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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24 :: 죽음에게는 먼저 / 황규관 / 프레시안에서
- 2009.01.07 ::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 공광규
- 2008.12.28 ::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야유 / 송경동
동그라미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이대흠 시집 『물속의 불』(시작시인선 0080/천년의 시작/2007.1.30.) 37-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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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게는 먼저
- 2009년 용산 학살에 대해
황규관
죽음에게는 죽음에 합당한 예가 있어야 한다
맞아 죽었건 빠져 죽었건 가장 행복하게
지난 시간을 한 번 더 꿈꾸다 죽었건
죽음에게는 죽음에 합당한
산 자의 예의가 보태져야 한다
그게 애통이든 극락왕생에 대한 기원이든
차라리 잘 가셨네, 하는 체념이든
죽음에 대한 예의가 곧 산 자의 삶이다
그런데 이제 죽음도 장사가 되고 정치가 되고
타락한 언어의 진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도 죽음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삶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사람들을 아예 밀어 죽이고도
태워 죽이고도 패 죽이고도 법을 말하고 사회를 말하고
국가의 안녕을 운운하는, 산 자의 안전을 들먹이는
죽어 핏기 하나 없는 웃음들이 희번득이고 있다
권력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경제의 이름으로
지성의 이름으로
죽음에 합당치 못한 무례가 넘쳐나고 있다
죽음에게는 먼저 예의를 차리는
산 자의 염치와 겸손이 있어야 하는데
죽인 자의 자책과 통곡이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께 혼나는 아들의 눈물바람이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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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버스로 다녀왔다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탄 것이다
이곳저곳 좁은 길을 거쳐
느릿느릿 기어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집 앞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집 앞도 지나고
스캔들양줏집 간판과
희망맥줏집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이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보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로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공광규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의 시집 179/실천문학사/2008.11.24.) 14-15쪽
☆별똥별의 단상★ :
완행버스를 타고 달팽이처럼 기어가고 싶다. 초고속열차가 대한민국을 서울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지금, 사람들은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려고만 한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있는데, 사람들은 도대체 참거나 기다릴 줄 모른다. 오늘이 이 세상의 종말의 날인 양 서두르기만 한다. 오늘은 손님이 없어도 내일은 손님이 바글바글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을 텐데.
시인은 속도를 줄이고서야 인간이 사는 세상을 보고 있다. 느림보 완행버스에서 희망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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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야유
송경동
시를 쓸 수 없다
5류지만 명색이 시인인데
꽃이나 새나 나무에 기대
세사에 치우치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
자리에만 앉으면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을 곳에서 목을 매단
이홍우 동지를 위해
겨울 바닷가 조선소 100m 공장 굴뚝에 올라
며칠째 굶으며 또 고공농성 중인 이들이 먼저 떠오르고
한 자라도 쓸라치면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생각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병원 안 성탄미사 자리에서 쫓겨나
병원 밖에서 눈물 시위를 하던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들의 눈물이 먼저
똑똑 떨어지고
한 줄이라도 나가볼라치면
1년 내내 삭발, 삼보일배, 고공농성
67일, 96일 단식을 하고서도
다시 초라하게 겨울바람 앞에 나앉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동지들의
한숨이 저만치 다음 줄을 밀어버리고
다시 생각해보자곤 일어나 돌아서면
그렇게 900일, 400일, 300일을 싸우던
KTX, 코스콤, GM대우, 재능교육 비정규직 동지들의 쓸쓸한 뒷모습
못 다 이룬 반쪽의 꿈을 접고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랜드-뉴코아 동지들이 먼저 보이니
미안하다. 시야.
오늘도 광화문 청계광장 변에서 달달달 떨고 있는 시야
서울교육청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야
YTN 앞에서, MBC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야
까닭모를 경제위기로 생존권을 박탈당하며
이 땅 어느 그늘진 곳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천만의 시야
나도 알고 보면 그냥 시인만 되고 싶은 시인
하지만 이 시대는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시대
*12월 27일, 청계광장 마지막 비정규촛불문화제 땜방 시
*2008년 12월 28일 (일) 11:36:44 /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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