평도 채 안 되는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는 무리였다. 서명지에 서명을 하고는 천왕봉을 내려와 바로 아래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곳에서 우리는 지리산 신령님께 절을 올렸다. 그리고 각자 마음속으로 기원을 했다. 민족통일의 그날이 어서 오기를, 참교육 실현의 그날을, 아픈 가족의 쾌유를, 세계 평화를, 어떤 선생님의 코가 원상회복되기를, 전남여고 분회의 무궁한 발전을....... 소주 팩 하나와 플라스틱 병 하나 그리고 안주는 참치 캔과 점심 때 남겨둔 반찬, 우리는 빙 둘러 앉아서 음복을 했다. 아, 소주 한 모금이 이렇게도 달콤하다니, 여기가 지리산 천왕봉이라서 그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산 길엔 발목 조심
오후 네 시 반이 넘었다. 우리는 하산을 서둘렀다. 내려가는 길은 힘이 덜 들었지만 관절을 주의해야만 했다. 참샘에 도착하니까 해가 설핏 기울었다. 하동바위에 못 미쳐서 최재원 동지가 랜턴을 켰다. 빨치산들은 별빛도 없는 칠흑같은 밤에도 이 길을 달음박질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까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백무동 야영장이 가까이에 있었다. 드디어 아침에 건넜던 다리를 건너서 백무동으로 되돌아왔다. 산장에 도착하니 밤 8시 30분이 넘었다. 아, 내가 지리산 정상에 다녀왔구나 하는 감동에 젖어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산장의 평상에 앉자마자 나는 거기에 누워버렸다. 몇몇 동지들은 계곡물에 뛰어들어 목욕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겨우 세수만 했다.
산장에서 토종닭 백숙과 닭도리탕을 안주 삼아 마천 막걸리를 몇 사발 들이켜니 꿈만 같았다. 서로가 등산을 하면서 느꼈던 점을 이야기 하면서 끈끈한 동지애를 느꼈다. 백무동을 출발해서 광주에 도착하니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모두가 고생한 하루였다. 서로 서로 안녕이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아들 녀석 표를 예매하려고 광주역에서 내리는데 배낭이 바뀌었다. 권호연 선생님이 내 배낭을 가져간 것이었다. 그러나 연락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내 핸드폰은 배낭에 들어있지만 방전이 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아침에 통화하기로 하고는 피곤한 몸을 뉘였다. 참으로 긴 하루였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붙임 : 동지들 사랑합니다. 권호연, 김병한, 최재원, 윤춘식, 조영윤, 이동근, 배남, 최대호 동지! 참석하지 못한 윤원중 동지, 너무 아쉽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한 이동근 동지와 배남 동지, 수고가 많았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 최재원, 윤춘식 동지, 당신들의 공을 잊지 않겠습니다. 청년의 체력을 과시한 권호연 동지, 무릎 보호대를 찾으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소중한 동영상을 제작해서 나누어 준 김병한 동지,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산행 내내 현장을 생생하게 렌즈에 담아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조영윤 동지, 당신은 진정 영웅입니다. 그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서도 끄떡도 하지 않은 당신의 강철 체력의 비밀을 알고 싶습니다.
비실비실 김성중은 여러 동지들의 덕분에 지리산 천왕봉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등정기는 더 다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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