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시
예천 태평추
안도현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 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혹시 귀한 궁중음식이라는 탕평채가 변해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허나 세상은 줄곧 탕탕평평(蕩蕩平平)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탕평해야 태평인 것인데, 세상은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기 일쑤였고 그리하여 탕평채도 태평추도 먹어보지 못하고 나는 젊은 날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술집을 찾아 예천 어느 골목을 삼경(三更)에 쏘다니다가 태평추,라는 세 글자가 적힌 식당의 유리문을 보고 와락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 있었던 것인데, 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가 대신에 때마침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인데,
그날밤 하느님이 고맙게도 채 썰어서 내려보내주시는 굵은 눈발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시선 283/창비/2008.1.21. 초판 1쇄/2008.2.5. 초판 2쇄 발행) 59-61쪽
[발문]
1. 태평추는 어떤 음식인가? -
2. 삼십년 동안 태평추를 먹지 못한 이유는? -
3. 80년대에 화자가 태평추를 더올린 이유는? -
4. 세상이 탕평하지 않은 이유는? -
5. 예천에서 태평추라는 간판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이유는? -
6. 눈이 오는 밤에 태평추나 한 그릇 간절하게 참 철없이 먹고 싶었던 이유는? -
[감상]
어릴 적에 먹던 음식을 떠올리는 시인은 참 행복할 것이다. 그 시절 궁중음식인 ‘탕평채’가 변한 이름일 ‘태평추’를 겨울에만 먹었던 외갓집은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일까? 하지만 태평해야할 세상은 언제나 왼쪽이든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어 탕탕평평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탕평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은.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 탕평추를 눈이 오는 날 한 번 먹어보고 싶다. 탕탕평평한 세상을 꿈꾸며.
더 읽을 시
명자꽃
안도현
그해 봄 우리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초경(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렸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낙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홍등(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자진(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봉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시선 283/창비/2008.1.21. 초판 1쇄/2008.2.5. 초판 2쇄 발행) 18-20쪽
[감상]
소년기의 짝사랑이 아프다. 옆집 살던 명자누나와 명자꽃(산당화)이 겹친다. 붉게 핀 명자꽃은 예쁘지만 떨어진 꽃은 추하다. 그러하듯이 애비 없는 자식을 낳아서 고향에 돌아온 망가진 명자누나는 나에게 아픔만을 남겨주었다. 시인의 인생초기에 명자누나가 남긴 아픔은 시인을 시인이 되는 길로 내몰았을 지도 모른다.
추천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 시인선 346/문학과지성사/2008.4.18. 초판 1쇄발행) 20-21쪽
[감상]
세상은 온통 슬픔이다. 과거도 미래도 슬프다. 현재는 꽃이 피는 시간이고, 꽃이 지기 때문에 슬픈 시간이다. 그래서 슬픔이 없는 15초간은 짧은 시간이지만, 15초 동안이나마 슬픔이 없어서 다행이다. 슬픔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안고 있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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