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의 서울 설계도
김기림
대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서울의 미래에 어떤 꿈을 그려야 할 것인가. 「토마스․무어」의 「유토피아」나 「윌리엄․모리스」의 「노웨어」(無可有鄕)를 본받아 천진난만한 꿈을 꾸며볼 것인가.
여하튼 꿈을 가지는 것만은 세상의 아무런 법령도 권력도 막지 못한다. 그러니까 꿈은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영토(領土)요, 노리개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서울은 나날이 눈을 떠보면 딱한 이야기와 먼지만 쌓여간다. 따스한 봄볕이 쪼이고 기름비가 뿌려도 싹트지 않은 불모(不毛)의 땅-그것이 「엘리엇」의 「황무지」였다. 그러기에 이 황무지에서는 꽃피는 4월도 도리어 잔인한 달인 것이다.
그렇다고 「올더스․헉슬리」의 「훌륭한 새 세계」의 「패러독스」를 나의 서울 위에 연상해야 옳을까. 그는 현대문명의 물질주의와 기계론이 끌고 갈 끝판의 세계의 바삭바삭한 기계 그것과 같은 생활과 환경을 가상해 놓고 그것에 빈정대는 의미에서 「훌륭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나의 서울에는 그런 의미의 물질문명이나 기계문명이라도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저 19세기의 헤어진 선로를 달리는 박람회(博覽會) 퇴물 같은 깨어진 전차를 보라. 원자력(原子力) 이야기나 양자론(量子論)을 외우는 젊은 자손들이 타고 다닐 물건짝인가 아닌가. 불란서 「코티」와 연지를 바르고 전기장치로 머리에 인조(人造) 「웨이브」를 나부끼며 익숙지 못한 굽 높은 구두를 간신히 조종하는 우리나라 아가씨들을 위하여도 실로 미안하기 짝이 없다. 승강기 하나, 「에스칼레이터」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서울-그러면서도 국제정국의 사나운 바람이란 바람은 모조리 받아들여야 하는 벅찬 도시-낙관론(樂觀論)도 비관론(悲觀論)도 끌어낼 수 없는 기실은 말할 수 없이 딱한 도시-.
가령 적어도 1만「톤」급의 상선(商船)이나마 인천(仁川) 부두에 두세 척은 놓아 붙여서 원료(原料)를 부리고 그 대신 가공품(加工品)을 실어 내며, 월미도(月尾島)에서 기동차를 잡아탄다면 서울까지 내처 일체 전기로 돌아가는 공장지대 부평(富平)․영등포(永登浦)벌을 이글이글 타는 전기로와 「콘베어」의 「벨트」소리를 보고 들으면서 외국손님들이 「아이론」에서 금방 빠진 남빛 제복에 흰 목도리 단 차장 아가씨에게서 받은 「금강산 안내」를 한두 장 제끼며 감탄하는 사이에 어느새 한강 철교를 건너 서울역에 닿는다 하자. 김포공항(金浦空港) 설계는 건물과 시설에 일체 빛을 쏠 것을 조건으로 하고 「헨리․무어」군에게 한 번 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불순한 동기를 가진 일체의 비행기는 통과조차 금할 것이며, 모양과 성능에 있어서 우수한 나라 여객기에만 들리기를 허락할 것이다.
거기에 들어서면 근무 마감시간인 오후 세시-단 「서머․타임」이 아니다-까지는 거리에는 바쁜 사람뿐이고, 집에는 할아버지․할머니쯤 남아 있을 것이며 젖먹이는 탁아소(託兒所), 아이들은 학교에, 앓는 이는 국립병원(國立病院)에, 어머니는 혹은 부락 공동빨래터에 당번이 되어 갔을지도 모른다. 식사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전문가의 「칼로리」 계산을 기초로 한 영양식을 국가의 감독 아래서 제공하는 부락마다 있는 공영식당(公營食堂)에서 하는 게 좀 편하고 좋으랴.1
오후면 거리에는 산보하는 사람들로 넘칠 것이며, 극장과 영화관에서는 일체의 「데카당스」는 구축되고 창조적 예술가들의 높은 예술활동의 자유로운 무대가 시민들의 오후와 초저녁을 위하여 제공될 것이다. 혹은 「케이블카」로 남산 꼭대기로 공치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진고개 어구로부터 구리개․종로 네거리에 이르는 일대는 공공기관과 백화점 및 대내․대외의 「비지네스․센터」로 고층 건물의 「불럭」이 된 것으로 그 적에는 「반도호텔」쯤은 어느 틈에 끼어버려서 그리 눈에 뜨이지도 않을 것이다.
경관의 사무는 주장 교통정리나 집 잃은 아이 맡아 보기가 고작이 되고 말 것이고 절도․강도․사기․횡령의 파렴치죄들이 생길 필요와 틈바귀가 없는 여기서는 경찰사무는 거지반 여자경찰이 처리하고 말 것이다. 힘이 자랑인 패들과 목적 없는 공격정신이 그저 왕성해 못견디는 치들을 위해서는 그렇다, 서울운동장을 개방해서 하루 일 마감 뒤에는 「스포츠」를 장려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회의에라도 나가면 한바탕 떠들지 않고는 생리적으로 배기지 못하는 패들을 위해서는 「런던」「하이드․파크」를 본 뜬 공원을 몇 개 시내에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는 방음장치를 할 것이며 공원 안에는 원숭이를 많이 기를 것이다. 변사의 기운을 돋기 위해서는 그 원숭이들에게 박수(拍手)를 연습시키면 좋겠다.
낙산(駱山) 밑 일대의 대학촌(大學村)에 접어들면 거기는 이 나라 모든 계획의 과학적 연구와 조사와 준비가 진행되는 곳으로 세계의 각 대학들과 연락되어 있으며, 창경원(昌慶苑)은 대학에 연결되어 대학 박물관(博物館)․식물원(植物園)․동물원(動物園)으로 운영될 것이며, 원남동(苑南洞)에서 연건동(蓮建洞)을 돌아 혜화동(惠化洞)「로타리」에서 끝나는 일대는 이른바 대학가(大學街)로서 「아스팔트」로 죽 포장한 한길 양편에는 주로 학생을 위한 책점․찻집, 간단한 「밀크․홀」․「비어․홀」․학용품점만이 허락될 것이다. 그리고 낙산 밑으로 해서는 교수와 직원들 사택이 여유 있게 준비되어서 교수끼리 사택 때문에 경쟁이 붙어 싸울 것까지는 없이 될 것이다. 그러면 대체 그 낙산 일대의 움집과 「하꼬방」들은 어찌 될까. 만약에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리로 가서는 아마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벌써 남산 너머와 신당리(新堂里)․정릉리(貞陵里)․당인리(唐人里) 쪽 「아파트」와 전원주택(田園住宅)으로 옮아가고 낙산은 녹림지대(綠林地帶)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주회(周廻)기동차와 급행「버스」로 도심지대의 일터나 공장으로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도 저도 한바탕 꿈이 아닌가. 꿈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꿈이다. 혹시 후세 사람들이 비웃어 「8.15의 꿈」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권력 싸움과 음해질을 그만두고 요만한 정도의 꿈은 좀더 성실히 서로 반성해 볼 수는 없을까. 우리는 그만 꿈은 꿈이 아니라 최소한도의 당연한 도시계획으로 내일부터라도 위원회쯤 만들어 볼 일이 아닐까. 하면 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운명의 주인이라야 할 것이다. 금후의 정치가란 권모술수의 명인이 아니고 기실은 얼른 보면 무미건조한 기사(技師)인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공화국(共和國)」의 개정판(改訂版)을 내서 그의 「공화국(共和國)」에서 주책없는 눈물의 마술사․시인(詩人)뿐만 아니라 정객(政客)마저 입국(入國)을 금하고 국가의 경영을 기사(技師)의 손에 맡겨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민성(民聲)」 5권 5호, 1949. 4)-김기림 전집 5권 404-406쪽(심설당,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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