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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01 :: 선생님은 현실을 너무 몰라요 / 안준철
세상 굴러가는 모습 2006. 12. 1. 09:04

선생님은 현실을 너무 몰라요

‘현실공화국 사람들의 이야기’

안준철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서는데 한 아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는 빙긋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가 내가 돌아서려 하자 급하게 말을 던졌다.


“선생님은 현실을 너무 몰라요.”


처음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감이 오기 시작했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 이 말 때문이냐?”

“그 말 틀린 말이잖아요. 정직하면 손해 보잖아요.”


내 추측이 맞았다. 수업시간에 정직이라는 영어단어를 설명하면서 영어속담을 소개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직하면 당장은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정직만큼 큰 재산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해준 것이었다. 혹시 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 세상풍파를 다 겪어버린 것은 아닐까?


“넌 정직해서 손해 본 일이 많니?”

“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아이의 말에 일단 안심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야. 정직하지 못한 사회니까 너희들더러 정직하게 살라고 말한 거야. 그래야 좀더 나은 사회가 될 거 아니야.”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잖아요.”


아이는 아직도 승복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직해서 손해 본 일도 없는 아이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좋은 기회다 싶었다.


“네가 사장이라고 해봐. 그럼 넌 정직한 사람을 회사 간부로 만들고 싶어, 아니면 거짓말이나 잘하는 사기꾼 같은 사람을 간부로 만들고 싶어? 말해봐.”

“그거야 정직한 사람을….”

“봐. 네 마음에 들려면 정직해야 하잖아. 정직해야 진급도 할 수 있고. 그런데 왜 정직하면 늘 손해 본다고만 생각해?”


아이는 잠깐 할말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곧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더니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에이, 그것은 말이고 이론이잖아요.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한참 현실 이야기를 얘기했는데 현실이 아니라니? 나는 다시 아이를 상대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당장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는 무엇이 잘못된 걸까?


누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까?


그 사회의 오염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정직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익을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손해를 보는 것만 현실로 인정하고 이익을 보는 것은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과거 같으면 너무 순수해서 탈인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그것은 이상은 없고 현실만 있는 이른바 ‘현실공화국’에 사는 우리 어른들의 말버릇 때문일 수도 있다.


“그거야 알죠.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래요?”


공부를 잘 하던 애가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속이 상해 죽겠다고 하소연을 하기에 적절한 동기부여 없이 공부만 강요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 마음을 비우고 자녀와 대화를 해보라고 했더니 대뜸 내게 한 말이다. 자녀와 대화를 해보라는데 웬 현실타령인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찾아주었더니 이렇게 말을 하는 꼴이 아닌가.


“저도 길은 알아요.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래요?”


현실적인 상황판단이나 현실인식이 부족한 사람을 일컬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예를 들자면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당장의 이익에 현혹되어 자녀에게 정직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참된 교육을 등한시하고 오로지 입시에만 매달리는 오늘날의 학교 모습도 그렇다. 그 결과는 너무도 뻔하다. 계속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아니 기막힌 것은) 그런 현실적이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현실을 잘 아는 사람인 양 행세할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눈에 정직한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뿐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공화국, 곧 후진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가 애써 벗어나야 할.


삶을 배우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아, 이런 너무도 당연한 말을 굳이 힘주어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귀가 간지럽다.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에이, 그것은 말이고 이론이잖아요.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잇대어 썼습니다.


2006-11-30 10:51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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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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