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기 2007. 6. 4. 15:35

아이들은 정말로 교복을 입고 싶어 할까 / 김성중


교복을 입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교복을 입어야 중학생답다고 느끼는 그들이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 티를 벗은 자녀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자녀의 성장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자녀가 성장하면 부모의 품을 벗어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교복을 입어야만 중학생답다는 생각이 얼마나 속 좁은지 알 수 있다. 교복을 입어야만 중학생이 되는 것인가? 유치원생은 유치원복을 입고 있다. 그러면 초등학생은 초등학생복을 입는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초등학생복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대학생복을 사달라고 조르는 대학생이 있는가?

군인이 되면 싫어도 군복을 입어야 한다. 직장에 들어가면 그 회사의 유니폼을 입는다. 물론 유니폼을 입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유니폼을 입으면 어느 회사의 사람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고, 결속력이나 유대감이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학생에게 어떤 소속감이나 결속력이 왜 필요한가? ○○학교라는 것은 배움을 위해서 잠시 머무르는 곳이 아닌가? 아니라고? 한 번 모교는 영원히 모교라고? 해병대 구호 같네. 이렇게 어떤 조직에 개인을 가두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문화가 교복을 입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일까?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교복을 입음으로써 단정하게 보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적인 학생이 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새 옷을 사주어야 하는 경제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빨리빨리 교복을 입혀버리려고 안달이다.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 결국 부모의 자식 사랑이라는 말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버린 교복이 아이들의 몸을 감싸는 순간, 모든 아이들이 획일화된 모습으로 개성이 말라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주면 불안해한다. 누군가 자기를 지도하고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혼자서 걸어가라고 하면 두려워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마마보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과잉보호를 한 탓이리라. 교복은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것인가? 정녕 그렇게 믿고 싶은가? 그까이것 천쪼각이 무슨 마법의 손이라도 된단 말인가?

교복을 만드는 회사들은 교복을 입는 학교가 있으므로 돈을 벌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이들의 마음에 드는 교복을 만들어 내고 유명 연예인을 내세워 홍보한다. 교복을 입으면 멋져 보일 것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신화의 마술에 빠져든다. 신화를 깨는 것은 늘 힘들다. 신화에서 깨어나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적당히 살아도 되는 것인가?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가 떠오른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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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7. 5. 18. 09:20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 할 수 있다

권정생 선생은 말년에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는 등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 그러나 <녹색평론>, <작은책> 등 평소 본인이 깊은 애정을 준 매체에는 부정기적인 기고를 통해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줬다. 다음 글은 그가 <작은책> 2004년 8월호에 기고한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 할 수 있다'는 제목의 글이다. 그의 사상의 편린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고 판단돼 <작은책>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다. <편집자>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에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백만 원 들던 생활비는 50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다.

텃밭을 가꾸고 묵혀 둔 논에 쌀농사 지어 자기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농사 짓고. 그리고 남는 시간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뜨개질, 바느질 예쁘게 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실업자도 없어지고 거지도 없어진다. 한국 사람 절반만이라도 이렇게 살면 자연 환경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쓰레기도 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선일 같은 착한 젊은이가 억울하게 죽지 않아도 된다. 구태여 이라크에 파병을 해가면서 석유를 더 많이 얻어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패권주의 미국한테 발목 잡혀 계속 끌려가다 보면 통일도 점점 멀어지고 우리들 자유민주주의도 위태로워진다. 전쟁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미국한테 엎드려 빌면서까지 미국 군대를 우리 땅에 붙잡아 둬야 할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무시무시한 전쟁 무기도 계속 사들여야 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작은 집에서도 네 식구 다섯 식구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승용차를 버리면 기름 걱정 안 해도 되고 일부러 걷기 운동 안 해도 자연히 걸어다니게 되고 살찔 걱정도 없다. 고기 안 먹어도 싱싱한 나물을 손수 가꾸어 먹으면 더 건강해진다. 아이들은 시냇물이 흐르고 솔숲이 우거진 작은 시골 학교에서 공부하면 된다. 거기서 중학교까지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마을마다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스스로 공부하면 된다. 꼭 필요한 사람만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되 출세를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사람과 자연을 위한 인간교육이어야 한다. 과학도 철학도 정치도 모든 게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을 할 때 훌륭한 대학교육이 될 것이다. 시골 마당에 둘러앉아 밤마다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다. 가벼운 우스갯말도 하고 심각한 철학 이야기도 하고. 구태여 대학에 가서 고급 강의를 듣지 않아도 훌륭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지난 6월, 김선일 씨가 피살당한 소식을 듣고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이라크 파병 찬성이 늘고 복수를 해야 한다고 분노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파병 때문에 김선일 씨가 죽었으니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더욱 강하게 파병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김선일 씨의 죽음을 이라크 무장 집단이 저질렀고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한 한국 정부 탓도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의 풍요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죄 없는 김씨를 죽이게 한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 풍요롭게 살면서 우리는 우리 주권도 못 가진, 강대국에 예속된 허울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통일도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이라크 테러 집단의 학살 방법은 너무나 잔인했다. 하지만 우리도 옛날을 돌이켜 보자. 칠팔십 년 전 고통받던 시절, 우리에게도 일본 침략자에 맞서서 싸운 테러리스트들이 있었다. 김구 선생이 아직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살던 열아홉 살 나이 때, 이 청년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원수인 일본 군인 쯔찌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용케 사면되어 기적같이 살아났다. 김창수가 김구가 된 뒤에도 중국에 가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어 윤봉길, 이봉창 같은 애국 청년을 길러 내어 테러를 감행했다.

그 밖에도 안중근 의사는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고, 흑도회의 박열은 천황 암살을 노리다가 들키고, 시인 이육사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이 시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내어 놓고 무장투쟁을 했다. 그 시대에선 이 분들이 오늘의 알 카에다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고, 한국인과 다른 약소국 민중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침략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라크 무장 단체가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이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처럼 핵무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뉴욕이나 워싱턴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이들은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미국과 맞서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김선일 씨의 죽음은 백번 말해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김선일 씨를 죽인 이라크 무장 단체에게 분노할 수만은 없다. 그이들은 우리 군대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미리 경고를 했다. 침략국인 미국을 도와 보내는 군대는 미국과 똑같이 그 사람들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선일 씨는 죽기 직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절규했는데, 정말 우리 모두 큰 실수를 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고 어떤 협박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에 핵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내비쳤다. 만약 우리가 이라크 파병을 거부하고 미국의 심사를 불쾌하게 해서 핵폭탄을 한 방 맞는다면 어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고 그 속에서 얼마만큼 살아남아 나라를 지속 유지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전멸할지 아니면 반은 살아남아 고통 속에서나마 계속 나라를 지켜나갈지 상상조차 못한다. 옛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과는 비교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연 무서운 나라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파이란>에서 이강재는 뒤늦게 찾아낸 파이란과의 가슴아픈 사랑을 깨닫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강재는 오랫동안 복종하며 기대 살았던 깡패 소굴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끝내 죽임을 당한다.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다.

미국 역시 우리 한국을 꼼짝 못하게 목을 조르고 있다. 지난 시절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쪽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평등한 동맹국이라면 절대 이럴 수는 없다. 약소국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 이런 기막힌 관계를 모르고 있다.

몇 해 전에 죽은 이곳 마을 박씨 노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남쪽에 남게 되었다. 박씨 노인이 스무 살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일으킨 집단 항의 사건으로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분산 수용하게 되었다. 미군 감시단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전향할 것인지 공산군으로 남을 것인지를 물었다. 스무 살짜리였던 박씨는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될 때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것이 살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또다른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산군으로 남는가, 아니면 미군 쪽으로 전향을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지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을 옥죄었던 것이다. 박씨는 그때, 어쩐지 우람하게 생긴 미군 장교를 쳐다보자 살아남을 길이 훨씬 높아 보여 결국 미군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때 선택이 박씨 노인을 영원히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실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을 버리고 부자 청년 김중배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더라도 패권주의 미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를 얻는 길은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치러야 할 과정이다. 통일만이 미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통일이 되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는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길뿐이다.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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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7. 2. 9. 00:18

‘2006년 8월 28일(월) 2교시(09:30-10:20) 2학년 ?반’ 에서


월요일이라 상큼하게 출발하려고 했다. 출석을 확인하고 오늘 배울 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배운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확인하는 중이었다.(전시학습회상)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그런대로 수업에 참여하는 듯했다. 그러나 계속 교사의 귀를 괴롭히는 웅성거리는 소리! 교실 뒤를 처다 보자 장00와 조00가 얼굴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사는 순간 생각한다. 어떻게 할까? 그냥 수업을 진행할까? 아니면 화를 내면서 혼을 내줄까? 교사는 매 수업시간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한다. 그것도 고2 교실에서 말이다. 정말 쪽팔려서 선생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어린 아이들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인가?


교사는 결국 화를 내기로 한다. 화를 벌컥 내면서 더러워서 선생 못해먹겠다고 소리친다. 그러면서 앞으로 불러내서 혼짝을 낼 것인가를 순간 고민한다. 하지만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을 알고 포기한다. 그저 학교에 나오는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들 쇠귀에 경일 터인데, 회피하고자 하는 교사의 내심을 아이들은 알 것이다. 그래도 교사는 큰 소리를 치면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 등등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얼굴이 발개져가지고 흥분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교실에 40명이나 밀어 넣고 수업을 하라는 학교를 욕하고, 갈수록 수업시간에 떠드는 00고 학생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00고가 똥통학교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혹평한다.


정말 선생이라는 작자인 내가 너무나도 우습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아이 하나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는 내가 제대로 된 선생인가? 아이들은 순간 엎어져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선생인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교탁 앞 칠판 앞에 서있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쩌지 못하는가? 과연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무얼 배우려고는 하는가? 아니면 선생인 내가 무얼 안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얽히고설켜서 헷갈린다. 선생이 자기 공부만 하면 무얼 하는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면서.


문학선생인 내가 정말 우습다. 문학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어리석다. 문학의 본질과 문학교육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정말로 다시 한 번 문학수업을 고민해야 한다. 아니 수업을 고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면 몇 년 전 예술고에서 수업했던 악몽이 다시 떠오를 것 같다. 아이들은 자꾸 변해가는데, 선생인 내가 너무 안이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의 내면의 세계를 파고들어가야 하리라. 수업 한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한 시간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지금까지 너무 수업과 진도에만 신경써온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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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기 2006. 10. 25. 16:16



계화도 문포의 겨울 모습입니다.

지금 문포에 가면 녹이 슨 배를 볼 수 있습니다.

새만금 방조제가 문포를 죽였더군요.

posted by 추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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