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에 오르다
김성중
나는 지금까지 운동을 별로 하지 않고 살아왔다.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고, 교실과 교무실을 왔다 갔다 하고, 거실과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고, 술집과 식당을 왔다 갔다 하고 그러고는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5월엔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왔고, 자동차를 폐차한 뒤엔 세 번이나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을 다녀오는데 10시간이 걸렸고, 학교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 30분 걸렸다. 지리산을 다녀오고 학교에서 집까지 걸으면서 나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걷는데 자신이 생기게 되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09년 10월 24일(토) 12시 40분쯤에 무등산 서석대에 올랐다. 몇 번 서석대에 오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친구의 도움으로 꿈에도 그리던 서석대에 오르게 되었으니 어찌 감개가 무량하지 않겠는가. 이 날은 원래 우리학교 2학년 선생님들하고 지리산 천왕봉에 가기로 했던 날이다. 그런데 2학년이 수련회를 다녀왔고 선생님들의 일정이 바빠서 지리산 산행이 취소가 됐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나는 무등산에 오르기로 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까 마침 쉬는 날이어서 같이 무등산에 오르기로 약속했다.
토요일 아침,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였다. 어제는 9시쯤에 보기로 했는데 오늘은 8시 30분에 보자고 한다. 급히 서둘렀다. 김밥을 한 줄 사서 배낭에 넣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북부경찰서에서 54번으로 환승해서 증심사지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다. 어느 방향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증심사와 중머리재를 경유해서 서석대에 오르기로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까 상가가 말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증심사지구의 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증심사 가는 길을 힘차게 걸어가다가 증심교 앞,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식당에서 물 한 병과 막걸리 한 병을 샀다. 당산나무 가는 길을 버리고 약사사 가는 길로 걸어간다. 한참 일하고 있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등산에 올라간다고 알리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약사사 삼거리 쉼터에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있다. 담쟁이 동호회다. 이 지역 국회의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산행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쓰레기를 줍고 있고 또한 산행하는 사람들도 쓰레기를 되가져가니까 무등산이 깨끗한 것이리라.
새인봉 삼거리에서 중머리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전문 산악인인 친구를 따라 가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 가는 것과 같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쉬어 가고 싶은데 친구는 벌써 저 멀리에 있다. 평소에 내가 얼마나 운동을 하지 않았는지 바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를 따라잡고 나서야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스포츠음료를 한 모금 마시니까 조금 살 것 같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다보니까 중머리재 능선이다. 아, 이제 살 것 같다. 화장실에서 물을 버린 후에 곧바로 장불재를 향해 오른다. 중머리재에서 바라보는 중봉은 울긋불긋하다. 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잰 걸음으로 올라가니 드넓은 장불재 억새밭이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입석대와 서석대 그리고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곧바로 입석대 가는 길로 들어섰다. 조금 올라가니까 주상절리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천연기념물인 주상절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오래전에 넘어진 육각형 주상절리 돌기둥을 타고 앉아서 사과를 깎아먹고 나서 김밥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한 잔 했다. 옆에는 이름을 모르는 빨간 열매를 단 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서 두 여인이 간식을 먹으면서 막걸리를 달라기에 나누어 주었다. 입석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데크에서 기기묘묘한 주상절리 돌기둥을 바라본다. 그 바위에 여러 사람들이 자기가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기려고 자기 이름을 새겨놓았다. 어떤 암행어사는 한 여름에 이곳에 왔다는 흔적을 바위에 크게 새겨놓았다. 주상절리 기둥에 새겨진 글씨를 감상하고 나서 입석대를 오르다가 해직동지인 김택중 선생님을 만났다. 무등산 옛길을 답사하고 있다고 한다. 계속 오르니 서석대다.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는 천왕봉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다니 너무나도 아쉬웠다.
서석대에서는 얇게 안개가 끼어서인지 광주시내가 흐릿하게 보인다. 서석대전망대에서 멋드러진 서석대를 감상하다가 무등산 옛길을 따라서 중봉을 향해 걸어간다. 무등산 옛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이를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려는 엄마의 간절한 소망에도 아이는 지쳤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등산 옛길은 산수동에서 서석대까지 11.87㎞에 걸쳐 놓여 있다. 옛날에 화순 이서사람들이 나뭇짐을 지게에 짊어지고 동문다리 나무전까지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중봉 가는 길은 아주 평탄하다. 이곳은 예전에 군부대가 있던 곳인데 복원이 잘 되었다. 바로 앞이 중봉이다. 중봉을 급히 오르는데 허벅지 안쪽 근육이 땅긴다. 갑자기 주저앉고 싶었다. 친구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아픈 근육을 문지르며 중봉에 오르니 날벌레들이 우리를 반긴다. 하산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늦재를 거쳐서 무등산장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스틱을 짚고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늦재 근처에서 말라 죽은 소나무를 발견했다.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동행한 친구는 아열대기후로 바뀌는 한반도에서 50년 후엔 소나무를 볼 수 없다는 얘기를 한다,
드디어 원효사 집단시설지구에 도착했다. 오후 2시 40분이었다. 관리사무소 옆 매점에서 막걸리 두 병을 사서 컵라면과 김치를 안주 삼아 갈증을 달랬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런데 막걸리를 한 잔 했더니 새로운 힘이 솟는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모임에 가자는 친구에게 나는 “무등산 옛길을 걸어서 가보자”고 떼를 썼다. 무등산옛길 1구간은 원효사 입구에서 끝난다. 우리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산장으로 오르는 길옆으로 옛길이 있다. 친구는 날다람쥐처럼 달려간다. 내가 걸어가자고 했으니 나는 군소리 없이 따라가야 한다. 점점 힘이 빠진다. 주막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우리를 반기는 강아지 두 마리. 떡과 배즙과 선식을 먹는다. 강아지에게 떡을 몇 조각 떼어주니까 잘도 먹는다. 조금 더 걸어가니까 청풍쉼터, 김삿갓 공원이다. 김삿갓시비에서 모르는 글자(흰白 큰大 열十 자가 위에서 아래로 된)를 확인하고 제 4수원지 다리를 건넌다. 광산김씨 세장산(世葬山)을 오를 땐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제 자동차길을 건너면 무진고성으로 가는 길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길을 재촉하는데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허벅지를 붙잡고서 겨우 무진고성에 올랐다. 이제 황소걸음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늘 산행도 끝이다. 밤실마을로 가는 길을 접어두고 신양파크 삼거리 쪽으로 걸어가니까 산비탈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무등산 옛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우리의 길고 긴 산행도 끝났다. 아마 25킬로미터는 걸었을 것이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여태껏 마음속으로만 그렸던 입석대와 서석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온 몸으로 느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광주에서 30년을 살았으면서도 한 번도 서석대를 오르지 못했으니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그러고도 광주시민이라고 자랑삼아 얘기하며 살았으니 얼마나 우스운가? 아아, 이렇게도 빡세게 내가 산행을 하다니 놀랍다. 다음에는 무등산을 일주해보고 싶다. 정말 힘들었지만 멋진 산행이었다.
이제는 정기적으로 산행을 해야 하겠다. 무등산 옛길을 걸으면서 아내와 함께 이 길을 걸으면 아내가 얼마나 행복해할까를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산에 들어가면 세상살이의 온갖 번뇌가 사라지고 싱그러운 산 냄새만이 코를 간질인다. 도시에서 찌든 팍팍한 우리네 삶이 숲속에서 정화되는 것이다. 사진기가 없어서 무등산을 담아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제 보니 핸드폰에 카메라가 달려있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알 것 같다. 디지털 카메라만 생각했으니 내가 얼이 빠졌던 모양이다. 이게 바로 무등산 산신령님의 준엄한 꾸짖음이 아닐까? 무등산을 사랑하라는 신령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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