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야기 2007. 11. 22. 09:57

[대표시]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장석남(28-29쪽)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장석남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2007.5.4. 5쇄)


[발문]

1. 미소의 뜻은?-소리를 내지 않고 표정만 살짝 지어 웃는 엷은 웃음. 알듯 모를 듯한 웃음. 긍정인가 비웃음인가.

2. 미소는 어디로 가는가?-감포 바다, 등꽃 그늘, 우물, 소나기, 무덤가, 화엄사 저녁종

3. 꽃과 잎들과 나 사이, 나와 그녀 사이, 나와 사이의 ‘사이’는 어느 정도의 거리일까?-가늠하기 어렵다.

4. 미소는 대상을 만나면 대상과 친해지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관심, 사랑, 애정

5. 무엇이 삶을 긍정하게 하는가?-‘미소’라는 시어 자체가

[감상]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세상을 살짝 웃으며 주유하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해야 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팍팍한지를 알기에 우리는 도통한 것처럼 미소를 띠기가 쉽지는 않다. 미소는 새파랗다. 젊다. 늙은이가 아니다. 그러기에 미소는 패기가 있다. 대상을 만나면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변신술을 갖고 있다. 이만한 긍정과 조화가 어디 있겠는가. 이 시의 화자도 미소를 닮고 싶어한다. 대상과 나의 사이를 좁히는 미소를 띠고서.

[더 읽고 싶은 시]

옛친구들 / 장석남(54-56쪽)


근 십 년이나 못 만난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래 그것은

나이도 나이지만 새것이 되어 서 있는 가을 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게 만든다

간혹 물든 잎들이 떨어지는 각도를 손바닥을 펴서 받아든다

만난지 십 년이 넘은 친구를 만나서 나는 이 낙엽의 각도를

십 년간 키워온 나의 사상이라고 말해주련다

나의 사상,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위대하다

지난 봄에도 몇 개의 묘목들을 사다가 수돗물을 뿌리면서 계단 아래 흙에 묻었었다

나의 사상,

계단을 오르내리며

오르고 내리는 것의 섭리를 생각한다

국제 정세와 남북경협을 생각하기도 한다 위대한 진리인 미국을 생각하고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끽 소리 나지 않게 우아하게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목숨은 그래도 끝까지 부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찍 소리 나지 않게 나를 단속하고 간혹은 딴청을 부려야 한다는 기교까지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또 한 친구는 영업을 하려 든다

물이 중요하다고, 요는 정수기를 들이라는 친구가 있고

낡은 차를 바꾸라는 친구가 있다

신문에서 두어 번 보았노라고 대뜸 술을 사라고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정치인 취급을 하는 친구가 있다

어떤 친구는 과거를 험담한다

나의 정직은 과거에도 있지 않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나의 정직모든 시간 속에 長江萬里와도 같이 유유하다

유유한 시간 속의 정직을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는

아름답게 수식한다 나는 저 수식이 좋구나

나는 이 가을 나무 아래 더 앉아 있다가

더 오래 앉아 있다가 불이 켜지는 서울을 내려다보며

더, 더 앉아 있다가

이 나뭇잎이 수북이 한 인간을 다 덮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뭇잎이 어깨를 친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점점 새롭게, 새롭게 서고 있다

저 정직이 오랜 우정이라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겠다

귀는 얼고

[감상]

시인은 가을 나무 아래에 앉아서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각도를 손바닥으로 받는다. 나뭇잎은 여러 각도로 떨어진다.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시인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날 나무 아래에 오래 앉아서 정직과 우정을 생각한다.

친구들은 시인에게 무엇을 팔려고 한다. 가을 나무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와 철학은 정직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각도는 자연의 섭리라는 정직한 각도이리라.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국가에 딴청을 부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시인의 정직은 나무로부터 배운 철학이다. 나무는 아래에서 위로 자라고, 나뭇잎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수직과 하강!


[추천시]

첫사랑 /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 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고재종 시집 [쪽빛 문장](문학사상사/2004.10.30.) 95쪽에서


[감상]

꽃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눈이 나무에게 꽃을 피우게 하려고 내려 쌓이고 흩날리고 쌓이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햇솜 같은 마음마저도 나무에게 다 퍼부어주고 난 뒤에 황홀한 꽃이 피는 것이다. 꽃은 불에 덴, 사랑에 덴 자리에서 피어난다. 꽃은 눈과 나무의 사랑으로 생긴 아름다운 상처다.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타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사랑이 너무 많다. 양은 냄비 같은 사랑, 일회용 반창고 사랑, 풀잎사랑........

눈이 나무에게 쏟는 사랑은 숭고하다. 겨우내 공을 들였을 눈의 노고를 치하해야 한다. 그렇게 피어난 봄꽃이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온갖 고난을 이기고 피어난 사랑은 아름답다.

첫사랑은 이렇게 황홀한 것이다. 설렘이다. 순수하고 뜨거운 것이다.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도 공을 들이는 이 세상의 모든 청춘들에게 이 시를 소개하고 싶다.


*고재종 : 1957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남. 시집에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새벽 들][사람의 등불][날랜 사랑][앞강도 여위는 이 그리움][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쪽빛 문장] 등이 있음.

====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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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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