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시
언덕 위의 집
정희성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문을 낮게 낸 것일까
무심코 열고 들어서다
이마받이하고 눈물이 핑 돌다
낮게 더 낮게
키를 낮춰 변기에 앉으니
수평선이 눈썹에 와 걸린다
한때 김명수 시인이 내려와 산 적이 있다는
포항 바닷가 해돋이 마을
물이 들면 언제고 떠나갈
한 척의 배 같은
하얀 집
내가 처음 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썹에 걸린 수평선이
출렁거릴 따름이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창을 낸 것일까
머물다 기약 없이 가야 할 자들이
엉덩이 까고 몸 낮춰 앉아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함일까
*민박집 명함에 쓰인 이 글귀는 누구의 시구일까.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시선 291/창비/2008.8.30.초판 1쇄) 58-59쪽
[발문]
1.주인은 왜 이마받이할 정도로 문을 낮게 냈을까?
2.변기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은?
3.해돋이 마을의 배 같은 하얀 집은 어떤 집일까?
4.화자가 바닷가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5.주인은 화장실에 왜 바다를 향해 창을 냈을까?
6.화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엉덩이를 까고 똥을 누고 있다. 배설하면서 원초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원시의 바닷가에서.
[감상]
바닷가 언덕 위의 집 화장실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배설을 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면서 문을 낮게 낸 주인의 생각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수평선을 내다보겐 창을 낸 주인의 마음을 도 헤아려보면서 ‘잠시 머물다가 기약없이 가야할 자들이 몸 낮춰 앉아 똥을 누면서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한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시원을 생각할까. 하늘과 맞닿은 곳을 바라보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질까.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곳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아마 수평선은 평등한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수평선처럼 평등하게 자연처럼 살아갔으면 좋겠다. 하얀 집 배를 타고 저 망망대해 평등의 바다로 갔으면 좋겠다. 권력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그런 무욕의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태춘의 노래가 생각난다.
똥을 누면서 원초적인 자연인 바다를 바라보게 창을 낸 주인의 혜안이 존경스럽다.
더 읽을 시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시선 291/창비/2008.8.30.초판 1쇄) 44쪽
[감상] 얼굴이 저절로 붉어진다. 신부님도 그렇고 화자도 그렇다. 시를 읽는나도 그렇다. ‘젓’과 ‘젖’은 다 [젇]으로 발음한다. 그런데 이어서 읽으면 [저시]와 [저지]로 다르다. 그런데도 묘하게 자매님의 ‘젓’이 ‘젖’으로 읽히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이것이 언어의 유희가 아닐랑가. ‘젓’을‘과 ’젖을‘ 다 [저슬]로 읽고 싶은 마음을......
다른 시집의 시 1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정희성 시집 [詩를 찾아서](창비시선 207/ 2001.6.5 초판 1쇄/2008.8.14 초판 6쇄) 41쪽
[감상] 세상은 고요해졌다.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외치던 시절도 지나갔고, 최루탄이며 지랄탄을 쏘아대던 시절도 아니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진 자들이 저항하고 있고, 저항은 그들의 밥과 권력이 되었지만, 화자와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도 하지 못한다. 이제 벗들은 말수가 적어졌고 세상은 뜨거운 한여름의 한낮처럼 고요해졌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가?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 이후 무너져버린 중산층의 신화는 언제나 회복할 수 있을까? 자본에 묶여버린 우리 얼간이들의 무력한 모습을 본다. 2008년 오늘은 더 험하지 않을까?
다른 시집의 시 2
시를 찾아서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화암사엔
절 없이 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시집 [詩를 찾아서](창비시선 207/ 2001.6.5 초판 1쇄/2008.8.14 초판 6쇄) 12-13쪽
[감상]이파리와 꽃대궁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처럼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곱디 고운 신심이 곧은 우바이처럼 시 또한 고운 자태로 시장바닥을 걷고 있다.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진흙탕에서도 연꽃은 하얗게 피어나듯이. 시는 이렇게 곱고도 순수한 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참고 : 우바새[優婆塞, upasaka](산스크리트 upāsaka는 '받드는 사람'이라는 뜻) - 석가모니를 신봉하는 재가 신자. 여성 재가 신자는 우바이(優婆夷 upāsikā)라고 한다. 원래 출가 교단의 성원이 아닌 불교 신자를 통칭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는 재가 신자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서원을 세우고 매주 휴일마다 절에 다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된 이래 사람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남녀, 종족, 사회적 계급·신분 등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누구든 오로지 삼보(三寶) 곧 부처(佛), 부처의 가르침(法), 부처를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僧) 등을 인정하기만 하면 불교 신자가 된다. 불교의 재가 신자는 살생하지 말 것, 훔치지 말 것, 음행을 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 등의 5가지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함으로써 출가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것이 기본 역할이다. 동남아시아의 상좌부불교 전통에서는 종교적인 길에 있어 재가자와 출가자를 구분하여 대개 정신적인 해탈, 곧 열반의 성취는 오로지 세속적 생활을 포기하고 출가해야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티베트와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그와는 달리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면서도 훌륭한 정신적 지도자가 다소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출전 -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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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펭귄
박형준
얼음이 단단해지는 남극의 겨울이 오면 황제 펭귄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동한다. 포식자를 피해 짧은 다리로 빙산을 타고 얼음길을 걸어 바람막이의 안전한 평지를 찾아 100㎞를 이동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의처럼 짝짓기를 끝내고 암컷은 알 낳기에만 몰두하여 몇 주 후에 주먹 크기만 한 알을 낳는다. 암컷은 힘을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어 수컷에게 넘긴다.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기기 위해 수컷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신속하게 알을 건네준다. 수컷의 짧은 두 다리 사이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이 속에서 알은 안전하게 부화의 과정을 거친다. 암컷들은 다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때부터 수컷들의 순례의 행진이 시작된다. 눈보라와 영하 60℃의 강추위 속에서 수백만 마리의 수컷 펭귄들이 다리 사이에 알을 끼우고 암컷들이 떠난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을 지키기 위해 둥그렇게 뭉쳐 서로를 보호한다. 온몸이 눈보라에 뒤덮인 채로 어둠 속에서 백야의 무덤이 되어간다.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펭귄들은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들은 그렇게 2개월 이상을 보낸다. 드디어 순례의 정점에서 새끼들이 부화하고 수컷들은 되새김질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여주지만 그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한계에 도달한다. 바로 이때 저 멀리 바다에 가 있던 암컷들이 입안에 가득 먹이를 지닌 채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암컷들의 실루엣에 커다랗게 원을 이루면서 뭉쳐 있던 수컷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짝을 부른다. 2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암컷들은 자신의 짝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입에 가득 문 먹이를 품은 채 뒤똥거리는 다리로 수컷과 제 새끼에게 안겨든다.
이 보도승들에겐 흔히 Emperor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 피안의 황제들은 자신을 침묵 속에 열어놓고
자신의 고독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봄은 의지로 온다.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 2008.5.10 초판 발행) 184-185쪽
[감상]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다. 봄은 ‘의지’로 온다. 살려는 자들의 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독한 세월을 버팅기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극한의 세계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황제 펭귄의 부성애와 모성애를 단지 본능만으로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짧은 다리로 뒤똥거리며 100㎞를 걸어서 바람을 막아주는 평지를 찾아서는 알을 낳고 암컷은 원기를 회복하려고 100㎞를 되돌아서 바다로 가고, 수컷은 2개월 이상을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하 60℃의 강추위 속에서 알을 품고서는 부화시키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 어디 있는가. 수백만 마리의 수컷 황제펭귄들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서는 알을 품는 장면은 백야의 무덤이면서도 엄숙하고 장엄하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우리 인간이 절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먹이를 입에 가득 문 채 암컷이 돌아오고서야 수컷들의 순례행진은 끝이 난다. 이제 펭귄 가족은 살맛이 나는 것이다.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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