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8. 10. 1. 21:34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

-어떤 배나무숲에 관한 기억


압구정동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카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그 옆은 뭐, 매춘의 나영희가 경영한대나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 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며 펜트하우스를 팔고 다니던,

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

교환하던 녀석, 배나무숲 너머 산등성이 그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

피식, 벌거벗은 금발 미녀의 꿀배 같은 유방 그 움푹 파인 배꼽 배……

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

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

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

유령처럼 축구를…… 해골바가지…… 난, 자식아, 여기 최후의 원주민이야

그럼 난…… 정복자인가? 안개 속 한남동으로 배추 리어카를 끌고 가던

외팔의 그애 아버지…… 중학교 등록금…… 와르르 무너진 녀석의

펜트하우스, 바람부는 날이면 녀석 생각이 배맛처럼 떠올라 압구정동

그 넓은 배나무숲에 가야 했다 그의 십팔번 김인순의 여고 졸업반

휘파람이 흐드러진 곳에 재건대원 복장을 한 배시시 녀석의 모습

그 후로부터 후다닥 梨田碧海된 지금까지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디서

배꽃 가득한 또 다른 압구정동을 재건하고 있는지…… 바람부는 날이면

배맛처럼 떠오르는 그애 생각에 배나무숲 있던 자리 서성이면……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수많은 배들이…… 지금

이곳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배로 한꺼번에 쏟아져들어가 배나무보다

단단한 배포가 되었을까…… 배의 색깔처럼…… 달콤한 불빛, 불빛

이 더부룩한…… 싸늘한 배앓이…… 바람부는 날이면……



*유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 시인선 104/초판 1쇄 1991.4.14/재판 11쇄 2005.3.11) 60-62쪽


[발문]

1. 압구정동은 어디에 있는가?

2.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카페의 역할은?

3.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은 어떤 가게일까?

4. 펜트하우스는 무엇인가? -포르노잡지, 원래는 전망이 좋은 방이나 집.

5. 배밭은 왜 사라졌는가? -

6. 최후의 원주민은 무슨 뜻인가? -

7. 시의 화자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는 이유는 ?

8.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 인간의 욕망, 자본, 부동산

9. 시의 화자의 배앓이의 원인은?


[감상]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배밭이나 과수원이 사라진 곳에 생긴 압구정동! 한명회가 놀던 압구정(鴨鷗亭)은 흔적도 없어지고 정자 이름만 남아있는 동네, 압구정동(狎鷗亭洞). 지금은 아파트촌.

중학교 때 양아치란 별명의 그 애는 ‘펜트하우스’라는 포르노 잡지를 팔아서 학비를 마련했고, 그 애의 외팔이 아버지는 배추를 팔러 한남동으로 리어카를 끌고 갔다. 그 애의 펜트하우스(전망 좋은 집, 언덕 위의 달동네 집)는 도시개발로 무너져 없어지고 현대아파트 대림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조성됐구나.

나는 지금도 그 친구가 생각나지만 만날 수 없다. 최후의 원주민이 정복자의 불도저에 정복되던 날 이후, 그는 배꽃 가득 핀 또 다른 압구정동을 재건하고 있는지 모른다. 배꽃이 피던 그 시절은 그래도 시인에게는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인간미가 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어버리고’, 배포만 커진 사람들이 피우는 달콤한 유혹의 불빛에, 시인은 소화불량이 되어 싸늘한 배앓이를 하는 것이다. 압구정동은 시인에게 양가적이다. 욕망의 통조림이기도 하지만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애와 더불어.

더 읽을 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

유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논 빨간 책, 육체와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 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짓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청춘의 레지스탕스, 지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生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

별빛의 찬란함으로 팔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애꾸눈으로 사랑하리


*유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 시인선 172/초판 1쇄 1995.10.27/초판 5쇄 1996.12.5) 92-93쪽


[감상]

세운상가(世運商街)는 서울 종로 3,4가에 있는 종합상가로서 1968년에 김수근이 디자인하고 김현욱 시장이 건립한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이후 세운상가는 서울의 유일무일한 종합 가전제품 상가였다. 특히 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987년 저작권법이 도입되기 전 한동안 소프트웨어를 카피하는 카피점이 성행했다. 세운상가 사람들이 모이면 잠수함이나 핵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서울시는 1987년 용산전자상가를 조성하여 상가를 이전하기로 했고 90년대 이후 대부분이 이동하여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아직도 전자 상가들을 비롯하여 전자 부품, 중고 가전제품 등 18,000여개의 가게들이 있으나 세운상가는 2008년 하반기부터 철거하여 새로운 상가를 건축하기로 되어 있다.

키치문화와 하위문화가 꿈틀대는 세운상가에서 청춘의 열병에 몸부림치는 하이틴이 떠오른다. 온갖 것들이 복제되는 세운상가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넋을 본다. 절망하며 욕정에 시달리며 학교를 저주하던 반항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이 보인다. 진리가 발가벗어버린 곳에서 ‘나’는 허무의 블랙홀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을 유희하는 사유의 야바위꾼이 되어버렸다. 1970년대 후반의 유신치하에서 박제된 지식만을 외우게 하던 학교와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런 뒤틀린 청춘을 생산해낸 것은 아닌지.

시인은 지금도(1995년) 해적판으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세운상가 아이들은 애꾸눈으로 세상을 본다. 온전히 눈을 뜨고서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세상.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금지된 것이 많으므로, 십대의 고등학생보다 더 나으리라고 말하지 못하리.



추천시

천일馬화-변마의 독백

유하


내 이름은 돈벼락. 통산 전적 68전 2착 세 번. 그나마 그 중 하나는 수년 전 단거리 경주 때 도주 후 버티기 작전으로 겨우 따낸 것.

혈통? 나의 父馬는 뉴질랜드 변두리 경마장에서 바닥을 쓸다 사라진 부진마였다

주행 습성은 추입. 각종 예상지의 경주 평가란엔 후미 탐색이라 적혀 있다. 말이 좋아 후미 탐색이지 실상은 해찰하며 동료들의 꽁무니를 좇았을 뿐이다.

데뷔 시절. 나의 脚質은 도주였다. 땅! 소리와 함께 단독 선행으로 질풍노도처럼 튀어나가지만, 직선 주로에 접어들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나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 후 나는 거세마가 되었다

요즘 나는 질주가 싫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이 돌고 도는 말의 원형 트랙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자는 불행하다. 세인들은 그를 똥말이라 부른다.

나는 주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내가 말이기를 멈추는 순간, 나는 불용 처리되어 단돈 몇 푼에 식용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그런 나에게 꾸준히 돈을 거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그는 최근 한국 사회의 便馬性을 풍자한 「천일馬화」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다. 경마장 안팎으로 쉬지 않고 질주하는, 똥말 똥시인 똥감독 똥교수 똥기자 똥정치……

하긴 대한민국 경마장 말치고 똥말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사내는 3년 전부터 나를 추적해왔다. 그가 나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나 같은 똥말만이 그에게 999배당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사내는 마권을 산 후 전광판을 바라보며 깊게 담배를 빤다. 밀린 세금이, 마권처럼 구겨진 청춘이, 떠나간 애인이 빠르게 배당판을 스쳐간다.

나를 사랑한 자들은 모두 그랬다. 어디 한 군데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채 표표히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세속의 온갖 말들의 후미에서 해찰하는, 불용 처리 직전의 부진한 말들만을 사랑하는 게 그의 업이기에.

그는 말의 고배당만을 노리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경주는 새로이 시작되고, 욕망은 지연된다. 나의 질주는 반복되고 누군가는 또다시 나를 기다린다. 결승선 전방 어디쯤 후미 그룹을 형성하다 벼락처럼 치고 나오는 짜릿한 나의 모습을.

두두두두두 똥말은 달려간다. 천일마화여, 두두두두 마각을 감춘 채 세상의 똥말들은 쉬지 않는다

나의 왕인 고객이시여, 아직은 칼을 거두소서.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나는 여전히 후미 탐색 중이니까요. 기다림을 멈추지 마세요. 언젠가는 대박을 안겨드릴 거예요

그럼요, 멋지게 인생을 역전시켜드리겠어요



*유하 시집 『천일馬화』(문학과지성 시인선 250/초판 1쇄 2000.11.17./초판 2쇄 2002.5.10.) 37-39쪽


[감상]

경마장에서 생긴 일. 경마장에 가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지만, 경마장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을 탕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시인은 똥말에게 배팅하며 3년째 경마장에 드나들고 있다. 이시의 화자는 경주마다. 경주마의 애환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생에 대한 은유다. 경주마가 트랙을 돌듯이 우리네 인생도 직장을 중심으로 불용처리가 될 때까지 돌아야 하는 경주마와 무엇이 다르랴. 인생역전을 꿈꾸며 로또복권을 사보아도 늘 비켜가는 것.

아무리 폼을 잡아도 언제나 똥폼인 것을.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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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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