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25./시울/김성중
쪽빛 문장
――오솔길의 몽상 10
고재종
연두 초록 눈 시린 산에 오르다
봄볕에 몸을 데우는 너덜겅의 꽃뱀을 보네.
온몸으로 기며 온몸으로 대지를 읽는
꽃뱀만이 짤 수 있는 그 화려찬란한 등무늬.
사방에서 무어라 무어라고 속삭이는
연두 초록의 전언은 무엇이랴.
새 중에서 가장 청량한 소리의 휘파람새야.
꽃 중에서 가장 앙증맞은 담자색 구슬붕이야.
나의 문장이 초록 바람의 향기를 맡고
골짝물의 쪽빛을 얻기까지는 언제랴 싶어
감았던 눈을 뜨니 철쭉밭으로 드는, 저 꽃뱀!
*고재종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2004.10.30.) 58쪽
[감상]
시인은 시방 오솔길에서 몽상을 하고 있다. 연두빛과 초록빛으로 빛나는 초여름의 산길은, 오솔길은 얼마나 눈이 시린가. 그 숲길에서 모을 데우는 꽃뱀을 만난다. 꽃뱀은 비늘다리로 기어가면서 온몸으로 대지를 읽는 존재다. 그 꽃뱀은 얼마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가. 꽃뱀을 몸에 두르고 싶은 충동을 시인은 억제하고 있으리라.
시인은 휘파람새와 구슬붕이를 불러 연두와 초록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물어본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오솔길에서.
시인은 초록의 향기를 맡고 골짝물의 쪽빛을 얻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몽상을 한다. 몽상에서 깨어나 바라보니 꽃뱀이 붉은 철쭉밭으로 들어가고 있다. 꽃뱀과 철쭉꽃의 그 붉은 색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원시적 건강함이 아닐까.
쪽빛 문장을 얻고 싶어 하는 시인의 소망은 이루어질 것인가. 그냥 몽상으로 끝날 것인가. 자연에 파묻혀 지내는 삶은 얼마나 호젓한가.
나도 오솔길에서 몽상을 하고 싶다.
거대한 고독
오늘도 슬픈 지상에선 무차별한 폭격과
한 청년의 외로운 참수가 있었다. 나는
좀이 슬어 엽맥만 남은 잎새 같아서
저렇게는 반짝이며 뒤설레는 바다를 본다.
휴대폰 벨소리며 손목시계의 맥박들을
쪼아버리는 갈매기 울음 부리는 때마침 다행.
죄다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것들,
죄다 썩거나 치유할 수 없는 것들의 생이
저 거대한 고독 속으로 몰려들어선
쩍쩍 아가리를 벌리며 아우성치는 노도라 할까.
저만큼 수평선의 까치놀만은 요요하게
삶을 미학으로 번역하기 바쁜 것이어서
나는 하마터면 탄성을 발할 뻔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 아득하면 될 뿐인 생이 있으리라.
이 소금기로도 못 씻는 생어물 썩는 내며
한껏 핀 해당화가 감춘 독가시들조차
다만 출렁거리면 되리라, 믿은 적도 있지만
나는 다시 어쩌려고 바다를 본다, 누군들
저 검은 심연이자 매끈한 매혹을 모르랴만,
익명의, 익명의 떼거리로 몰려 죽거나
수많은 응시 속에 홀로 참수될 생들의
거대한 고독, 그 속에 내가 잠겨서
영정(零丁)의 폐선 한 척으로 깜빡이는 시방은
저렇게는 파랑주의보 하나 없는 금결 은결.
우리 모두 태어나기 전에는 죽어 있었다*.
*프레데릭 파작의 《거대한 고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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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2004.10.30.) 20-21쪽
[감상]
프레데릭 파작의 《거대한 고독》21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파베세는 그의 일기 『삶이란 직업』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체험 앞에서 초보자, 죽음은 난데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모두 태어나기 전에는 죽어 있었다.”
파베세는 42세이던 1950년에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16알의 수면제와 독약을 먹고는 자살한 작가다.
시인은 거대한 고독 속에 잠겨 있고 바다는 금물결과 은물결로 반짝이는데......
죽음은 늘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거늘....
더 읽을 시
까치집
반칠환
망치도 없고 설계도도 없다
접착제 하나 붙이지 않고, 못 하나 박지 않았다
생가지 하나 쓰지 않고, 삭정이만 재활용했다
구들장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지만
성근 지붕 새로 별이 보이는 밤이 길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따뜻한 심장 같다
주머니난로 같은 까치 식구들이 드나든다
까치집을 품은 나무는 태풍에도 끄떡없다고 한다
까치들이 영악해서 튼튼한 나무만 고른다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까치들이 둥지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은 노래도 들려주고, 벌레도 잡아주는
까치가 고마워서 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무들은 여름엔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겨울엔 낙엽을 떨구어 햇살이 들게 해준다
나무와 까치는 임대차 계약도 없이 행복하다
*『시와상상』 2008년 봄호 : 『문예연구』 57호(2008년 여름) 248-249쪽에서 재인용
빙하기가 멀지 않았다
이기윤
겨울잠을 설친 지리산 반달곰들이 동굴 밖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마른 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광경이
그대로 집집마다 전송되던 한겨울 저녁
기후온난화 증거라는 앵커의 굵은 목소리가 끝날 때쯤
김이 나는 시루떡을 들고
맞은편 403호의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파트 문을 열지 않은 채, 누구세요?
한 손에 떡을 받쳐 든 채 나는, 오늘 앞집에 이사온 사람인데요
그러자 금방, 아! 그 이사떡은 먹은 걸로 할게요
용케도 손에 들린 것까지 보았는지 더 이상 대꾸도,
얼굴도 듣도보도할 수 없었다
동면굴보다 더 찾기 힘든 같은 통로 12층
집집마다 문 두드리며 오르내리다 집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시루떡이 저 혼자 몸을 움츠린 채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서울 겨울 저녁에
*『시와반시』 2008년 봄호 : 『문예연구』 57호(2008년 여름) 24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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