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사과 광주리 바꾸기
1)부패의 늪에서 탈출하는 문제가 문득 한국 사회의 21세기적 과제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문득'이라는 말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패는 우리에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패척결'을 집권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았던 정권이 없고, `부패공화국'이 한국의 이미지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도 없다. 그렇다면 최근 부패 사건 보도와 조사가 전혀 뜻밖이라는 식의 충격을 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충격적인 것은 또 터졌군이 아니라 우리가 썩은 사과 광주리 같은 사회에서 수십 년 살아오면서도 그 광주리를 바꾸지 못하고 부패 요인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새삼스런 자각, 곧 `사회적 실패의 아픈 확인'이다.
2)부패와의 전쟁은 이 실패를 확인하고 실패의 요인을 찾아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작업이 우선 검토해야 할 것은 법과 제도가 없다거나 미비해서 부패가 창궐하는가, 법과 제도가 있는데도 부패 방지에 실패하는가 라는 문제이다. 앞의 경우라면 제도 신설과 보강이 필요하고, 뒤의 경우라면 법과 제도의 보강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제도가 백날 있어봤자 그것을 구멍내어 종이호랑이로 만들어 버리는 제도 외적 요인들은 여전히 남아 위력을 떨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만의 선택이 유효하지 않다면 제도적 장치와 제도 외적 처방을 함께 시도하는 다차원적 접근이 필요하다.
3)우리의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은 거의 언제나 `법과 제도'를 선호하는 쪽으로 기운다. 부패방지법이 제안되고 부패방지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투명성을 내건 제도적 장치들이 거론된다. 이 계열의 시도들을 통틀어 `제도적 접근'이랄 때, 합리적 장치로 부패를 막으려는 제도적 접근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차적이고 절대적인 요청이다. 문제는 그 제도들 자체가 실패할 때다. 제도가 실패하면 제도적 접근법은 치명적 한계에 봉착한다. 최근 미국 `엔론'의 부패와 도산을 보면, 문제는 투명성 제도의 미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실패하게 하는 다른 요인들의 개입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제도 자체가 실패한 것이다. 공적 투명성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미국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리 경우는 투명성의 제도적 보장에만 기대기 어려운 제도 외적 부패요인들이 너무도 많아 보인다.
4)그 제도 외적 부패요인들을 나는 `문화적 요인'이라 부르고자 한다. 특권 추구의 수직 서열 문화, 사적 이해관계로 공영역을 비틀고 덕 좀 보자며 달려들기를 당연하게 여기고 힘있을 때 `봐주기'를 미덕으로 아는 문화, `왕초와 똘만이'식 의리주의로 뭉친 조폭스런 문화, 비뚤어진 온정주의, 쥐뿔만한 권력만 잡아도 목에 힘주고 권력 앞에 기는 비굴성의 문화, 조금 홀대당했다 싶으면 유념했다가 악다귀부리는 보복문화, 거기다 `돈제일주의'의 신종 천민성 문화, 공공성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이런 것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문화적 부패 요인들이다. 이 요인들은 안개처럼 기척도 없이 광주리 속의 사과들을 썩게 하고, 뿌연 안개로 덮어 썩은 것도 보이지 않게 한다. 문화적 요인들은 부패를 조장할 뿐 아니라 부패에 대한 둔감증을 갖고 있다. 이 부패친연적 문화가 우리의 경우 사과를 썩게 하는 `광주리'다.
5)이 광주리를 그대로 두고 부패를 막을 방법은 없다. 부패 탈출은 제도적 접근과 동시에 문화적 접근을 요구한다. 두 접근법은 상호의존적이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아주 대체하지 못한다. 문화적 접근법의 고충은 문화가 문제일 때 누가 그 문화를 바꾸는가 하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정치라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일방적 결정주의는 맞지 않다. 한국 정치의 문제는 정치 자체가 문화적으로 병들었다는 데 있다. 문화는 가족, 친구관계, 비공식 집단 등의 일차적․사적 영역에서 배양되고 전승된다. 가정, 학교 등의 교육장과 직장에서 문화의 문제적 요소들을 드러내어 행동양식을 바꾸게 하고 `시민사회적 문화'를 확립해 가는 것만이 문화개혁의 길이다. 제도적 접근은 이 문화적 접근의 병행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도와야 한다.
<도정일 /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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